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야 보인다

아브라함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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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이 선택한 남자 2. 일방적인 약속 3. 기다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4. 당신의 믿음 그리고 여정

Notes
Transcript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

오늘부터 또 긴 여정을 떠나보려고 해요.
우리가 가장 잘 알지만 또 잘 모르는 사람. 아브라함에 대해 함께 나누려고 해요.
오늘은 이름이 바뀌기 전이니까 아브람이라고 지칭할게요.
아브람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아브람을 통해 우리가 깨닫고 알아야 하는 부분들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살았어요. 그리고 그 중 95년을 아브람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어요. 아브라함의 이름의 뜻은 “열국. 만국의 아버지"인데요.
아브람의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요? 아브람의 이름의 뜻을 아는 사람 있으면 제가 쿠폰 하나 보내줄게요.
아브람이라는 뜻은 ‘아버지여 높임 받으실지어다'에요. 여기에서 말하는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하나님? 혹은 다른 신?
아브람의 이름 속에 숨겨진 ‘아버지'는 그 때 아브람의 가족이 믿고 섬기던 신을 지칭해요. 그 신은 달의 신이에요.
세상을 보면 다양한 창조 설화들이 있잖아요? 달의 신 역시 세상을 창조했다는 설화를 갖고 있는 신이에요.
아브람과 그 가족은 달의 신이라는 신을 ‘아버지'로 모시던 사람들이었어요.
달의 신을 아버지로 모시던 그 무수히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던 아브람을 찾아가셔서 하나님이 딱 선택 하셨어요.
여러분 혹시 살고 싶은 나라? 도시가 있나요?
어디든 가서 살 수 있는 자유와 평생을 써도 모자라지 않을 돈이 여러분에게 있다고 가정했을 때, 살고 싶은 나라 혹은 도시가 있다면 어디인가요?
이 당시 아브람이 살던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이었어요. 여기는 지금 이라크에요.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이라크를 이렇게 표현해요.
“이라크는 문명의 요람이다"
왜냐하면 고대인들이 처음으로 모여 도시를 만들고 공동체를 이룬 곳이 바로 이 곳 이라크.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 지방이기 때문이에요.
특히 아브람이 살았던 때는요.
고대 시대 중에서도 가장 많은 공예품과 비문들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는 시기에요.
그러니까 이 당시에 있었던 여러 기물들과 글들을 통해 문화, 종교, 신념, 일상 등에 대해 잘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아브람은 여러분이 살고 싶은 그 꿈의 도시. 나라처럼요. 모두가 꿈꾸고 그리는 곳.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사람이었어요. 또 꽤나 있는 집 자식이었어요.
지금의 표현으로 아브람을 이야기하자면 “인 to the 싸" 핵인싸에요. 진짜 뭐하나 부족함 없는 사람. 그게 바로 아브람이었어요.
그렇게 풍족하게 누리며 살아가던 핵인싸 아브람에게 한 신이 나타나요. 그런데 그 신은 자신이 믿고 아버지라 모시는 “달의 신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이라는 신이 나타나서 그에게 뜬금없이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고 이야기 해요. 그런데 이게 뭐 잠자다가 들은 뭐 헛소리도 아니고, 캠핑 가서 불멍하다가 생각한 내면의 소리도 아니에요.
정말로 분명하고 선명한 명령.
그 한 줄의 말씀이 그에게 별안간 뚝 떨어진거에요.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건가요?
그냥 거기 있어도 돼요.
누군지 잘 모르는 신의 명령 따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내가 믿는 신은 “달의 신"이니까요.
만약 여러분이 어떠한 단체를 만들거나 혹은 회사를 운영하는 CEO고 생각을 해봐요.
한 사람 한 사람을 설득해서 단체 멤버로 세우는 것이 편할까요.
아니면 내가 잘 알고 함께 일해왔던 한 집단을 데려와서 팀을 꾸리는 것이 편할까요?
