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넌 행운아야! (마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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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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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
신앙고백: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기도 찬양 :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본문 : 마 5:1-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23절에 보면,
천국복음을 전파하는데,
바리새인과 서기관,
헤롯 왕과 정치인,
이런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다, 보니까
병 걸리고,
귀신 들리고,
고통 당하고,
간질병에 걸리고,
중풍병에, 마비환자 들,
4장, 2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오늘 말씀은, 행운아,
복받은 사람에 대한 말씀인데,
24절을 읽었는데,
전혀 아니에요.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거,
이거 축복 아닙니다.
병이 없는 것이 축복이죠.
귀신 들린 거 축복 아닙니다.
말짱한 사람이 축복 받은 사람이죠.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 다 복 받은 사람들 아닙니다.
1-2절을 보니까,
“예수께서 이런 무리들을 보시고, 지금 산에 올라가서, 앉으사, 입을 열어 가르치기 시작했다.”라고 되어 있는 거에요.
1-2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출애굽기의 모세가,
엄청나게 높이 솟은, 파도 사이를 건너서,
시내산에 도착합니다.
그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열 가지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모세의 권세를 뛰어넘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산에서 받아, 그 받은 권위로 백성들을 가르쳤던 것과 같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세를 그대로가지고,
직접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는 하나님 그 자체이신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그 입으로 전하시며, 새 백성을 창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앞에 앉은 무리들은,
중풍병자, 간질하는 자, 귀신들린자, 각종 병에 걸려 고통 당하는 자 이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불행하거나, 운이 안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복이 있도다!
복이 있는 사람들이로다!
복 받은 행운아 라는 것이죠.
*여러분, 세상은 처음부터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사람이 복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좋은 가정 분위기에,
학력을 가진 부모 밑에 자란 사람이 복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닙니다.
돈이 없고,
가진 것이 없고,
질병에 걸렸고,
심지어 귀신에 들린 자 일지라도,
그 고통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앞에 나아와서,
그의 말씀을 듣는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복 있는 사람이다.
복 받은 사람이다.
*여러분,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소유 중심,
물질 중심이 아니라,
말씀 중심으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행운아입니다.
말씀 앞에 선 우리는 행복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우리는 진정 복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마음이 교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늘, 다른 사람을 비판하며, 자기 자신을 높입니다.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보면, 자존감이 높지 않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이 항상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은 주장적이지도 않고,
남에게 싫은 소리도 잘 하지 못하고,
이런 사람인데,
이런 사람은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사람인데,
성경은, 아니랍니다.
이런 사람이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항상 대출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재산은 늘 부족하기 때문에, 항상 은행으로부터 대출이 필요한 것인데,
기도하는 사람은,
늘, 깨어서, 하나님이라는 가장 부요한 은행에 가서,
영적으로 늘 공급 받는 사람인 것이죠.
이런 사람이 행운아입니다.
기도 하십니까?
기도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죠.
*애통하는 자는, 이 세상의 악함 때문에 고통 당하는 자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마음에 고통을 당하며, 슬픔과 괴로움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현재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고, 대단한, 발전된 세상에 살고 있다고 살지라도,
언제나, 그 마음 속에는, 더 좋은 세상에 대한 갈급함이 가득한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현재에 만족합니다.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고, 건강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언제나 마음 속에 거룩한 불만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언제나 채워지지 않은 불만족이 있고,
하나님으로 만족하고자 하는 거룩한 갈망이 있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누구냐?
창세기, 26장에 보면,
자기가 직접 판 우물물인데도, 그대로 고스란히 빼앗기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게 누구냐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입니다.
창세기, 26장 16-17절을 보니까,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이삭이 너무 잘 되고 부유해지는 것이 싫으니까,
너, 땅 두고 떠나라,
우리를 떠나 멀리 가라.
이건 일방적인 공격이죠.
자기가 안 되니까, 이삭이 잘 되니까 공격하는 것인데,
이삭은 거기에 대하 굉장히 온유하게 반응합니다.
16, 17절입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그러니까, 이삭이 한 마디도 안 하고 바로 떠납니다.
17절입니다.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빼앗겼으면, 투쟁하고 싸워야 하는데,
싸우지를 않아요.
나중에 우물 물도 빼앗기는데,
빼앗긴 우물 때문에 다툼이 생기면,
이삭은 그냥 그곳을 양보하고, 그 땅을 버리고 떠납니다.
