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으로 산다

사무엘하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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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산다 / 그리스도인들은 진심 어린 태도로 삶을 살아간다.
진정성이 있느냐 없느냐가 성공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나는 솔로다’ 같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이유도 진정성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재석같은 연예인들이 롱런하는 이유도 모두 자기 일에 진정성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진정성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감으로는 뭔지 알겠는데 정의하기는 참 쉽지 않습니다.
제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두가지 조건은 분명합니다.
첫째, 앞과 뒤가 다르지 않는 것 그리고 둘째, 처음과 나중이 다르지 않는 것
최근 돌아가신 전국노래자랑 송해같은 분이 존경받는 이유는 이런 진정성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최고로 진정성을 보여준 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다윗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진심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
오늘 말씀은 기본적으로 ‘시’로서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시이자 장례노래입니다.
시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다윗이 죽음을 애도하는 대상은 사울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사무엘상을 우리가 몇달전 보았는데 아마 기억이 가물가물할 것입니다.
사무엘상 마지막을 보면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무엘하는 사울이 죽은 후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이 지은 시의 제목은 ‘활의 노래’입니다.
원래 제목은 ‘활’인데 장르이름까지 붙여 ‘활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오페라에서 보면 ‘아리아’라는 파트가 있는데, 마치 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이 폭발할 때 오페라에서 아리아를 부르는 것처럼 다윗은 자신의 감정이 폭발하자 시이자 노래를 만들어 부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점은 왜 제목에 ‘활’이 들어가는가 하는 점입니다.
‘활’은 다윗에게 있어 매우 의미있는 물건이었습니다.
사무엘상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때 요나단이 다윗을 도와준 무기가 바로 활이었습니다.
‘활’을 통해 다윗은 요나단을 기억하고 그를 위한 시와 노래를 만든 것입니다.
이 ‘활의 노래’를 통해 우리는 진정성있는 그의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번째, 진심어린 슬픔입니다.
19-21절입니다.
이스라엘아, 우리의 지도자들이 산 위에서 죽었다. 가장 용감한 우리의 군인들이 언덕에서 쓰러졌다. 이 소식이 가드에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이 소식이 아스글론의 모든 거리에도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듣고서 기뻐할라. 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딸들이 환호성을 올릴라.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는 이제부터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고, 비도 내리지 아니할 것이다. 밭에서는 제물에 쓸 곡식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길보아의 산에서, 용사들의 방패가 치욕을 당하였고, 사울의 방패가 녹슨 채로 버려졌기 때문이다.
다윗은 진심으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19절에서 말한 ‘우리의 지도자들’이란 사울왕과 요나단을 말합니다.
다윗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으며 가장 용감한 군인들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가식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다윗은 갑자기 왕을 잃어버린 백성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노래를 백성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사울왕과 요나단의 죽음이 가드와 이스글론에 전해지지 않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이 도시들은 블레셋 다섯 도시중 두 곳인데 결국 블레셋 사람들에게 이 소식이 전파되지 않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소식을 들으면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 사람들이 기뻐하고 좋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21절에 보면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길보아 산들을 저주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원수같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비참한 죽음 앞에서 그는 진심으로 슬퍼했습니다.
다윗 입장에서 보면 사울왕의 죽음과 왕위 서열 1순위였던 요나단의 죽음은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다윗은 어릴적부터 예언자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지명받았기 때문에 그 예언이 이루어질 때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울왕이 죽고, 그의 용맹스런 아들 요나단까지 죽었으니 이제 진짜 왕이 될 일만 남은 것입니다.
심지어, 1장 전반부를 보면 한 군사가 죽은 사울왕의 왕관과 팔찌를 자신에게 가져왔기 때문에 눈 앞에서 그것을 보았으니 욕망이 요동칠 법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국가적인 비극 앞에서 자기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다윗이 자신이 곧 왕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면 진심으로 슬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때에 달려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할 일은 곧 왕이 될 생각으로 은밀히 기뻐하기보다 자신이 섬기던 왕과 자신이 사랑하던 친구의 죽음을 백성들과 함께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위해 초조해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남의 비극을 자신의 기회로 삼지 않았습니다.