맞아요. 좀 더 편한 것은 나를 잘 알고 서로의 성향과 일의 방향을 아는 팀을 데리고 와서 꾸리는 것이 훨씬 더 에너지 소비도 덜고 효율적인 방법이에요.
하나님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정말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예배하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셨다면,
한 사람을 주목하고 그를 택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충성도가 높아 보이는 어떠한 한 집단을 선택해서 그들을 통채로 불러내는 것이 훨씬 간단하고 쉬운 일이었어요.
한 집단이 신을 믿고 그를 경배하기 시작하면, 그들이 믿는 신이 더 빨리 전해질 것이고 그 집단은 곧 영향력을 갖게 될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세요.
굉장히 불합리적여 보이고, 효율적이지 못한 것 같은 선택을 하세요.
‘집단' ‘종족'. 구성원 전부를 부르지 않으셨어요.
아브람이라는 한 사람을 주목하셨고, 그를 찾아가셨어요.
아브람이 하나님을 알았을 수도 있고 몰랐을 수도 있어요.
어쩌면 하나님이라는 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알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중요한 것
“그가 신을 먼저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이 나를. 너를. 선택 하셨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 중요한 키 포인트는요.
아브람도 저도 여러분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일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만큼 우리가 특별히 그분에게 뭔가를 한 적이 없어요.
굉장히 쌩뚱맞은 시기에 아브람에게 말도 안되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그것도 내가 믿고 신뢰하며 가족이 사랑하는 “달의 신"이 아닌 여호와라는 신의 명령
여러분이면 떠날 수 있어요?
이 곳 갈대아 우르는요. 자신에게 익숙한 모든 것이 가득해요. 생활 터전이고 고향이고 친척들이 다 살고 있어요.
아브람의 아버지는 우상을 조각해서 만들어 팔던 사람이에요. 나름의 영향력도 있던 사람이에요.
비록 아브람에게 자녀는 없지만 여전히 핵인싸고 가진 것도 많은 사람이에요.
손에 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멍청해 보일만큼 가진 것이 많았던 사람이이에요.
심지어 아브람은 75세에요. 아내 사래는 60세 중반이에요. 그 때 75세는 지금과 다른게 젊은 사람의 축에 속했다 해도익숙한 터전을 냅따 버리고 떠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더군다나 지금 사는 곳은 오랜시간동안 알고 지낸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공동체가 존재하잖아요.
모든 것이 익숙한 곳이에요. 눈을 감으면 골목 골목이 다 생각이 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생각날 정도로 너무나 편한 곳이에요.
아브람이 가야 하는 길은요. 어떤 고민도 플랜도 짤 수 없는 상황이에요.
여러분 중에는 J도 있을 것이고 P도 있을거에요.
J 손 한번 들어볼래요?
여러분 여행 갈 때 어떻게 해요? 계획 짜죠? 저랑 아내는 시간표를 짜요. 그리고 이동시간도 계산해서 넣어놓고, 심지어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km도 적어요. 플랜이 여러개에요.
P 손 한번 들어볼래요?
여러분 여행 갈 때 어떻게 해요? J인 저에게는 생각할 수 없어요. 무계획으로 간다는 것은요.
그럼 아브람은 J였을까요. P였을까요? 아브람이 어떤 성향인지 몰라요. 그냥 재미로 이야기 해보는거에요. 만약에 아브람이 J였으면 진짜 답답했을거에요.
신이 나타나더니 떠나래요.
근데 거기가 어디인지도 몰라요.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요.
거기에 가서 내가 살 수 있는 집이 있을지 없을지. 그들이 어떤 언어를 쓰는지도 몰라요.
근데요. 저는 정말 안타깝게도 아브람이 J였을 것이라 생각해요.
이후에 나누겠지만 조카 룻과 땅을 나눌 때도 그는 확실한 플랜이 있었고, 가족을 구하러 사병들을 데리고 쫓아갈 때에도 미리 병력을 준비했었어요.