온유한 자가 정말 복 받은 사람인가요?
자신의 재산이 빼앗기는데도,
어쩌지 못하고,
고스란히 빼앗기는 사람이 복을 받은 사람일까요?
그런데
5절을 보니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무엇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까?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세상이 악해서,
온유한 자를 가만 놔두지를 않습니다.
온유한 자의 땅을 빼앗고, 재산을 갈취하고, 괴롭힙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는, 가진 땅을 빼앗기고, 살 곳도 잃어버린 채, 그렇게 세상에서 유리방황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마지막 날이 오면,
하나님이 악한 자들의 땅을 모조리 재산 몰수하여,
온유한 자에게 기업으로 몽땅 줘버리겠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악인들이 번성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행운아가 아닙니다.
그들이 아무리 많은 부동산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관계 없는 사람은,
반드시 재산을 완전히 몰수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한 뼘의 땅도 없기 때문에, 영원히 유리방황해야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6절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 마르다는 것은,
하나님 관계에서,
항상 목마름을 느낀다는 것이고,
더 쉽게 이야기하면,
항상 예배에 대한 갈증,
말씀에 대한 갈증,
더 말씀을 가까이 하고 싶고,
더 말씀을 자주 듣고 싶고,
항상 말씀 가운데 거하고 싶은 갈증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의’라는 단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드리는 삶이라는 의미인데,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항상 자기 자신이,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늘 하나님 앞에서 죄송스럽고,
마음이 아프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볼 수 있을까,
자기 중심이 아닙니다.
자기 자아 실현이 아닙니다.
하나님 중심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자 애를 쓰는 마음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인 것입니다.
*3절부터 6절까지는, 대체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주리고 목 마른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7절부터 10절까지는, 대체로 사람들과의 관계인데,
긍휼히 여기고,
서로 화평하게 하고,
예수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
대체로 주변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모습을 이야기 하는데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타인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가득한 사람을 말합니다.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
마음이 들끓는 것인데,
창자가 찢어지는 마음,
예수를 떠난 친구에 대한 창자가 찢어지는 마음,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창자가 찢어지는 마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족에 대하여 창자가 찢어지는 마음,
이게 긍휼인데,
이런 사람은,
복이 있다.
왜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늘 타인을 위해 사는 이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보살핌 가운데 살게 될 것이기 때문에,
복이 있다는 것이죠.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자인데,
겉과 속이 일치하는 사람,
속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사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도, 타고 나는 것이죠.
억지로 사는 게 아니라,
나면서부터 타고 난 사람인데,
8복은, 억지로 살아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명령이 아닙니다.
이미 그런 상태이다.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태어나보니까,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
세상에 환란을 당하면서,
하나님 외에 답이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착한 심성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아왔기 때문에, 행운아라는 것이죠.
이런 사람은, 겉과 속이 같기 때문에 하나님을 선명하게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선명하고,
하나님이 뚜렷하게 보이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하기 때문이죠.
*이제 2가지 남았는데,
9절과 10절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 하고,
나쁜 생각을 하게 하고,
교묘하게 사람들을 갈라놓는 사람은,
화평하게 하는 자가 아닙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기본적으로 평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갈라놓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타인을 세워주는 말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타인의 욕설에 동조하고, 그 사람을 험담하거나, 고립시키지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평화를 이루어내려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죠.
*마지막으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인데,
‘하나님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은 반드시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특히 요즘은 ‘평등’을 자주 이야기 하는데,
성경은 ‘평등’이 아니라, ‘공평’입니다.
받은 대로 달라 하시고,
수고한 대로 상급을 주시는 하나님이시죠.
평등이 아닙니다.
평등이 뭐냐?
일을 많이 한 사람이나, 일을 거의 하지 않은 사람이나,
요즘은 일을 하지 않아도 돈을 받을 수 있는데, 이게 정책적으로, 성경적으로 맞는 것이냐?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달라 하시고, 적게 받은 자에게 적게 달라하십니다.
십일조가 뭡니까?
많이 받은 자는 많이 받은대로, 적게 받은 자는 적게 받은대로, 하나님이 그 물질을 기쁘게 받으시겠다는 제도 아닙니까?
공평하신 하나님이시지, 평등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상급이 뭡니까?