이 점이 바로 왕이 되기 위한 하나님의 테스트에 통과한 지점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과 함께 진심으로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을 왕으로 뽑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다윗은 그럴 수 있었을까요?
다윗은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은 하나님에게도 큰 슬픔이란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런 유혹에서 벗어나 놀라운 공감능력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홍수가 와서 수많은 이재민들이 생겼을 때의 일입니다.
여당 정치인들이 모두 몰려가 수해현장 복구를 돕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한 정치인이 ‘아 비나 좀 왔으면 좋겠네, 사진 잘 나오게~’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건은 국민들에게 엄청난 뭇매를 맞았습니다.
홍수때문에 고통과 슬픔 속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정치적 이익만 생각하는 모습에는 진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공감능력은 어떻습니까?
이웃의 기쁜 일에 진심으로 함께 기뻐할 수 있고, 슬픈 일에 진심으로 함께 슬퍼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내 이익을 따지기보다 먼저 누군가의 아픔을 먼저 공감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진심어린 기쁨과 슬픔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둘째, 진심어린 충성입니다.
22-24절입니다.
원수들을 치고 적들을 무찌를 때에, 요나단의 활이 빗나간 일이 없고, 사울의 칼이 허공을 친 적이 없다. 사울과 요나단은 살아 있을 때에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구나. 독수리보다도 더 재빠르고, 사자보다도 더 힘이 세더니. 이스라엘의 딸들아 너희에게 울긋불긋 화려한 옷을 입혀주고, 너희의 옷에 금장식을 달아 주던, 사울을 애도하며 울어라.
다윗은 진심으로 충성스런 신하였습니다.
여기서 충성이란 말은 복종이라는 말보다는 faithful, 즉 신실한 사람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처음 마음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의미입니다.
22절에서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용맹함을 칭송합니다.
요나단의 활이 빗나간 적이 없고, 사울의 칼이 허공을 친적이 없다고 높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여서 죽을 때도 함께 죽은 것이라고 그들의 죽음을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봤을 때 사울왕과 아들 요나단의 죽음은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전쟁터에서 동시에 죽은 치욕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가식일까요?
자신이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일까요?
다윗은 진심으로 그들을 그렇게 높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울왕이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왕임은 틀링없습니다.
또한 요나단은 누구보다도 용맹한 군사였고, 아버지를 지켜주던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다윗에게 있어 개인적으로 사울은 정말 원수보다도 못한 최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삶을 이스라엘 왕으로서 재평가하고 그의 권위를 지켜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개인적인 복수심이나 증오심에 함몰되어 있는 그런 작은 그릇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딸들에게 사울왕을 위해 애도하며 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통 정권이 바뀌면 이전 정권을 폄훼하고 평가절하 하곤 합니다.
그것이 현재의 정권을 높이는 길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정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왕과 요나단을 높이며 백성들이 그들을 존경하고 마음껏 슬퍼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정치인이었지만 오히려 정치인 같지 않았기에 위대한 정치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그럴 수 있었을까요?
다윗은 사울을 왕으로 기름부어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세운 왕을 함부로 비판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습니다.
절호의 기회였고, 도망자의 삶을 끝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부하들도 그렇게 하자고 계속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유혹에서 벗어나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름부어서 세운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1장 앞부분을 보면 아말렉 군사 한명이 다윗을 찾아와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알립니다.
그러면서 사울이 죽기 직전 자신에게 죽여달라고 해서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보고합니다.
그 증거로 사울왕의 왕관과 팔찌를 바쳤습니다.
그렇게하면 그는 다윗에게 칭찬받고 포상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했을까요?
다윗은 그 청년을 죽여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어찌되었든 기름부음받은 왕을 그가 죽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이 다윗의 충성심, 변하지 않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자,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택하신 이유입니다.