J의 성향이 좀 더 강했을 아브람에게 무계획으로 길을 떠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을거에요.
그런데 그가 떠나요. 그가 떠날 때 사람들이 “잘 결정했어. 축복해. 잘 살아"라고 했을까요?
“에? 너 어디 가? 짐을 왜 싸? 이건 왜 팔아?”
“왓? 여기를 떠난다고? 여기 갈대아 우르야. 그래도 떠날거야?”
“도대체 왜? 뭐하려고? 어디로 갈 건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간다고? 너.. 미친거지?”
별의 별 이야기를 다 들었을거에요. 그런데도 아브람은 떠나기로 해요.
말도 안되는 상황과 모두가 만류하는 그 순간에 아브람이 떠나요.
그가 믿음이 있어서 떠났을까요?
아니에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 당시 아브람은 하나님의 관점과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성경적 가치관. 하나님의 시선을 가졌던 사람이 아니에요.
아브람이 바보가 아니잖아요. 핵인싸에 어느 정도 지위가 있던 사람이에요.
그런 그가 길을 떠나기로 결정했다는 것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에요.
“그의 마음을 움직인 그 결정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신을 만났어요.
아버지가 평생 우상을 만들어 팔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많은 신들 중 하나도 만난적이 없었어요.
거기에다가 자신의 가족이 온 사랑과 정성을 다해 믿어왔던 “달의 신"도 자신을 만나 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여호와라는 신이 딱 나타났어요.
신이라는 존재의 임재를 경험한거에요. 인격적으로 만난거에요.
여러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어땠어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생각과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지 않았어요?
진짜 살아계신 분이라는 것을 온 맘으로 세포로 느끼지 않았어요?
아브람은 여호와를 인격적으로 만난거에요.
그리고 그 고난을 감내할 만한 복 세가지를 들었어요. 신을 직접 만난 것도 충격인데, 그 신이 자신에게 세가지를 약속 한거에요.
아브람이 익숙한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떠난 이유에요.

무조건적인 언약과 선포

갑자기 나타난 신이 그에게 무조건적인 약속을 해요.
아브람이 “제가 떠나면 뭐해주실래요?”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주도적으로 세가지를 약속하시더니 일방적으로, 온통 손해를 보는 것과 같은 약속을 덜컥 맺으셨어요.
무조건 적이에요. “아마도 될거야"가 아니라 “될 것이다"라는 확실한 세 가지 선포.
민족을 이룰 것이다.
너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너는 복이 될 것이다.
아브람이 떠날 이유가 확실해졌어요. 이건 자신을 향한 신의 선포에요.
더군다나 적령기를 한참 지난 불임 부부 가정이잖아요. 아기를 포기하고 살던 사람들이에요. 진짜이건 가짜이건 그들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거에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
물론 아기를 갖기 위해, 자녀를 위해 길을 떠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그의 마음이 벅차오르는거에요.
인격적으로 만난 신이 자신을 위해 3가지를 약속했는데, 그냥 약속이 아니라 확실한 선포잖아요.
물론 아이를 25년 뒤에 낳을 것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으셨지만요. 그 기한을 알고 기다렸다면 참을만 했을텐데, 기약도 없이 25년을 기다리게 되었죠.

기다림을 좋아하는 이는 없다

아브람은 아들을 낳으려면 25년을 기다려야 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100년동안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몰랐어요.
그 누구도 기다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여러분 기다리는 것 좋아하세요?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는데 그 사람이 30분이 지나도 한시간이 지나도 안와요.
그럼 어때요?
욕 나오죠. 또 저만 나쁜 놈인가요?
여러분 기도하는 제목 다 이루어졌나요?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것 있죠?
저도 그래요.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하지만 길지 않은 제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들을 다 이루어 주셨더라구요.
시간이 걸릴 뿐. 내가 기다려야 할 뿐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그 기도들을 다 응답해 주셨더라구요.
