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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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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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Tone
Analy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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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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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t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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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Tone
Ope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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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entiousness
0.07UNLIKELY
Extraversion
0.2UNLIKELY
Agreeabl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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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al Range
0UN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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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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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한 번 이상은 들어보셨을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의 주 무대가 되는 초대교회에는 특이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자신의 지위, 재산, 물질들을 기꺼이 포기하고 공유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나의 것을 의무가 아닌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나누었습니다.
어떻게 그들은 나의 것을 자원하여 나눌 수 있었을까요?
제2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각자가 생각하는 교회의 사명.
교회의 모습은 다양할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생각했던 교회의 사명은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열망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생계를 어느 정도 혹은 많은 부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도 직장에서 해고 당하고, 경제적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미 생계에 어려움이 발생한 상황입니다.
무엇이라도 일을 해야 가족이 굶지 않고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인들은 마음에 있는 기쁨과 소망을 그대로 나가서 전하는 것과 생계를 어느 정도 해결한 후 예수님을 전하는 것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부자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진 것의 많고 적음을 떠나 이들의 마음에는 동일한 소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무엇에 어려움을 느끼고 고통을 받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것을 기꺼이 포기하기로 결단합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좀 더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것을 내려 놓기로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함께 나누며,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돕기로 결정합니다.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 이 교회의 사명을 위해 나누는 삶을 기꺼이 선택한 것이죠.
이렇게 자신의 재산을 공유하는 삶을 살아가던 그 때에, 우리가 잘 아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바나바입니다.
4장 36-37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아멘”
바나바는 우리가 잘 아는 인물입니다.
바울과 함께 선교여행을 떠났고, 또 그 이름의 뜻처럼 사람들을 위로하는 역할을 하던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던 바나바가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주었습니다.
다른 초대 교인들처럼 그것을 나눠 모두가 함께 사용하여 빈부의 격차를 느끼지 않고 함께 누리며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나바 전에도 사람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자신의 것들을 기꺼이 나누고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정말 훈훈한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누어 주지 않아도 괜찮고,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음에도 사람들을 스스로 자원하여 나누고 있었던 것이죠.
훈훈한 이 상황에 바나바가 방점을 딱 찍습니다.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주고 좋은 리더였던 그도 자신의 것을 팔아 함께 나눕니다.
바나바와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것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교회의 소명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관심과 마음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분 하나님을 믿고, 한 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 구원을 받고
한 분 성령을 소유한 이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걷고 있었기에 기꺼이 팔아 나누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를 보면서 부러운 마음을 느꼈던 것 같아요.
자신도 교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 혹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싶었던 것이죠.
물론 바나바는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자신의 것을 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역시 바나바”라는 사람들의 평을 들으면서 자신도 그러한 평가를 받고 싶어했던 것이죠.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호기롭게 팔았는데, 팔고 난 후 손에 쥐어진 돈들을 보니 아깝게 느껴졌거든요.
아나니아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가 호의를 베풀어주셨다.”이며,
삽비라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여호와가 호의를 베풀어주신 아나니아.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 삽비라.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처럼 살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손 위에 있는 돈. 자신의 눈과 마음을 차지해 버린 그 많은 돈 앞에 하나님을 저버리고 숨기기로 결정합니다.
사실 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 두 부부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왜냐하면 저도 이렇게 나의 것을 공유하거나 함께 사용해 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생일 때 CCC라는 선교 단체에서 활동을 했었습니다.
CCC는 사랑방이라고 해서, 동아리 사람들끼리 모여 돈을 모아 집을 빌리고 그 안에서 함께 생활하곤 했었는데요.
사랑방에 사는 사람들은 밥, 설거지, 청소, 빨래 등을 역할을 나눠서 하고, 아침 저녁에는 말씀도 읽고 예배도 드립니다.
함께 생활하며 때론 옷이나 가방 등을 돌려 입기도 했었습니다.
완전히 초대교회와 같은 삶은 아니었지만, 초대교회처럼 모든 것을 공유하고 함께 살아가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 사랑방이었습니다.
처음에 사랑방에 들어갈 때는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일단 비싼 자취방을 함께 돈을 모아 빌렸고, 친하고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지낼 수 있는 공간이기에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주 두주 한달 두달이 지나면 점점 마음에 불편함이 생기더라구요.