새벽마다 나와서 기도하고, 저녁마다 나와서 기도하고,
시간 날 때, 그 시간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쓰고,
가진 물질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쓰고,
이런 사람이 당연히 더 많은 상급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 수고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 은혜이지만,
하나님은 수고한 대로 갚으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이시지, 수고한 사람이나 수고 안한 사람이나 똑같이 천국에 상급 주시는 평등의 하나님이 아닌 것이죠.
그래서 뭐냐?
예수를 위해,
하나님이 옳다고 생각하시는 삶을 위해, 박해를 받은 자,
복이 있다.
*말씀을 마치는데요.
11절에서, 예수님은 자기와 가까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바로 너희가 행운아다.”
3절부터 10절까지는, 주어가 3인칭 복수,
심령이 가난한 그들은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그들은 복이 있나니,
주어가 3인칭 복수였는데요.
갑자기 11절에,
주어가 2인칭 복수,
가까운 대상을 지칭하는데,
2인칭 복수 주어,
박해를 받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라고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예수의 곁에 있는 측근들, 그 시대 제자들,
교회가,
이런 핍박과 모진 고난 가운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를 통하여,
그 교회를 위로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예수 때문에 너희가 욕을 먹고, 박해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거짓말로 악한 말을 들을 때,
너희는 행운아다!
기뻐하고 즐거워해.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급이 너무도 크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똑같이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았다.
여러분,
진짜 행운아는, 예수 때문에 손해와 박해도 당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하늘에서 상급이 아주 클 것입니다.
이 믿음 갖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
내게 허락된 시련과 불합리함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가난하고, 괴로운 일들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된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 시련을 통해, 주를 더욱 붙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복을 더욱 사모하게 하여 주옵소서.
2. 두번째로 교회를 위해서, 교회를 섬기시는 담임목사님과 사모님을 위해서.
우리 다음 세대가 영안이 열려서,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 복을 사모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 긍휼과 자비가 넘치게 하시고, 마음이 청결하게 하시고, 예수 때문에 받는 박해도 기쁨으로 이기는 다음세대가 되게 해달라고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복으로 우리를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 세상의 불완전함 가운데 고통당하는 마음을 위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의 나라가 완성되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받는 고통과 박해를 기쁨으로 견디기를 원합니다. 성령님 일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
3-10절까지는 모든 대중들에게 전파하는 것과 같은 ‘3인칭 복수’
그러다가 11절부터 ‘2인칭 복수’로 바뀌면서, 바로 너희가 그 복받은 자들이다.
어쩌면 3-10절은 성경 본문을 읽은 것과 같다.
구약에서 말하는 복 받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구약에서 말하는 복 받은 사람들이 누구냐? 그것이 바로 ‘너희’이다.
사역
1 그가 보셨다, 무리들을, 그가 오르셨다, 그 산으로, 그리고 그가 앉으시니, 그의 그 제자들(마세테스)이 그에게 나아왔다.
마세테스:
배움이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도록 인도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우리의 자율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요한복음 6:45). 따라서 배움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 대한 구약의 강조가 포함됩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랍비 나 서기관처럼 앞으로 나아 오셨습니다. 그는 하나처럼 가르치고 토론했으며(막 12:18-40), 법적 결정을 내리도록 요청받았습니다(눅 12:13-14). 비록 그가 랍비 학교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지만(막 6:2; 요 7:15), 제자들(막 9:5; 11:21; 요 1:38; 4:31)과 외부인(참조. 요 3:2)에게 "랍비"로 불린 것은 분명 정의로운 일이었습니다. 이 시점에서도 예수님이 주변에 제자들을 모았다는 점에서 임시 랍비()와 유사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랍비 서클과 헬라어 철학 학교에서는 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학교"에 가입하여 제자가 되기로 결정한 반면, 예수님에게는 결정적인 것은 그의 부르심이었습니다(마 4:18-22; 9:9 ; 눅 9 : 59-62; 요 1:43) .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전 생애를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마 10:37; 눅 14:26-27; 참조. 막 3:31-35; 눅 9:59-62). 제자가 된다는 것은 ( 마태복음에서 강조하듯이) 예수님께 묶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마 12:46-50; 참조 . 막 3:31-35).