사랑하는 여러분. 기다림이라는 것은요.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최고의 작업을 하는 시간이에요. 내 삶에 하나님이라는 실존하는 그 신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순간이에요.
그 분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실제적인 삶의 변화내 삶에 딱! 빡!하고 일어나는 순간이에요.
여러분 축구랑 야구 좋아하죠.
손흥민이 지금 계속 무득점이긴 한데, 여러분 손흥민이 골 넣으면 미친 듯이 좋아하잖아요. 그게 왜 좋아요? 손흥민이 골 넣으면 여러분 통장에 돈이 꽂혀요?
여기 아스날 팬들 있죠. 아스날이 이기면 왜 좋아요? 그게 여러분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나요?
여기 SSG팬 많죠. 왜 쓱이 이기면 좋아해요? 쓱 이기면 여러분에게 치킨 쿠폰 보내주나요?
저는 한화팬이에요. 한화는 상대를 너무 배려하는 팀이라 지는 것을 더 좋아하는 팀이에요.
저는 한화가 지는게 더 좋아요. 이기면 기분이 아주 이상하다구요. 왜 우리 마음 몰라주고 져주는 건지 상대팀에게 화가 난다구요.
나와는 상관없는 선수 혹은 팀이 골을 넣고 이길 때도 우리는 굉장히 좋아해요.
골을 넣어도 내 삶은 바뀌는 것도 없어요. 그 팀이 이겨도 나에게 떨어지는 것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기뻐해요.
왜?
한 골과 게임의 승리가 지금 나의 이 답답한 현실을 잊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에요.
내 삶은 바뀌지 않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잊고 기쁨을 오롯이 누리게 해주는 시간이기 때문이에요.
골을 넣지 못하고 내가 응원하는 팀이 지면 승질나고 머리를 쥐어뜯지만 그래도 괜찮잖아요. 다음 경기에 잘하면 된다고 내 팀과 선수를 응원하면 되니까요.
이기던 지던 그 다음 경기를 우리는 기다리죠.
그것이 내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지 못해도 우리는 기다려요.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 앞에 우리가 기다리는 시간은요. 이것과 차원이 달라요.
우리의 삶이 변화되거든요. 삶의 환경은 그대로여도,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생각과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거든요.
그 기다림을 견딜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기다림의 끝에 얻을 그 기쁨의 순간을 오롯이 느낄 수 있도록 저와 여러분의 영혼에 최고의 작업을 하고 계셔요.
저는 보여요. 지금 여러분의 영혼에 작업을 하고 계시는 그 손길이.
(농담이에요. 저 이단 아니에요. 진지 해지지 마세요)
이 기다림의 시간은요. 정말 힘들어요. 지루해요. 견디는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왜 그러냐면, 기다림의 이유와 목적이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말하지만 사실 그 뒤에 숨어 있는 나의 이기적인 마음이 있기 때문이에요.
이기적이라는 이 말은 내가 나쁘다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와 조금 다르다는 뜻이에요.
내가 틀리고 나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한끗 다른거에요. 그 한끗을 돌리기만 하면 기다림은 땡! 하고 끝이 나는거죠.
그런데 솔직히 우리는 뭐가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이게 내 이기적인 마음인지 아닌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직접 작업을 하시는거에요. 돌이킬 수 있도록 그리고 그 한끗을 돌려 맞추는 작업을 끊임없이 하시는거죠.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는 복의 근원. 출발점이 될거야"라고 하셨어요.
아무리 그가 갈대아 우르의 핵인싸였다 해도, 솔직히 모든 사람이 알만한 이름과 복의 출발점이 되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요. 진짜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분의 선포가 정말 한참 그것도 오랜 시간이 지나 이루어졌어요.
한 사람. 아브람의 신앙 위에 한 민족이 세워지기 시작했어요.
그가 가진 신앙.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공동체를 이루고 집단을 이루고 나라를 이루었어요.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언젠가 여러분과 함께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가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는데요.
