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7장

새벽기도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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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람군대로 인해 포위된 사마리아의 성읍이 엄청난 어려움을격고있었습니다. 서로의 자식을 잡아먹고, 물가는 미친 듯이 치솟게 되었죠. 전혀 빛이 보이않는가운데 오늘 엘리사가 뭐라고 하냐면, 내일 이맘때, 물가가 회복될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그런데 이걸 듣던 왕의 참모는, 전혀 말도 안되는소리라고 하나님도 못하신다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야기, 특별히 대역전극의 무대는, 언제든지 베들레헴의 마굿간처럼. 외지고, 서러운 곳이기가 십상입니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부터, 변방에서부터 항상,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역전극의 무대는 나병환자 촌이였고, 역전의 주인공들은 나병환자들이였습니다.
아람의 침략으로 인한 처절한 배고픔은 그들도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성안에선 살수 없는 자들이였고, 강제로 격리수용중인 아주 변두리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기회가 왔어요. 놀랍게도 그 기회는 이들의 그 처절한 환경 때문에 기회가 온것입니다. 이게 매우 중요해요.
요즘이야. 돈이 있어야 한적한 곳에서 사는데. 고대사회에서는 한적한곳에서 산다는 것 진짜 무서운것입니다. 성안에 무조건 들어가야, 전쟁때도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있는것이죠. 성밖에 있으면 목숨을 잃는다거나, 재물을 빼앗기거나, 포로가 되는건데, 성안의 사람들은 성밖의 사람과는 확연이 다른 혜택들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일단은 안전하고, 경제활동, 아이들의 교육이나 문화 모든면에서 혜택을 받습니다. 그것에 비해 성밖의 사람들은 소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죠. 아람의 군대가 왔을 때 대부분을 도망갔거나, 도망가지 못하면 포로로 잡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나병환자촌. 이곳은 아람군대가 손대지않는, 손댈필요가 없는, 손대기 싫어하는 곳이죠. 그러니까 무슨말이냐면, 가장 외진곳, 더러운곳에 거주하는 이유 때문에 보호 받을수 있었습니다. 그에 따라서 나환자촌 사람들은 전쟁중에도 아람군대에 대해서 상대적인 자유를 누릴수 있는것입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상황이. 이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할 마음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사람이 힘이 있을때가 언제 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설때입니다. 왜죠? 십자가 앞에서면, 주장할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내가 잃을게 더 이상 없습니다. 내 자존심. 명예. 다 배설물입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을 때 우리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들은 나병환자 이기 때문에,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려고 하면 맞아죽을 가능성이 많고, 들어가도 굶어죽고, 이대로 있어도 굶어죽기 때문에. 아주 실낱같은 희망이 하나라도있다면,그것은 딱 하나입니다. 아람군대에 투항하는것이죠. 그런데 위대한 것은 그 유일한 하나의 길을 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 바로 나병환자촌 사람들이였던거죠. 가장 처절한 환경이 가장 위대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며, 가장 처절한 고통의 시간이. 우리의 가장 절망적인 순간이. 가장 놀라운 빛을 보게되는 시간이 되엇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나환자촌 사람들은 어두워진 시간을 기다렸다가. 아람군대로 이동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들이 왜 없는지, 나병환자들이 알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같은 독자를 위해서 설명을 붙였는데, 그게 6절상반절 입니다. 여러분 엘리사를 구해줬던 말과 병거가 다시한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늘의 말과 병거는 단지, 다가오는 소리만으로도 아람군대를 압도할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세요. 그 소리만으로도 압제하실수 있는거죠.
나병환자들은 일단 눈이 뒤집혔습니다. 며칠굶었는데, 마구먹고 마시고, 그러다가 배가 부르면 보이는게 있죠. 금과 은, 아마도 보급품 창고였던거 같습니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감추고, 가지고 감추고를 반복하다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들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게 9절입니다. 읽음.
여러분 지금 이 나병환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자기들을 격리시킨 사마리아 성 사람들. 자기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던사람들. 자기들을 사람취급하지 않던 사마리아 성 사람들. 전쟁이 났을때도, 자기들을 성문 안으로 피신하도록 절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을 사마리아성 사람들. 버림받은 약자가, 도리어 강자의 고통을 헤어리기로 한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이 들어오면 이렇게 됩니다.
여러분 이모습을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요. 자기들을 일생동안 멸시했던 가해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두운 밤길을 걷고있는 4명의 나환자들. 아름답지않습니까. 그런데 그모습뿐만아니라. 그들의 표현도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뭐라고 하죠?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이렇게 얘기했어요.
