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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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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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0UNLIKELY
Fear
0UNLIKELY
Joy
0UNLIKELY
Sadness
0UNLIKELY
Language Tone
Analytical
0UNLIKELY
Confident
0UNLIKELY
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0.3UNLIKELY
Conscientiousness
0.27UNLIKELY
Extraversion
0.54LIKELY
Agreeableness
0.6LIKELY
Emotional Range
0.29UN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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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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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490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뵈었으니
본문 왕하 6:31-7:2
아버지 하나님, 이 땅을 살아가면서 참 힘겨운 순간들이 있고, 버티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지만,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확신하게 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우리를 능력의 장중에 붙들어 주시어 저 천국문에 이르기까지 인도하실 것을 믿고 또한 감사합니다.
삶에 여러 어려운 순간들이 찾아올지라도, 믿음으로 그 날을 바라보게 하시고, 모든 약속하신 말씀들을 능히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의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우리에게 “전능자의 그늘" 이라는 책으로 알려진 짐 엘리엇 이라는 선교사가 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예수님을 위해 살기로 결단하고 당시 복음의 불모지였던 남미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당시 엘리트 대학이었던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제 출세의 길만 남아있던 상황에서, 어느날 에콰도르의 야만 원시족인 아우카 부족이 너무나 흉악하여 아무도 그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고, 오히려 그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아우카 부족에게 바로 가서 선교를 하기 전에 먼저 그는 키치와 인디언 부족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맡았다.
그곳에서 그는 인디언들을 위한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고 여러가지 선교에 필수적인 시설을 세워가고 있었다.
이를 위해 1년 이상 공을 들였고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이 모든 계획들이 완성될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전무후무한 홍수가 났고, 모든 시설들은 하루 아침에 떠내려가 버린 것이다.
이후에 엘리엇은 그의 약혼녀였던 엘리자베스에게 이와 같이 편지를 썼다.
“나는 그날 아침에 나의 모든 수고와 땀과 기도가 들어있던 선교센터를 휩쓸어간 홍수 속에서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었소.
나는 아직도 너의 하나님이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너는 나를 신뢰할 수 있겠느냐 라는 것이었소.
그 순간 나는 한번 더 확신할 수 있었소.
내 모든 수고는 물거품이 되어 끝났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시고 그분의 계획하신 일들을 이루실 것에 대해 말이오.”
분명 짐 엘리엇 선교사는 충분히 낙심할만한 상황이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나의 생각과 나의 이성과 나의 판단과 나의 계획은 모두 끝나버렸다고 말한다.
주변 사람들도 그간의 모든 노력이 다 끝나버렸다고 말한다.
허탈함과 상실감 속에서 어디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모르겠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일을 멈추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대로 모든 일들을 이루어가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믿음이다.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신뢰하며, 약속하시고 말씀하신 바대로 이루실 하나님을 굳게 붙드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믿음을 잃어버렸던,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기는 보았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했던 한 비참한 인생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본문의 배경은 이러하다.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성을 포위했다.
이제 사마리아에 기근이 임박했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루어진 일인데도, 여전히 북이스라엘 왕이던 여호람은 회개하지 않고 이 모든 일들의 책임을 엘리사에게 돌리고 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31절에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라고 선언한다.
한글 번역에는 “벌" 이라고 되어 있지만 원어의 의미는 “저주"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오늘 당장 선지자의 목을 치지 않는다면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표현인 셈이다.
우리 나라 표현에도 “내가 오늘 뭘 안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라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은 손톱에 불을 달아 장을 지질 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인데, 그런 모진 일을 담보로 하더라도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여호람의 맹세는 이보다 훨씬 강력한 맹세의 표현이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걸 정도로의 비장함까지도 엿보인다.
그는 선지자를 잡아 죽이려고 군대를 파견한다.
지금 상황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
아람 왕에 의해 북이스라엘 수도 사마리아가 포위를 당한 상황이다.
정상적인 왕이라면 자신의 군사들을 데리고 뭘해야 하는가?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아람 군대를 격파해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포위망을 뚫고 돌파하려는 시도라도 해봐야 한다.
정상적인 신앙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선지자를 죽이려 할 것이 아니라 선지자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지를 물어야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징계를 돌이켜 달라고 엎드러져야 했다.
그러나 여호람 왕은 자신이 소유한 군사를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는데 악용하고 있다.
사마리아는 포위당했고, 여호람의 군대는 엘리사를 죽이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엘리사가 자기 집에서 장로들과 함께 앉아있던 그 때에 왕이 보낸 군사들이 그의 집 가까이 도착한다.
왕은 31절을 통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엘리사를 죽이겠노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바로 군사를 보냈다.
하지만 왕은 자신의 결정을 곧장 후회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군사들이 엘리사를 정말 죽였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심정으로 군대를 추격했던 것 같다.
순서상으로 군대가 엘리사의 집으로 출격하고, 그 뒤를 왕이 추격한다.
먼저 출동했던 군대들이 엘리사의 집 근처에 도달했을 때 엘리사는 뭐라고 말하는가?
