복음에 부딪히다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36 views
Notes
Transcript
Sermon Tone Analysis
A
D
F
J
S
Emotion
A
C
T
Language
O
C
E
A
E
Social
View more →

서론

추석 연휴 잘 보내셨나요? 어떤 분들은 고향이 멀어서 차로 이동하는 데에만 거의 하루를 꼬박 보내야 하실 수도 있고, 어떤 분들은 자녀들과 친척들을 맞이하신다고 음식하고, 전 굽고,, 엄청 고생하신 분들도 계실 텐데요.
명절을 보내는 모습이 다 달라서 명절의 의미도 사람마다 다르게 와 닿을 겁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명절이란 친척들에게 예수님 향기를 진~~하게 풍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추석도 영적인 부담감을 안고 친척들을 만났을 겁니다. 저는 이번 추석에 예수님 향기를 잘 전하기 위해 애를 쓰긴 했지만, 잘 전하고 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고 하니, 하나님께서 친척들의 마음 속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시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결실의 계절, 가을.
요즘 날씨를 보면, 정말 가을이 온 것 같습니다. 아침 저녁으로는 날이 많이 선선해졌죠.
.
.
‘가을’ 하면 추석이 떠오르고, 또 어떤 게 떠오르나요? 저는 어릴 적 온 몸을 불살랐던 ‘가을 운동회’가 떠오릅니다. 성도 여러분. 가을 운동회 때 박 터뜨리기 다들 해보셨습니까?
청군 백군 나뉘어서 박을 먼저 터뜨리는 팀에게 선물을 준다던지, 밥을 더 빨리 먹게 해 준다던지,, 아무튼 뭔가 걸고 하니까 아이들은 박을 못 터뜨리면 다른 거라도 터뜨리겠다 싶은 각오로 콩주머니를 있는 힘껏 마구 던집니다.
먼저 박이 터진 팀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박에서 터져나오는 꽃가루와 희망찬 메세지가 적혀있는 현수막을 보고 폴짝폴짝 뛰면서 환호성을 지릅니다.
정~말 기쁜 순간이죠.
저는 이 장면을 그려보면서 ‘아, 박 터뜨리기가 복음이랑 참 많이 닮았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시작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 때 그 복음보다 강하고 단단한 게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 광대하고 위대한 복음이 내게 날아와 내 인생을 터뜨려 버렸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의해 터져버렸습니다.
그 때 우리 안에서 무엇이 터져나왔습니까? 말로 표현 못할 구원의 기쁨,, 아니었습니까?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참 기쁨 말입니다.

본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에 부딪힐 때 삶에 참 기쁨이 있습니다. 요즘 나의 삶을 돌아볼 때, 참 기쁨이 있는 것 같습니까? 만약 참 기쁨을 요즘에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면, 복음에 부딪쳐야 합니다.
.
.
‘부딪치다.’ 동사의 원형은 ‘부딪다.’입니다. 이 ‘부딪다.’ 동사에 능동형 ‘치.’가 붙으면, ‘부딪치다.’가 됩니다. 내가 능동적으로 직접 가서 부딪치는 거죠.
오늘 설교 제목이 “복음에 부딪히다.”인데요. 오늘 설교 제목에는 능동형 ‘치.’가 붙지 않고, 피동형 ‘히.’가 붙습니다. 두 말이 발음은 똑같은데, 의미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복음을 향해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가향력적 은혜로 복음이 우리에게 날아왔습니다. 고로 우리는 수동적으로 복음에 부딪힌 게 된거죠. 그래서 우리의 옛 사람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그 산산조각 난 나의 인생에 들어오셔서 거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때 터져나오던 그 기쁨,
여러분. 잊지 못하셨죠?
일방적으로 우리 인생에 날아온 그 위대한 복음에 부딪힌 우리의 인생.
이 인생은 이제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죄의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던 우리를 복음으로 산산조각 내시고 성령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다시 조각해 주셨기에, 이제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능동적으로 복음으로 달려가 부딪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에 자주 자주 부딪치는 인생을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복음에 많이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삶의 기쁨이 더욱 더 넘쳐납니다.
그리고 복음에 잘 부딪치는 인생에 나타나는 반응들이 있습니다. 예배가 더욱 풍성해집니다. 그리고 삶의 전선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하고 싶어집니다. 전도가 필수불가결한 나의 사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갈라디아서 3장의 본문을 가지고 전도라는 주제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의 서신서 중에서 가장 처음 쓰인 편지입니다. 이 갈라디아서는 복음에 대해 그 어느 서신들보다 잘 담아내었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갈라디아서와 결혼했다.”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중세 로마 교회에 대하여 반박문을 쓰며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루터는 복음의 정수를 잘 담아낸 갈라디아서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복음.