이들은 자신들의 한을 풀어줄 소식이라고 말하지않았어요. 자신들이 아람진영에서 발견하게 된 이 뜻밖의 은혜가. 소위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이 기쁜소식이, 너도 누려야 될 복음이야 라고. 복음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마음이 시급한지 낼 아침까지 기다리면 안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 한밤중인데, 보통 이런상황이 되면. 먼저 누리게 되면. 여유가 생깁니다. 지금 한밤중인데, 낼해도된다고. 그러나, 나병환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엄청난소식을 지금당장 알리지않으면, 우린 벌받기에 빨리가야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여러분 복음이. 내게 온 복음이 진짜라면. 내 가슴에 들어 복음이 진정한 복음이라면. 그 복음은 함께 사는 길을 갑니다. 공공성을 가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시급성. 복음을 소유한자의 특징이 바로 이런것이죠. 여러분 이것은 죽어가는 자들을 살릴수 있는 생명의 길이 내손에 너무나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살린 기쁜소식. 내게 희망을 주었던 기쁜소식. 나를 회복시켰던 기쁜소식. 내 인생을 바꿧던 그 기쁜소식이 내 안에들어와서 지금도 내안에서 역사하고 있는데, 아직 그 소식을 받지 못해서 여전히 어둠속에서 길을 더둠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어떻게 가만히 있을수 있겠습니가. 그런데 나병환자들이 받은 기쁨의 소식이, 성안에사람들에 전해지는 것은 상당히 더디게 표현됩니다. 나병환자들은 이 기쁜소식을 성읍 문지기한 사람에게 알렸고, 문지기는 다른 문지기들을 통해서, 또 다른 문지기를 통해서 왕의신하에게, 신하는 왕에게, . 너무 복잡합니다. 나병환자들에게는 복음이 곧바로 확인되는 거였지만, 권위가 가득한 왕실에서는 단계가 너무나 복잡하죠. 이말은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주어진 말씀이 바로 현실이 됩니다.
그러나, 내 편견, 내 생각. 내권위로 꽉차있는 사람에게는, 말씀이 내안으로 들어오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려요.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듣고 왕이 뭐라고 하냐면, 아니다. 가짜다. 유인술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럴수도 있겠지만, 설득력이 있지만, 우리의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옳으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것이냐. 하나님의 뜻에 맞는것이냐. 이게 훨씬더 중요한 것이죠.
신하들의 요구에 어쩔수 없이 왕은 정탐부대를 보내는데, 말몇마리 너무나, 초라합니다. 하지만 이 초라한 정탐군이 가져온 소식은, 사마리아 성 전체를 완전히 다시 살리는 부활의 능력이였습니다. 엘리사를 통해서 미리 예언하게 하셨던 그 소식.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의 군대를 동원해서 현실이 되게 하신 그 소식. 나병환자들을 통해서 전해진 그 보잘 것 없는 소식이.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뛰어나갈 때.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보게되는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현재 나의 현실이 얼마나 초라하냐가 아니예요. 내가 얼마나 위기속에 있느냐가 아니라~ 내 속에 그 소식이 있느냐입니다. 나는 그 소식을 믿느냐입니다. 믿느냐. 결국. 아람군대 진영에서 가저온 곡식들 덕분에 엄청나게 치솟앗던 물가는. 엘리사가 말한 그대로 정확하게 떨어지게 됩니다. 물가만 떨어지는게 아니라. 왕의 참모의 목도 떨어지게 되죠. 왕의 최측근으로 위세를 떨치던 최고위 공무원이. 비천한 서민들의 발에 밟혀 죽게됩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사람은 2절에 여호와께서 하늘의 창을 내신들, 어찌 그런일이, 물가가 내러가는 일이 있겠느냐 그랬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한 이유도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현실은 절대로, 누구 고칠수 없는 현실이고, 하나님도 못고치는 현실이다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말이 뭐죠? 하늘에 창을 내신들 되겠느냐. 라는 확신어린 고백이죠.
여러분 하나님을 믿지않으면 안믿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않는다는 것은 다른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왕이나 장관의 핵심적인 문제는 하나님을 제대로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분인지 몰랐다는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든, 얼마나 어떻게 신앙생활 했든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가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면, 아무리 어둠속이라고 하더라도, 사는것입니다.
여러분 왕은, 하나님이 이 비참한 현실보다 크신분인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죽은자도 살리실수 있는 하나님이신 것을 몰랐습니다. 모든 것이 끝장난것같은 현실도, 완전히 새롭게 일으키실수 있는 하나님이신 것을 몰랐습니다. 우리들의 문제도 비슷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제대로 모른채. 내 상황에 대해서 계속 말하는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신앙의 길을 가길 소망합니다. 현실보다 더 크신 현실보다 더 현실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를 살리신 복음으로, 또 누군가를 살리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자로. 현실에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으로, 즐거워 하는 우리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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