32절 중반부에 “너희는 이 살인한 자의 아들이 내 머리를 베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 너희는 보다가 사자가 오거든 문을 닫고 문안에 들이지 말라 그의 주인의 발소리가 그의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 군대의 주인의 발소리가 군대 뒤에서 난다는 것은 왕이 군대를 추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이 끝마치기도 전에 왕의 군대와 왕이 함께 엘리사의 집에 도착하게 된다.
33절의 왕의 말을 보라.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이 말의 의미는, 사마리아가 포위되어 먹을 것이 떨어진 이 사태, 이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재앙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지 않는다면 이 사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큰 원망의 마음으로 엘리사를 죽이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급히 군대를 추격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고, 엘리사를 만나자마자 모든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임을 고백하며, 엘리사에게 속히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여 이 재앙을 거두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왕은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호소하고 있다.
이 재앙을 하나님께서 내리셨고, 하나님만이 거두실 수 있으니 이제라도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것이다.
이에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전하시는 회복의 말씀을 예언한다.
함께 읽은 본문 왕하 7:1 말씀에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나라도 한 때 전쟁의 위기가 고조될 때 생필품을 사재기하면서 그 가격이 폭등하는 일들이 있었다.
물이나 휴지, 라면과 같은 것들은 일찌감찌 동이났고, 전쟁이 나면 반드시 필요하다는 방독면 조차 구하기 어려웠었다.
또 코로나 초창기를 생각해보라.
KF94마스크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막아준다고 하자 동이 났다.
유통업체들은 이 마스크를 창고에 대량보관했다가 값을 엄청나게 부풀려서 판매하기도 했고, 정부는 마스크 유통을 안정화 시키기 위해 이런 저런 방법을 고안하기도 했다.
지금 사마리아성은 포위되어 먹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쌀 한포대의 가격은 얼마나 치솟았겠는가?
말도 안되는 금액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선지자는 뭐라고 말하는가?
내일이 되면 이 모든 곡식값이 예전처럼 안정화 되리라는 것이다.
이는 내일이면 아람의 포위가 해제되고 다시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 때 한 사람이 등장한다.
2절을 보니 그 사람에 대해서 왕이 의지하던 한 장관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선지자의 회복의 예언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그는 선지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장관은 어떤 사람인가?
군대의 지휘관이다.
나름대로 전쟁이나 전투의 경험도 많았을 것이고 전쟁의 흐름을 읽거나 파악하는데도 유능한 자였을 것이다.
지금 그가 사태를 파악해보니 아람의 포위는 그렇게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지금 당장 아람이 물러간다 한들 포위했던 진을 거두는 데도 시간이 상당히 소요될 것이고, 또한 철수한다고 하더라도 굶주린 사마리아 백성들을 충분히 먹일만한 곡식을 어디서 구할 것이며, 그 곡식이 차고 넘쳐서 내일 이 맘 때까지 물가가 안정화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것 같다.
어찌 보면 장군의 반응은 이성적인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지금 엘리사가 한 말은 엘리사 개인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장군의 말은 엘리사 선지자에 대한 불신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을 가리킨다.
이러한 불신앙적 태도는 인간이 지닌 지식과 능력의 한계 속에 하나님을 가두려는 어리석은 처사이다.
이러한 자들의 결국은 어떠한가?
2절 후반부를 보면,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엘리사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던 장관은 17절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으로 회복된 사마리아 성의 풍요를 눈으로 목격했지만, 그 회복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말씀대로 백성들에게 밟혀 비참하게 죽고만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많은 약속들을 주셨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약속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 약속들은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다.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 중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것은 바로 천국에 대한 약속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이 위대한 축복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그 무엇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아름답고 찬란한 천국에서, 수많은 천군천사들과 함께, 그리고 앞서갔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영광 중에 영접되어 우리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게 될 것이다.
비록 현실은 그 아름다운 천국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지옥처럼 느껴지는 경우들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갈등이 그치질 않고, 궁핍함과 빈곤이 떠나질 않으며, 답답하고 억울한 상황 속에서 눈물짓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히 변치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그리고 모든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지금도 내 상황을 둘러보면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다.
오히려 내가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해왔던 일들이 그만한 결실을 맺지 못하고, 답답하고, 물거품이 된 것 같고, 억울하고, 궁핍한 일들의 연속인 것 같다.
현실은 그러하지만 우리가 아예 주저않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히11:1-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말씀한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당장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마치 생생하게 바라보듯 살아갔던 것처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을 마치 이루어진 일인양 살아갔던 것처럼, 아직 우리에게 그 날이 임하지 않았지만 말씀하신 그 영광의 날이 마치 우리에게 임하여 오늘 그 날을 누리듯 살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 말씀하신다.
그렇기에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확신에 차서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할렐루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그 약속하신 바들을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살아가자.
우리에게 최종적인 승리와 영광의 면류관을 약속하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가? 그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시겠다 말씀하시지 않는가? 그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동행하시겠다 말씀하시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그분의 말씀하신대로 이루실 것이다.
그 날이 더디오는 것 같아도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으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성실히 이행하실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고 붙듦으로 오늘을 살아내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의 생각과 판단으로 하나님을 불신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게 하시고, 말씀하시고 약속하신바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하여 주옵소서.
힘겨운 오늘을 살아가지만 이것이 우리의 끝이 아님을 기억하게 하시고, 이 길의 끝에서 영광의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오늘을 버티고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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