과제와 여러 일들로 바빠지기 시작하니 청소 당번이 청소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생기고, 처음에는 말하고 옷을 빌려 입더니 나중에는 보이는 것을 그냥 입고 나가는 일이 점점 잦아 지게 된 것이죠.
섭섭마귀가 들어온 것처럼 굉장히 작은 일에도 섭섭해지게 되고, 어느새 한명이 혼자 밥을 하고 치우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는 일들이 생겨나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한학기가 끝나갈 때쯤 마음에 이런 결단이 서게 됩니다.
“다음 학기에는 혼자 살아야겠다.”
“아무리 친해도 같이 사는 것은 좋지 않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아무리 배려를 하고 서로를 섬겨주어도, 서로가 생각하는 섬김과 배려의 기준이 다르고, 기질과 성향들이 다 다르다보니 잘 맞지 않는 일들이 생기게 되거든요.
결국 가방이나 바지를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두기도 하고, 완전히 보여주었던 물품들을 어느 정도 치우기도 하는 등의 행동을 하는 모습도 생기더라구요.
사실 이렇게 치우고 보이지 않는 곳에 둔다고 해서, 그 사람의 행동을 비난하거나 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것이기에, 공유하지 않기로 마음 먹어도 되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이 자원해서 내려고 했으나 사실 그것은 온전히 그들의 소유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덜어 놓고 하나님께 드려도 비난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의 이러한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행위의 댓가로 이들은 죽게 됩니다.
이들의 죽음 너무 가혹하다 여겨지지 않으시나요?
비록 처음 이야기처럼 모든 것을 다 드리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적지 않은 금액을 결단하여 내놓은 그들의 용기와 마음을 생각하면 죽음이 가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런 행위는 초대교회에 악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모여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한 이 때에 이런 부정한 일을 그냥 넘어간다면,
기존에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놓은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생길 수도 있고, 자신의 것을 준 사람들은 괜히 서운한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의 잘못.
속임수는 반드시 어떠한 댓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아내와 합의를 끝낸 아나니아는 자랑스럽게 베드로를 만나러 교회에 들어옵니다.
저는 아나니아가 꽤나 당당한 걸음과 또 어깨에 힘을 주고 베드로 앞까지 걸어갔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때 아나니아가 원했던 반응은 “잘했다.
정말 고맙다.
그렇게 결단하고 헌신한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라는 것과 함께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박수였습니다.
그런 기대감을 갖고 교회에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계획에는 없었던 질문을 베드로를 통해 듣습니다.
3-4절에 기록 된 베드로의 질문은 크게 6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왜 사탄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가?”입니다.
굉장히 자극적이고 강한 말 같지만 사실 이 말은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 말하면서, 왜 그 가운데 하나님이 없느냐”라는 말입니다.
죄송하지만 저도 여러분도 이렇게 “사탄이 나의 마음을 가득 채워진채로, 교회 일을 했던 경험”이 있다는 것 아시나요?
저는 14살 때부터 교회에서 반주를 했습니다.
중고등부 반주, 주일 1부 성가대 반주 혹은 지휘, 2부 성가대 반주 그리고 오후 예배도 반주를 했었습니다.
원래 교회에서 반주를 맡아하던 누나가 고3이 되면서 저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었던 것이죠.
제가 처음 반주를 시작했을 때 정말 반주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반주를 어느 정도 하게 되었고, 저를 대체할만한 사람이 교회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중3이 되었을 때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중1에 올라온 동생들 중 두명이 반주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저보다 훨씬 더 재능이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미 제가 2년 이상 반주를 했기 때문에, 그 자리는 저의 자리였습니다.
그 동생들이 아무리 잘 쳐도 제가 내려놓지 않는 이상 저를 대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의 욕심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던지 그 자리를 지켜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는 반주, 또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하는 반주가 아닌 저를 드러내는 반주의 자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중고등부가 점점 부흥하기 시작하면서 찬양팀 지원자가 많아졌고, 그 동생들 역시 찬양팀 반주로 지원을 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했던 저의 자리였는데 갑자기 반주 오디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그 동생이 저보다 더 잘쳤습니다.