이런 다윗의 충성심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 변치 않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왕을 피해다닐 지언정 끝까지 반역을 하지 않았고,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지켜 충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사람들을 얼마나 충성스럽게 진심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진심어린 충성은 어떠한 간사함과 거짓도 이길 수 없습니다.
뭐든지 계산하고 재는 사람이 성공할 거 같지만 그런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꾀에 자신이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뭐든지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손해볼 지 모르지만 결국 인정받게 되어 있습니다.
오징어게임의 오영수 할아버지가 대표적입니다.
그 분을 보면 참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분은 50년 동안 200번 넘게 연극무대에 서셨습니다.
이 분만큼 연기에 진심어린 충성을 보여준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 분이 결국 인정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과 관계에 얼마나 진심으로 충성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나중에 우리를 평가하실 때 우리의 업적이나 능력을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충성됨을 평가하십니다.
주님은 이런 진심어린 충성을 보이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셋째, 진심어린 사랑입니다.
25-27절입니다.
아, 용사들이 전쟁에서 쓰러져 죽었구나. 요나단, 어쩌다가 산 위에서 죽어 있는가? 나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의 마음이 아프오. 형이 나를 그렇게도 아껴 주더니, 나를 끔찍이 아껴 주던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도 더 진한 것이었소. 어쩌다가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무기들이 버려져서, 쓸모없이 되었는가?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생명의 위협을 무릎쓰면서도 다윗을 도왔던 형이자, 친구였습니다.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계략을 짰을 때 그 사실을 몰래 알려줘서 다윗은 광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그것때문에 요나단이 오히려 사울왕에게 죽을 뻔 했습니다.
또한 요나단은 기꺼이 다윗에게 차기 왕의 자리를 양보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왕의 자격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런 요나단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요나단이 딴 맘먹고 자신을 제거하면 끝나는 것이지만 그는 요나단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왕의 살해 위협 속에서 살얼음판을 걸어다니던 다윗은 누구에게도 속 시원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요나단과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고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따지고보면 다윗도 요나단도 정치인입니다.
이런 정치인들만큼 자기 이익에 밝은 사람이 없고, 심지어 왕의 자리가 걸려있으니 민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느 정치인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요나단의 사랑을 여인의 사랑보다 더 진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멋있는 우정은 남녀간의 사랑보다 더 빛나고 아름다운 법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진심어린 사랑을 주고 받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혹시 항상 누군가를 마음 한켠에선 의심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사귀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내 이익에 따라 사람들과의 거리를 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지 보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진심어린 사랑을 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30을 향해 가는 올해, 걸어온 발자국 따위가 보이지 않는다.
진심 없이 걸어온 길엔 겨우 찍었던 발자국도 바람에 지워진다.
진심이 아니라서 밟아온 길을 쉽게 잃어버린다.
진한 여운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진한 색깔, 진한 냄새, 진한 인상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무엇이든 진심일 때에만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 진심이 아닌 것엔 미련이 없길 바란다.
사람을 대할 때에도 오로지 진심으로만 대하고 싶다.
진심 없인 하루도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김없이 거짓과 진심이 뒤섞인 하루를 뒤돌아보며….
인터넷에서 어떤 분의 글을 퍼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과연 우리는 다윗처럼 진심어린 공감과 진심어린 충성 그리고 진심어린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험악한 세상 속에서 이렇게 살아가다가는 바보되는 거 아닐까요?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그렇게 사셨던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어리석을 정도로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가시나무처럼 까칠하던 사마리아 여인을 진심으로 대하셨습니다.
나사로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신 분이셨습니다.
인생을 찌꺼기같이 살아온 간음한 여인을 온 몸으로 막아주시고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진심을 닮아가길 원합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실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너에게 진심이었다.
너는 나에게 정말 진심이었냐?
너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진심이었냐?
주님 앞에 섰을 때 어떻게든 진심으로 살아가려 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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