그 복음 중에서 특히나 강조하는 부분은 ‘이신칭의.’ 교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여겨질 수 있다는, 이 이신칭의 교리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조하는 편지가 갈라디아서입니다.
.
.
바울서신은 불변의 구조가 있습니다. 서두 부분에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직전 감사 단락을 꼭 거쳤습니다. 수신자들이 신앙으로 잘 서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메세지를 던진 후에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맺음말로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는 서신서 중에서 유일하게 감사 단락이 빠져있습니다. 그 대신 질책 단락이 들어있습니다. 자신의 편지를 쓰는 구조를 깨트려 가면서까지 질책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편지의 수신자인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잘못된 복음에 현혹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까 갈라디아서 편지의 핵심 교리가 무엇이라고 했죠? “이신칭의.” 교리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쉴 틈 없이 가르쳤을 겁니다. 마치 박에 콩주머니를 쉴 새 없이 던지는 모습과 같이 계속 복음을 던졌을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성도들은 피동적으로 복음에 부딪혀 실제로 거듭난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들이 능동적으로 올바른 복음에 부딪칠 수 있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떠난 틈을 타 유대교 거짓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른 복음을 전해서 갈라디아 성도들의 믿음을 뒤흔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서두 부분 다음에 감사 단락을 기록해야 되는데, 질책 단락을 넣은 겁니다. 갈라디아서 1장 6절이 그 질책 단락입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시작.
갈라디아서 1:6 (NKRV)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원래 이 1장 6절 위치에 감사가 나와야 되는데, 바울은 너무 분통이 터졌던 겁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아니면 모르겠는데, 실제로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깨달은 자들이 다른 복음으로 흔들리니까 질책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럼 우리가 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다른 복음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다른 복음이 있으면 올바른 복음도 있겠죠? 그 올바른 복음은 무엇일까요? 1장 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갈라디아서 1:7 (NKRV)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올바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복된 소식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소식 아니겠습니까?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자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고난을 마주해도,, 구원의 기쁨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필승의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그런데 유대교 거짓교사들이 들어와 그 복음에 물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죠.
“그래, 예수 그리스도 믿는 것도 중요해. 중요한데!! 자고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의 혈통으로 왔겠어? 아브라함 아니겠어?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았지. 그 할례는 아주 중요한 율법의 핵심이야.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더해져야만 구원이 완성되는거야.”
.
.
우리는 정답을 알고 이 말을 들으니, 잘못된 걸 인지하지만, 그 당시 갈라디아 성도들은 아주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그 유대교 거짓교사들은 구약 성경에 엄청 능통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현란한 말솜씨로 구약 성경을 인용하며 그들을 현혹했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기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하신 구약의 말씀을 목숨 걸고 지키려고 했습니다. 창세기 17장 10절을 읽어볼까요? 시작.
창세기 17:10 (NKRV)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뒤에 나오는 14절은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17:14 (NKRV)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유대교 거짓교사들이 이렇게 현혹하는데 안 흔들릴까요? 흔들릴 겁니다.
우리라고 해서 이런 모습이 없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거짓 교사들이 우리더러, “당신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다고? 그래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당신, 올 해 예배를 몇 번이나 빠졌어? 당신 올 해에 십일조를 몇 번이나 빠트렸어? 당신 올 해 성경은 한번이라도 다 읽어봤어? 그러지도 못했으면서 무슨 구원을 받았다고 그래. 예수님! 플러스! 행위가 있어야 구원이 완성되는거지.”
실제로 많은 성도들이 굉장히 심오하게 고민하는 부분 아닙니까? 예배 출석, 십일조, 성경 통독. 이러한 것들이 잘못 접근하면 거짓 교사들이 말하는 할례와 같은 것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에 잘 출석하고, 십일조를 잘 하고, 성경을 많이 읽어야 구원을 얻는 게 아니죠.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얻으면, 그 구원하심에 감격해서 자연스럽게 예배에 잘 출석하게 되고, 십일조를 잘 하게 되고, 성경을 많이 읽게 됩니다.
즉 이런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의 증표일 뿐이라는 겁니다.
구원의 요건이 아닙니다. 믿음의 전제조건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할례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표징일 뿐이고, 갈라디아 성도들의 구원을 완성해 주는 능력이 아니라는 겁니다.
.
.
인류 역사상 가장 처음 할례 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유대교 거짓교사들은 이 아브라함을 거의 신성시 여기며 섬겼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구속사에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은 맞습니다.