이내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누구도 저에게 그 동생에게 반주자리를 양보하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저는 모른척 또 반주의 자리에 앉았고 그 자리에 집착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제 반주에는 더 이상 하나님이 없었고, 하나님을 위한 마음도 없었습니다.
나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욕심.
당연히 이 자리는 나의 것이라 생각하는 교만.
예수 그리스도가 남지 않는 사역.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내가 드러났고, 나를 향한 평가만 높아지는 것.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첫번째 질문입니다.
“왜 사탄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가?”
“왜 하나님을 위해 말한다 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님이 없느냐!”
아나니아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것을 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는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거든요.
내가 나의 것을 희생했고, 그 기부금의 액수가 인상적이라면 사람들이 자신을 좋게 봐줄 것이다.
거기까지만 생각했던 것이죠.
그리고 조금 더 욕심내서 그 공동체 안에서 영향력을 얻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사탄이 가득 차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교회 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내가 속한 곳에서 열심히 일을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남지 않고 서운함, 섭섭함 혹은 분란 같은 일들이 있었다면
우리 역시 나의 마음을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선택 속에 하나님이 있었는지”
“아니면 교만과 욕심이 가득차 있었는지”를 반드시 자신에게 되물어야 합니다.
“왜 성령을 속였는가?” 베드로의 두번째 질문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속일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심령.
우리의 마음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 분을 속인다는 것은 정말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성령을 속이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가 팔아야 겠다라고 생각할 때부터, 팔고 수익금을 감추려고 하는 것 그리고 교회로 온 것 까지 성령님은 그의 중심에서 다 보고 듣고 계셨습니다.
그는 모든 선택 가운데 성령님을 단 한번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고백을 했으면서도 불구하고 성령님이 나와 함께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잊어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그리고 나의 모든 삶을 그분이 지켜보고 함께 느끼며 나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나요?
성령님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계신가요.
너무나 부끄럽지만 저도 그렇게 살아가지 못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추석 연휴 기간에 성령님을 의식하며 살지 않았더라구요.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잘 압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숨쉬는 것처럼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보니 의식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더라구요.
제가 필리핀에서 선교사님과 함께 살아갈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 만났던 한 친구가 있습니다.
저는 이 친구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날라리.
양아치”.
현지 교회에서 만난 이 친구는 좀 노는 아이처럼 보였습니다.
찬양을 열심히 하는데 사람을 의식하는 듯 보였고, 늘 자매들하고만 같이 있었고 또 농구를 할 때마다 굉장히 자신이 멋있어 보이려고 했던 친구였습니다.
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한데요.
정말 꼴보기 싫은 친구였어요.
자아도취에 빠져 사는 그 친구와 저는 어느 정도 선을 긋고 지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몇년 뒤 필리핀에 가서 그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완전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친구가 너무 바뀌어 있었거든요.
자아도취의 사나이.
사람을 의식하며 살던 이 친구가 너무 신실해진거에요.
자매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던 이 친구가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결단을 하고 신학교를 가서 전도사가 되어 있었어요.
떨어져 있던 2-3년 사이 이 친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너무 궁금했어요.
그래서 “무엇이 너를 이렇게 변화시켰느냐?” 물었어요.
그리고 그 친구는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어느 순간 믿어졌다.”
“내가 어떻게 믿음 생활을 해왔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는데 너무 부끄러웠다.”
“부끄러운 마음에 하나님께 나의 모든 잘못과 죄들을 고백했고, 다시는 내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단을 했다.”
“그리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경건생활에 힘쓰고 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친구는 지금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신실하게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의식하는 삶”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의 모습”은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1분 1초 마져 함께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는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성령님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왜 땅 값 중 얼마를 자신을 위해 감추었는가?”
“왜 땅을 판 후에도 그 소유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보지 못했는가?”
“왜 판 돈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음을 깨닫지 못했는가?” 베드로의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질문입니다.
아나니아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교회에 들어와서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얻은 돈 전부라 말합니다.
수익금 전체를 교회에 헌금했다 그는 주장합니다.
그는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길 가에 서서 “이거 생각보다 돈이 많네.
다 드리면 우리가 쓸게 없으니까 좀 챙겨두고 일부만 갖다 내자”라고 떠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 앞에 서서 돈을 꺼내면서 “여보 안되겠어.
