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회개의 언어

사무엘상 강해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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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새벽기도에 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죄를 짓고 싶은 상황에 어떻게 마음을 지켜야 할지 여기서 더 나아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성도에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본문에서 보신 것처럼 사울이 다윗을 포위하고 치려 할 때 블레셋 군대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울이 급히 돌아갑니다. 돌아갔다가 다시 다윗이 어디있는지 제보를 듣고 또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은 엔게디 광야에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찾기 위해 들염소 바위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사울은 용변을 해결하기 위해 굴에 들어가게 됩니다.
2절까지의 장면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마치 사사기의 이야기 두 가지가 본문에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2절에 나오는 들염소 바위의 들염소는 히브리어로 야엘입니다. 사사기 4장에서 가나안 장군 시스라가 야엘의 장막에 들어가서 자고 있을 때 야엘이 머리에 말뚝을 박아서 시스라를 암살합니다. 이때 야엘은 염소라는 뜻입니다. 사울은 들염소 바위라는 곳에서 다윗과 그 수하들이 잠복한 곳에 들어갑니다. 시스라가 염소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의 장막에 들어가는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시스라처럼 목숨의 위협 가운데 들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흥미로운 부분은 사울이 굴에 들어가는 이유가 용변을 보기 위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에글론 왕이 생각납니다. 사사 에훗이 에글론 왕을 암살하고 다락방에 숨겼는데 그 신하들은 에글론 왕이 다락방에서 용변을 본다고 생각하고 기다렸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용변을 본 것이 아니라 암살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사사기 사건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녹아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사울이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을 괴롭힌 악한 통치자와 같은 입장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사울의 목숨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다윗이 어떻게 행동을 할지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본문을 보시면 사울이 깊은 굴에 들어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용변을 본다고 무방비한 상태에 있고 깊은 굴에 있습니다. 실종이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다윗에게 너무나 좋은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저 무능한 왕, 정신병에 걸려서 아무 이유 없이 다윗을 핍박하는 왕이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서 무방비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 때 다윗의 수하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 합니다. 4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이니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셨는지 아니면 아비아달을 통해서 다윗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을수도 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이 사울을 제거할 수 있는 합당한 명분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사울을 죽이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울은 기름부음 받은 자이기 때문에 이 말씀에 적용해서 사울을 죽여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의 목숨을 앗아가고 괴롭히는 외부 세력에 대한 말씀이며 궁극적으로는 사탄의 세력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울을 암살하기 너무나 좋은 상황, 너무나 적절한 명분이 다 갖춰져 있습니다. 거기다가 다윗이 느끼고 있는 두려움과 고통 상황도, 명분도, 감정도 모든 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죽이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는 것처럼 다윗은 사울을 암살하지 않습니다.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 물러났습니다. 이후에 다윗이 왜 사울을 죽이지 않았는지 설명합니다. 6절에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사울은 기름부음을 받은 직분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일을 하시고자 하셨고 복음의 대적들을 치십니다. 사울이 그 일을 잘 해내든 못 해내든 사울은 기름부음받은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받은 사람이고 장차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구약의 직분자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잘 알았습니다. 모든 상황, 명분, 감정이 사울을 죽여야 한다고 하지만 다윗은 기름부음받은 자를 대적하면 안된다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름부음받은자는 히브리어로 메시아라고 합니다. 다윗은 그 자신도 구약의 임시적인 메시아지만 사울 또한 장차오실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메시아로 인정하고 사울을 해치지 않습니다.
사울을 죽여야 하는 이유가 많지만 다윗의 이런 믿음이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살렸습니다.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자를 해쳐선 안된다고 하는 다윗의 그 믿음이 다윗의 생존본능을 뛰어넘어 역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실제로 실천했습니다. 다윗은 악한 왕을 암살했던 사사시대의 사사들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적용) 우리도 때론 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여러 가지 이유를 만나게 됩니다. 명분을 갖추게 됩니다. 저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했는데 내가 충분히 갚아줄 수 있지 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다윗의 부하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대로 끌어들여서 나의 행동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사울이 굴에 들어온 상황처럼 아무도 보지 않기 때문에 나의 욕망을 실현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때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우리의 행동을 지키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할지 어떤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인지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기 전부터 원수를 사랑한 다윗이 그가 가진 믿음으로 행실을 바르게 지킨 것처럼 나의 주변 상황이 나의 욕망을 자극할 때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임의로 명분을 만들지 않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역을 하게 됩니다.