하나님이 구속사를 이끌어 가실 때 늘 인류와 ‘언약.’을 맺으셨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도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두 번의 언약을 맺어주시는 것을 창세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횃불 언약이고, 또 하나는 할례 언약입니다.
둘 중에서 어떤 게 먼저 맺어진 언약일까요? 횃불언약입니다. 횃불언약은 창세기 15장에 기록돼 있고, 할례언약은 17장에 기록돼 있습니다. 횃불언약은 아브라함이 아브람일 때 맺어졌고, 할례언약은 아브라함일 때 맺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에게 하늘에 떠 있는 무수히 많은 별들을 보여주시며 자손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 당시 아브람과 아내 사래는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별처럼 수많은 자손을 허락하신다는 걸 보면, 자손이라는 단어가 복수형으로 쓰여야 할 것 같은데, 15장 본문에서는 단수로 쓰입니다. 이 자손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님을 약속하신 겁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육신의 후손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을 믿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시작.
창세기 15:6 (NKRV)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았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강조하는 이신칭의 교리가 구약 성경에서 이미 등장하고 있죠.
하나님은 예수님을 약속하는 언약식을 맺으시는데, 쪼개진 짐승 사이로 횃불이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그 횃불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 겁니다. 왜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게 하셨을까요? 언약을 어기면 이 쪼개진 짐승처럼 찢어짐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언약을 어기면 죽을 것이라는 거죠.
언약은 쌍방향적인 것이기 때문에 아브람도 그 쪼개진 짐승 사이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지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그 언약을 지킬 힘이 없다는 걸 아셨습니다. 만약 아브람이 그 쪼개진 짐승 사이를 실제로 지나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아브람은 쪼개짐을 당해 죽었을 겁니다. 하나님은 그걸 아시고 막으셨습니다.
그런데 두 대상이 언약을 맺으면 반드시 두 대상 모두 언약의 의무를 짊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람은 짐승 사이로 지나가지 않았던 겁니다. 그럼 아브람 대신 그 쪼개짐을 감당해야 하는 다른 대상이 필요했겠죠. 그 대리 의무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브람 대신,언약의 의무를 짊어지셨습니다. 이는 아브람의 후손 모두의 의무를 짊어지신 것과 같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언약을 깨트린 아브람의 후손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쪼개진 짐승처럼 찢기셨습니다. 반으로 찢긴 어린양이 피 흘린 것처럼 예수님은 피 흘리셨습니다.
아브람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이 구원하심을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믿음이 할례 이전입니까? 이후입니까? 할례 이전이죠. 믿음이 할례보다 먼저 있습니다.
.
.
그럼 이제 할례 언약을 한번 살펴볼까요? 창세기 17장으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창세기 17장 5절을 읽어볼까요? 시작.
창세기 17:5 (NKRV)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아브라함의 이름 뜻이 무엇인가요? 여러 민족의 아버지입니다.
유대인들의 사상과 완전히 반대되는 말이죠?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유대인만의 조상이라고 여겨왔습니다.
완전 모르는 소리를 한 거죠. 자신들이 그렇게 신봉하던 구약 성경, 그 중에서도 자신들이 그토록 애정하는 창세기에서 이미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깨부수는 말씀이 나오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올바른 복음은 잘못된 복음을 깨트릴 수가 있습니다.
.
.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열방의 아버지로 세우시고, 열방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복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면, 아브라함이 갈라디아 성도들과 같은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창세기 17장 15-17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17:15–17 (NKRV)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분명 앞에 15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브람일 때 예수 그리스도를 후손으로 허락하실 것을 믿었다고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과 여종 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엘이 아니라 사래를 통해 예수님이 오실 것을 말씀하셨고, 아브람이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
.
그런데 아브라함이 흔들렸나봅니다.
17장에서 지금 하나님이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시고, 자손을 주심으로 사라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비웃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런 존재입니다. 너무 잘 흔들립니다. 그래서 계속 복음에 부딪쳐야 하는 겁니다. 박이 콩주머니에 부딪혀 기쁨을 터뜨리듯이, 그리스도인은 복음에 계속 부딪혀야 터져나오는 기쁨을 누리고 믿음을 꽉 붙잡을 수 있는 겁니다.
그걸 아셨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다시 찾아와 복음을 던져주시고 있습니다.
.
.
하나님은 이제 횃불이 아닌 할례로 약속을 맺으시려고 합니다. 무엇을 약속하실까요? 15장과 동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의 후손으로 오실 겁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비웃었던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장 2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창세기 17:21 (NKRV)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아브라함은 아직 태어날 아기의 태명도 못 지었는데, 하나님이 이름을 주십니다. 바로, 이삭입니다. 그리고 태어날 시기도 알려주십니다. 내년 이 시기...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나님이 던져주시는 복음에 부딪혀 다시 자아가 부서졌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창세기 17장 22-24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17:22–24 (NKRV)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아브라함은 무슨 마음으로 할례를 받으러 올라갔을까요?