이 돈 일부를 집에 좀 두고 와”라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 그리고 두 사람만 있는 장소에서 배분한 후 들고 교회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팔아 얻은 돈이 얼마인지 사람들을 모릅니다.
그랬기에 아나니아는 자신있게 그 돈을 헌금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왜 땅 값 중 얼마를 자신을 위해 감추었는가?”라고 질문을 합니다.
예상치 못한 질문 혹은 공격을 받으면 사람들은 티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무표정한 모습을 짓는다 해도 어딘가는 불안한 티가 나기 마련입니다.
아나니아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베드로와 둘이 있을 때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고 있는 중에 받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왜 땅을 판 후에도 그 소유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보지 못했는가?” “왜 판 돈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음을 깨닫지 못했는가?”라 연이어 묻습니다.
개인의 소유를 파는 것은 전적인 주인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팔아 얻은 그 수익금을 전부다 헌금 할 것인가 아니면 일부만 헌금할 것인가도 전적인 개인이 결정할 문제라는 뜻입니다.
사실 아나니아가 사람들에게 “팔고 나니,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려면 이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일부만 헌금하겠습니다.”라
말해도 그 누구도 그들을 비난 할 수 없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결단이고 또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나니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교회 내에서 영향력을 갖기 원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을 헌금하겠다고 말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무르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왜 이 일을 마음에 두었는가?” 베드로의 마지막 여섯번째 질문입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성령님을 속이고, 교회를 속이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헌금을 거짓말이라는 봉투에 담은 뒤, 가진 모든 것들을 내놓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죠.
사탄으로 마음을 채우고, 성령님을 속였던 아나니아는 자신의 죄악된 행동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지게 됩니다.
바로 엎드려져 죽게 된 것이죠.
베드로는 그를 향해 어떤 심판의 말도 하지 않았고, 죽음으로 갚으라 정죄하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의 마음이 사탄의 조종을 받았음을 드러냈고, 거짓말한 것을 이야기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심판하셨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두가지로 갈립니다.
한 무리는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누구에게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한 무리.
젊은 사람들은 “일어나” “쉽게 메고 나갈 수 있도록 천으로 시체를 싸고” “메고 나가 신속하게 장사를 진행합니다.”
거창한 장례 절차를 밟아야 할 사람이 아닌, 성령님을 속인 죄인의 장사였기 때문에 두세 시간 내로 마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따라 시신은 신속히 처리되어야 했습니다.
아나이나가 죽은 이유는 하나님께 다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죽은 이유는 드린 것에 대한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부정직과 속임수가 합쳐지는 그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너의 것을 달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다 드리겠다”라고 했습니다.
차라리 팔고 나니 좀 아까웠다고 그들의 마음을 진실되게 고백했다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동기는 결국 죽음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아나니아가 죽고 세시간쯤 지난 후, 그의 아내 삽비라가 교회를 찾아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삽비라 역시 남편처럼 기대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오고 있습니다.
남편이 먼저 가서 많은 칭찬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굉장히 훈훈한 분위기 속에 자신이 등장하면 모두가 자신을 향해 고맙다 인사하며 박수를 쳐줄 것이라.
기대하며 교회에 딱 들어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며 먼저 인사하고 칭찬해주어야 할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먼저 온 남편을 찾기도 전에 베드로가 묻습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그의 질문에 삽비라는 “예 이것 뿐입니다.”라고
남편과 합을 맞춘데로 대답을 합니다.
삽비라는 사실대로 말할 선택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사실 삽비라는 굉장히 유능한 여자였습니다.
땅 판 값을 남편과 상의하여 나눈 후 그녀는 교회에 오지 않고 다른 곳에 갔습니다.
챙겨둔 그 돈을 따로 처리하러 간 것이이죠.
남편으로부터 독립하여 개인적으로 이러한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라는 뜻은 베드로의 질문을 듣고 이상하다 의심을 할 수 있을만큼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그녀가 베드로의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생각과는 다른 교회 내의 무거운 분위기, 자신을 맞이해야 했을 남편의 부재 그리고 베드로의 질문에 그녀가 당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소유를 판 전부를 드린 것”이라 대답합니다.
베드로는 연이어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라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 “어째서 함께 성령을 속이기로 꾀했는가.