2- 성도에게는 회개시키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
(설명) 그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성도에겐 회개시키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용변을 다 해결하고 굴에서 나왔습니다. 이 때 다윗도 따라 나옵니다. 다윗이 엎드려 절을 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뒤를 쫓아서 왔는데 이 뜻은 사울이 등을 보여서 언제든지 사울을 습격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사울을 불러 절을 하는 과정에서 이런 장면을 모든 사람이 다 보았을 것입니다. 습격할 수 있지만 습격하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말합니다. “왕의 주변 사람들이 다윗이 사울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들으십니까? 오늘 여호와께서 왕을 제 손에 넘겼지만 저는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왕은 기름부음받은자이기 때문입니다. 내 손에 이것 보십시오. 여기 옷자락이 있습니다. 옷자락을 벨 때 내가 왕을 해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내 생명을 해하려 했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왕과 저 사이를 판단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다윗은 그냥 그 상황을 피하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고 사울을 살리려 한 자신의 행동을 근거로 사울을 설득했습니다. 16절에 보시면 이런 다윗의 설득에 사울은 소리 높여 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선을 베푼 것을 확인하고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 축복합니다.
다윗의 언어는 회개시키는 언어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죄라고 규정하고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믿음이 모든 욕망과 상황을 극복해서 죄를 짓지 않게 했습니다. 다윗은 그냥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지만 죄를 짓지 않은 것을 뛰어넘었습니다. 다윗은 그 자리에서 사울을 회개시켰습니다. 다윗의 언어는 회개의 언어였습니다. 단순히 질책하고 꾸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다윗이 베풀었던 사랑이 무엇인지 이야기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에 자신의 행동만 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런 아름답고 지혜로운 언어들이 사울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고 사울이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했습니다. 다윗은 세상의 왕처럼 칼과 권력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언어로 다른 이를 회개시키는 그런 사람입니다.
(적용) 우리는 억울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어떤 언어를 사용합니까? 어떤 이는 싸우고 굴복시키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논리로 찍어버리는 그런 언어를 씁니다. 어떤 이는 거짓말을 합니다. 어떤 이는 아예 대화하지 않는 소통부재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은 세상에 대해서 회개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다른 이를 회개시키는 것은 그저 말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다윗 같은 경우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인내했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여줍니다. 사랑의 행동이 선행 될 때 비로소 회개의 언어가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의 언어는 우리 또한 사용해야 하는 언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세상에 대해서 회개를 선포해야 합니다. 세상더러 돌이켜서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로 돌아오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더 이상 죄 짓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다윗이 사용했던 회개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그저 우리가 믿음으로 중심을 잡고 죄를 짓지 않았던 수준을 벗어나서 세상이 죄짓지 않고 세상이 회개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다윗처럼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에 수중에 들어온 기회를 내려놓았습니다. 우리도 그런 기회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 갑이 될 수 있는 기회,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힘들게 하는 이를 얼마나 생각하고 배려하는지 대화로 알려주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말로만 회개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에서 근거한 사랑의 언어가 회개의 언어가 되어 역사하도록 해야 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칠 때 우리는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시키는 언어를 사용할 때 삶의 현장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많은 이들이 회개하며 교회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언어는 권력의 언어 갑질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언어의 끝은 파괴와 상처만을 남깁니다. 거기에는 전혀 생명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회개의 언어를 사용할 때 거기에는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의 대로가 될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죄 짓고 싶은 상황, 명분, 감정에 둘러싸일 때 우리를 지키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에 뿌리 내릴 때 우리는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만 죄 짓지 않을 뿐 아니라 동시에 세상을 감동시키고 세상을 돌아오게 할 회개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 회개의 언어를 통해 우리가 피해를 입지만 우리가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믿는 우리가 얼마나 섬기고 배려하는지 보여줘야 합니다. 이 행동에 근거한 우리의 설득은 많은 이들을 회개시키는 회개의 언어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오늘 하루도 죄 짓지 않도록 믿음으로 스스로를 잘 지키고 죄 지으려는 이들을 돌아오도록 회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하루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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