내년 이 시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내 사라를 통해 이삭을 주실 것이고, 그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실 것을!!
믿는 마음으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우선입니까? 할례가 우선입니까? 믿음이 우선입니다. 할례는 그저 증거일 뿐입니다. 구원에 아무 효력을 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구약 성경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할례는 그 믿음의 증표일 뿐이라는 걸 명확히 밝히고 있는데,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유대교 거짓교사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마 창세기 말씀을 다 외우다시피 했을 텐데 깨닫지 못했습니다. 복음에 제대로 부딪히지 못했던 겁니다.
다시 갈라디아서로 돌아와 볼까요?
사도 바울은 창세기에서 밝히고 있는 아브라함의 이신칭의 교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거짓교사들이 너무 싫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유대교 거짓교사들의 다른 복음에 흔들리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보며 엄~청 속상했을 겁니다.
.
.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세울 때,, 그들이 자신들만 믿음생활 잘 하기를 원치 않았을 겁니다.
바울 자신의 선교적 사명을 갈라디아 교회가 잘 이어받아 전도의 사명, 선교의 사명도 잘 감당하기를 원했을 겁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도하려면, 복음을 제대로 알아야겠죠.
그런데 지금 이토록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을 다시 부여잡으려면 복음의 참 맛을 다시 누려야 합니다. 그 참 맛은 누리려면 복음에 계속 부딪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걸 알았던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마구마구 던집니다.
갈라디아서 3장 1-5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1–5 (NKRV)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책망하는 질문 형식으로 복음을 계속 던지고 있습니다. 각 절의 중간 중간을 보면, 올바른 복음이 적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 성령을 받은 것, 성령을 주시고 능력을 행하시는 이.
5절에서 말하는 능력은, 능동적으로 복음에 직접 부딪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 힘으로는 복음에 부딪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함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만 가능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 능력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서의 2장 13-14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에베소서 2:13–14 (NKRV)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측정할 수 없을만큼 먼 거리였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이었죠.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언약의 짐승처럼 쪼개져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찢기심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어버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거리는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달려가 부딪치셨습니다. 그래서 찢기시고 피 흘리신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겁니다. 우리가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구원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으로부터 터져나오는 진리이고, 참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소유한 우리는 자연스레 복음을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을 둘러보면, 복음을 더 전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사상을 좇는 사람들은 단 하나의 진리,, 라는 말을 무척 싫어합니다. 너도 맞고, 나도 맞다고 합니다.
이 시대에 어떻게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겠습니까? 두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기독교에만 있는 탁월한 요소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기에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가치관이 있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소외되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미래만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침착하고 평안하게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극도의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입니다. 복음의 탁월함을 우리가 먼저 풍성하게 누리고 많은 이들에게 담대히 선포하기를 소망합니다.
두 번째, 내가 먼저 복음에 자~주 자주 부딪쳐야 합니다.
복음이 아닌 다른 세상적인 것들에 너무 많이 부딪치면 세상 사람과 똑같아 집니다. 세상 나가보면, 예수님 믿는 자보다 예수님 안 믿는 자들이 더 많은데, 우리가 복음에도 계속 부딪치지 않고서 어떻게 그들 틈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먼저 복음에 계속 부딪칩시다. 성경책을 펼치고, 큐티책을 펼쳐서 나 자신을 그 말씀 안에 있는 복음에 계속 던집시다. 그럼 기쁨이 터져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주셨다는 복음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을 누리는 자는 전도하지 말라고 전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에 자주 부딪치며 복음의 기쁨을 풍성히 누림으로 전도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를 소망합니다.
내일 목요전도대가 있습니다. 오전 열시 삼십분에 지하 소예배실에서 전도예배를 드리는데요. 오늘 수요예배에 나오신 모든 분들은 내일 목요전도대에 나오시기로 약속~~ 은 하지 않겠습니다.
감동 되시는 분들은 나오셔서 함께 예배 드리고 전도합시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복음이신 예수님은 넓고 큰 바다 같으신 분입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는 저 바다보다 깊고 넓습니다.
우리는 이제 성령님으로 인해 능동적으로 예수님께 부딪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바다로 능동적으로 노 저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은혜의 역설이 한가지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바다로 나아가는 우리가 탄 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은혜의 바다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 인생은 전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삶에 유일한 복된 소식, 최고의 복된 소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