이스라엘은 광할한 아라비아 사막과 드넓은 지중해를 잇는 딱 그 지점에 있어요.
당시 강대국이었던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과 같은 고대 나라의 위대한 제국을 여행 하려 반드시 지나야 하는 그 곳에 있어요.
고대 세계의 중심지에 있던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땅도 작아요. 힘이 있는게 이상한 나라에요. 그런데 그 곳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니까 계속 번성하고 커져가요. 하는 싸움마다 다 이겨요.
그래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주위 나라들이 그 작은 나라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거에요.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아브람 진짜 쩌는 사람이죠.
신을 만난 적 없는 그 때에 진짜 신을 만났고, 그가 한 무조건적인 약속을 듣고 길을 떠난 사람. 우리와는 출발점이 완전히 다른 믿음의 사람처럼 보일거에요.
미안하지만 아브람도 처음부터 완벽한 믿음을 가진, 믿음의 대가가 절대 아니였어요.
하나님이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이 말은 단순하게 사는 곳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해라! 라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그가 떠나야 할 장소와 공동체를 분명히 말씀해주셨어요.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쉽게 말해서 손절하라는 거에요. 손절하는 것처럼 미련 갖지 말고 다시는 돌아보지 말고 쳐내고 나가라. 라고 하시는거에요.
아브람이 그렇게 했을까요?
NOPE. 아니에요.
그는 떠날 때 조카 롯 그리고 아버지 데라를 데리고 갔고, 살림살이와 소유물을 다 챙겨서 갔어요.
하나님이 그에게 원하셨던 것은 모든 것을 다 놓고 그대로 일어나 하나님만 믿고 떠나는 것 이었어요.
아브람의 첫 시작은 완벽하지 못한 순종이었어요.
가나안으로 대략적 방향만 맞추고 이동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하란 그 이상으로 가지 않았어요. 11장에 보면 아버지 데라가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조카 롯과 아브람과 동생을 데리고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어요.
하나님은 아브람의 가족이 아브람이 길을 떠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는데 있어 걸림돌이 되는 것을 아셨어요. 그래서 그들을 다 떠나라고 하신 것이죠.
고대 비문을 보면 하란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이었어요.
다메섹, 니느웨, 갈그미스에서 오는 주요 무역로였어요. 모든 문물과 사람들이 이 도시에 만나는 것이죠. 물질적 풍요와 부를 축적할 기회가 있는 곳이자, 달의 신을 예배하는 장소였어요.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나서 생각과 삶의 태도의 변화가 있었지만 다른 가족들은 아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브람이 더 나아가는데 있어, 그곳을 떠나는데 있어 방해가 되고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라고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말씀을 하신 것이죠. 만약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 더 있으려 한다면 작별하고 떠나야 했어요.

당신의 믿음 그리고 여정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세였더라"
아브람의 믿음이 점점 더 성숙해지고 커지기 시작한 시점이에요. 결과를 알고 있는 아브람의 모든 여정의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는 순간이에요.
하나님은 그가 완전히 순종하지 않고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약속을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실수해도 품고 안아주셨어요.
그분은 우리에게 완벽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세요.
그 믿음이 작더라도, 우리가 반응하는 그 모습이 작고 미약하다 해도,
눈썹을 움직이는 것 처럼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이더라도 괜찮다는 거에요.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다 받아드리고 수용해주시겠다는 거에요.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주신다는 거죠.
우리는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하나님은 기다리시는거에요.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할 그 때까지 우리를 기다려 주시겠다는거에요.
여러분 중에 필라테스 하는 친구들 있죠. 필라테스 하면 내근육. 속근육이 강해진다는데 맞아요?
우리의 기다림의 시간은 바로 필라테스처럼 우리의 속근육. 보이지 않지만 뼈대와 기본이 되는 속믿음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거에요.