왜 남편의 의견에 동의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삽비라 역시 아나니아처럼 엎드러져 죽습니다.
그녀가 죽자마자 남편을 장사하고 돌아오던 젊은 사람들이 들어왔고 그들은 다시 삽비라를 들고 나가 장사를 지냅니다.
비극적인 한 부부의 이야기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내용을 성경에 기록해 두셨을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 동기는 무엇인가?”이며, 하나는 “곁눈질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왜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믿도록 하는 여러분의 마음의 동기는 무엇인가요?”
갑자기 도발적인 질문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우리는 반드시 이 부분에 대한 답을 해야 합니다.
“나는 왜 하나님을 믿는가.”에 대한 확실한 나의 답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답이 있어야 아나니와 삽비라처럼 성령을 속이고 교회를 속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나를 속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난 4월부터 7월까지 약 3개월동안 청년들과 설교 시간에 사도신경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예배 시간마다 고백하는 이 사도신경의 의미를 알고 계신가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으로 시작하는 이 사도신경을 우리가 모든 예배 시간마다 외우고 고백하는 까닭은 이 신경 자체가 “나는 왜 하나님을 믿는가”에 대한 확실한 답을 나에게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신 성부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던져 죽으신 후 부활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분과 영원히 붙어 있을 수 있도록 해주시는 성령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계속해서 고백해 왔습니다.
제가 조금 전에 했던 질문
“왜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믿도록 하는 여러분의 마음의 동기는 무엇인가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의 고백.
사도신경이 단순한 주문이 아니라, 정말 우리의 믿음과 신앙의 고백이 된다면,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와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들처럼 성령을 속이지 않고 의식하며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그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곁눈질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 흔들린다면,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나의 실제적인 고백이 없다면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선택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즐겨듣는 찬양팀 중에 “히스윌”이라는 팀이 있는데요.
이 팀이 2010년에 “곁눈질”이라는 찬양을 불렀습니다.
굉장히 경쾌하고 신나는 이 찬양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이 땅을 밟았다가도 내일은 주님 뵐 수도 있죠”
“왜 미련하게 영원히 살 듯 진리를 떠나 왜 곁눈질 하나”
“오늘이라도 천국문 열고 그리던 주님 만날 것처럼”
“욕심도 없이 미련도 없이 매일 감사로 난 살고싶어라”
“내일이라도 주님 만나면 잘했다 칭찬 받을 수 있게”
"예수님 따라 좁은 길 따라 진리 붙들고 난 살고 싶어라”
“오늘 이 땅을 밟았다가도 내일은 주님 뵐 수도 있죠”
“왜 미련하게 영원히 살 듯 진리를 떠나 왜 곁눈질 하나”
“오늘 이 땅을 밟았다가도 내일은 주님 뵐 수도 있죠”
“주님 앞에서 순결한 신부로 흠도 티도 없이 난 살고 싶어라”
“곁눈질 하지 말자"
이 찬양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내용을 담아 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저는 이 찬양의 가사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오늘 이 땅을 밟았다가도 내일은 주님 뵐 수도 있죠”
“왜 미련하게 영원히 살 듯 진리를 떠나 왜 곁눈질 하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미련하게 영원히 살 듯 자신의 것을 숨겼고, 하나님께 거짓말 했습니다.”
그들은 손에 쥐어진 돈을 보고 곁눈질 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닌, 곁눈질로 사람들의 시선과 칭찬을 원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었던 첫 동기는 순수 했으나, 곁눈질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위해 살아갔습니다.
몸은 교회에 있고, 공동체에 있으나 그들의 온 마음과 시선은 교회 공동체가 아닌 다른 것에 있었습니다.
곁눈질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잘못된 곳임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잘못된 시선이 맞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함께 나눈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시선과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하루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왜 믿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우리의 시선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다른 곳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주신 나의 자리를 여러 이유로 포기하거나 놓아 버렸거나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시선은 하나님이 아닌 내가 원하는 그 무언가에 고정되어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마음과 시선을 자주 빼앗아 가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눈을 자꾸 옆으로 돌리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할 때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의 마음 속에
“사탄.
즉 나의 욕심과 의”가 아닌 “성령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고백”으로 가득차기를 소망합니다.
“성령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고백”으로 “곁눈질 하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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