여러분 중 미안하지만 윗몸 일으키기 못하는 사람있을거에요. 코어가 약해서 그래요. 그 코어는 강하게 단련할 수 있어요. 코어가 강해질 수록 윗몸 일으키기 뿐만 아니라 버틸 수 있는 힘도 강해져요.
하나님은 우리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믿음의 코어가 강해질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우리의 그것이 궤도에 올랐을 때 응답과 복을 주시는거에요. 그래야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누릴 수 있으니까요.
내가 하는 배려가 상대방에겐 배려가 아닐 수 있어요. 배려의 기준도 다르지만, 그 배려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그 것을 온전히 받아 누릴 수 있을 때까지 미루시며 기다리고 계셔요.
아브람은 그것을 깨닫고 나의 것으로 받아드리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어요.
드디어 “일어나 하란을 떠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으로 출발"했거든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떤가요? 여러분의 여정은 어떤가요?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는 그 신앙의 여정은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져가고 있나요?
신앙의 여정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우리도 아브람처럼 그 기쁨과 복을 알 수 있을까요.
첫째, 신중하게 혹은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해보는거에요.
나태함은 우리의 삶을 낭비시켜요. 나태함은 움직이지 않는거에요. 내 안에 생겨나는 열정을 꺼버리는 역할을 하는거에요.
하나님을 더 알고 싶고 믿고 싶고 기도하고 싶고 찬양하고 싶어지는 그 불을 확 꺼버리는 것이 바로 나태함이에요.
그 나태함이 여러분에게 있었다면,
열정을 계속 품도록 만드는 원동력으로부터 멀어지는 그 것이 여러분에게 있었다면
그 나태함을 지워버려야 해요.
나태함을 지우는 방법 여러분 알고 있어요. 이렇게 하나님께 고백하는거에요.
“당신의 뜻으로 저를 인도해주세요"
기도하면 좋죠. 그런데 기도가 안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는거에요.
“당신의 뜻으로 저를 인도해주세요"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겠지만 이 문장 꽤나 아니 굉장히 강력한 문장이에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해달라고 신중하게. 제대로. 진지하게. 열정적으로 기도한 적이 없기 때문"이에요.
간 순간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세요" “그렇게 살게요"라고 기도는 했겠지만, 정말 그렇게 살기 위해 매일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우리에겐 진지하게 이 문장을 고백하고 곱씹어야 해요.
“당신의 뜻으로 저를 인도해주세요"
이렇게 해도 “하나님 뜻대로 우린 못 살아요” 하지만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그 순간에 이 고백이 먼저 생각나게 될거에요.
둘째, 낯선 도전을 주셨을 때 반응하는거에요.
하나님을 신뢰하는데 쉬운 선택. 쉬운 길. 크고 넓은 길은 없어요.
양육 훈련의 종류가 굉장히 다양하죠.
제 동기들이 “본인들 교회 3년치 커리큘럼을 한학기에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하더라구요.
저도 양육훈련 하나만 하고 싶어요. 짧고 굵게.
그런데 룻기, 빌립보서, 순장-리더십 교육, 북쉐어링, 교리 등등 여러가지를 하는 이유는요.
사역자가 바쁘고 괴로워야 하기 때문이에요.
사역자들이 안락함과 편안함을 선택하면 공동체는 무너져요.
나를 괴롭혀야, 저를 힘들게 해야 하나님을 찾고 매달려야 공동체가 살아나더라구요.
저에게도 많은 양육훈련은 낯선 도전이에요. 쉽지 않은 정말 어려운 도전이에요.
여러분 그거 알아요? 지난 15일 (목)까지가 훈련 신청 마감이었다는거?
근데 거의 신청 안했더라구요. 지난 주일 예배가 없어 건너띄어서 그렇다고 믿고 싶은데요.
신청 인원이 거의 없어서, 두과목 빼고 다 폐강해야 할 것 같더라구요.
솔직히 전 핵이득이죠. 안하면 오히려 좋죠.
그런데 한주 더 연기해서 신청을 받기로 했어요.
저도 쉬면 좋아요. 하지만 해야 해요.
왜냐하면 저도 하나님이 주시는 낯선 도전에 반응 해야 하거든요. 순종하고 반응하려면 내 욕망을 희생해야 해요. 나의 것을 뒤로 하고 일어나 떠나야 은혜를 누릴 수 있어요.
아브람은 단기적으로 손해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해서 정든 곳을 떠났어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분이 주신 사랑에 보답하고자 한다면 반응해야 해요.
양육훈련 들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안하면 전 오히려 좋아요.
양육훈련이 아니어도 여러분의 삶으로 반응하며 부딪치며, 일어나 떠나 앞으로 걸어가야 해요.
셋째, 순종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없는가 돌아보세요.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 너무 많은 사람과 의견을 나누거나, 끝도 없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면 그것은 순종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는 증거에요.
순종을 복잡하게 만들고 반응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해야 하는 것은 아는데,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내가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있는 그 이유를 넘어서는, 하지 않아도 되는 강력한 이유를 찾기 때문이에요.
고난을 당하거나 기다리고 싶지 않아서, 희생할 필요가 없는 순종의 방법을 바라기 때문이에요.
위험을 내켜하지 않고, 결정을 미루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돌이키실 것이라 미련하게 믿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순종을 복잡하게 이리저리 꼬아가면서 하지 않고 미루고 있는거에요.
여러분 순종은 원래 어려운거에요.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방법 없어요. 괜히 지름길 찾지 마세요. 그 순종 어떻게든 편하게 해보려고, 머리 굴리지 마세요.
그러다 머리 터져요.
마지막, 여러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 것에 집중하세요.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여러분 마음을 굉장히 불편하게 만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불순종의 모습들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을거에요.
순종하기 싫어서 계속 외면해왔던 것들이 있는 사람들 있을거에요.
(쉬고)
불순종과 외면의 순간. 그게 바로 여러분의 영혼을 최고의 작업으로 만들어가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이에요.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기도에요.
그 손길이 느껴지니까, 좀 더 편한 길로 가고 싶으니까 불순종하고 외면하고 돌아서는거에요.
하나님의 손길에 집중하고 받아드리세요. 그리고 붙잡고 일어나 떠나세요. 그것을 위해 한걸음 내딛으세요.
제대로 순종하지 못해도 괜찮아요. 걷다가 ‘이게 아닌데, 제대로 가는거 맞나?’라고 생각해도 괜찮아요. 그거 죄 아니에요.
그런 생각하는 것 당연한거에요. 왜냐하면 제대로 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마귀가 계속해서 여러분에게 불안과 불신을 심으면서 걷지 못하게 하는거에요.
하나님은 완벽한 순종을 바라지 않으세요. 순종하는 그 작은 몸부림.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을 주목하세요. 그리고 반응을 기다리며 사랑과 약속을 파기하지 않고 붙들고 계셔요.
그리고 여러분이 반응하면 그 순간 낚아 올리실거에요. 그리고 당당하게 파워워킹 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주실거에요.
아브람이 일어나 떠났어요.
떠나고 나서야 보게 되었어요.
떠나기 전엔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계획을 보고 확신하게 되었어요.
우리도 일어나 떠나야 해요.
그래야 여러분을 위해 준비한 말도 안되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될거에요.
이 것 네 가지를 꼭 기억하며 살아가는 한주 되길 바래요.
신중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진지하게 “하나님 당신의 뜻으로 저를 인도해주세요" 고백하세요.
낯선 도전 앞에 반응하세요. 내가 손해보면 어때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라면 손해보는거에요.
순종을 복잡하게 만드는 행위를 멈추세요. 답을 알면서 스스로 베베 꼬지 마세요. 다른 사람에게 그만 묻고 머리 굴리지 마세요.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 것에 집중하세요. 순종하고자 하는 작은 몸부림이면 충분해요.
이 네가지를 꼭 기억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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