2 그의 입(스토마)를 열어, 그가 그들을 가르치시는데(디다스코 / 미완료 / 기술이나 지식을 전하다), 이르시기를,
“입”
Matthew 4:4 NKRV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입 = 예수 그리스도의 입
디다스코 :
음서의 만장일치 증언에 따르면 διδάσκειν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가장 두드러진 기능 중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마 4:23에서 갈릴리에서의 방랑 사역에 대한 포괄적인 언급에서 우리는 먼저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것을 읽은 다음 βασιλεία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병자를 고치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3 그들은 복되다(마카리오스 / 복된, 행복한, 축복받은), 그 거지같은 자들(프토코스 / 가난한, 거지, 천박한, 불쌍한), 프뉴마(영, 영혼)가, 왜냐하면 그들의 것이다(에이미 / 현능직), 그 바실레이아(나라)가, 그 하늘들의
영혼이 거지같은 자들이 복되다!
왜냐하면, 그 하늘들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묵상 : 너희들 참 복받았다, 행운아다, 왜? 나의 가르침을 받으러 나아왔으니 말이다.
4 그들은 복되다, 애통하는 자들은(펜세오 / 애통하다, 슬퍼하다, 근심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파라칼레오 / 미수직 / 위로하다, 격려하다)
펜세오:
파라칼레오 :
5 그들은 복되다, 온유한 자들은(프라우스 : 온유한, 친절한, 겸손한), 왜냐하면 그들이 상속할 것이기 때문이다(클레로노메오 / 미능직 / 기업으로 받다, 상속받다, 얻다). 그 땅을
프라우스 :
클레로노메오 :
6 그들은 복되다, 주리고 있는 자들(페이나오 / 현능분 / 주리다, 시장하다, 배고프다) 그리고 목마른 자들(디프사오 / 현능직), 의에게(디카이오쉬네), 왜냐하면 그들이 코르타조(미수직 / 채우다, 배부르다, 만족하다, 가득차다)할 것이기 때문이다.
페이나오 :
디프사오 :
디카이오쉬네 :
코르타조 :
7 그들은 복되다, 긍휼히 여기는 자들은(엘레에몬 / 자비로운), 왜냐하면 그들이 엘레에오(미수직 / 긍휼히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엘레에오 :
8 그들은 복되다, 깨끗한 자들은(카싸로스 / 청결한, 깨끗한, 맑은), 그 중심이(카르디아 / 마음, 심장, 중심), 왜냐하면 그들이 데오스(하나님)을 호라오(보다 / 미중직)할 것이기 때문이다.
카싸로스 :
카르디아 :
9 그들은 복되다, 에이레노포이오스(중재자, 화평하게 하는 자)하는 자들은,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칼레오(미수직 / 부르다, 이름하다, 칭하다)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에이레노포이오스 :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10 그들은 복되다, 디오코(완수분 / 박해하다, 따라가다)받은 자들은, 디카이오쉬네 때문에, 왜냐하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바실레이아가, 그 하늘들의
디오코 :
11 너희에게 복이 있다, 그들이 너희를 오네이디조(욕하다, 책망하다, 꾸짖다, 비난하다 / 부능가)할 때마다, 그리고 그들이 디오코(부능가 / 박해하다)하고 그들이 에이폰(말하다, 이야기하다)할 때마다, 포네로스(악한, 나쁜), 너를 맞서서, 거짓으로(프슈도마이 / 거짓말하다), 나 때문에
오네이디조 :
디오코 :
에이폰 :
포네로스:
퓨스도마이 :
12 너희는 기뻐하라(카이로 / 현능명 / 기뻐하다, 즐거워하다), 그리고 기뻐하라(아갈리아오 / 기뻐하다), 왜냐하면 너희의 그 상(미스쏘스 / 상, 삯, 보수)이 폴뤼스(많은, 큰)하기 때문이다, 하늘들에서. 가르(과연) 이와같이 그들이 디오코(박해하다)하였다, 선지자들도, 너희 전에 있던
기뻐하라
기뻐하라
왜냐하면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많이 때문이다.
과연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하였다.
구약성경의 신약성경 사용에 대한 해설
산상수훈( 5-7장)은 마태복음 내러티브를 특징적으로 강조하는 다섯 개의 주요 설교 자료l 중 첫 번째입니다( 10장, 13장, 18장, 23-25장과 함께). 이러한 담론은 종종 토라의 다섯 권(창세기-신명기, 특히 베이컨 1918로 시작)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은 다른 곳보다 마태복음에서 더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며, 여기에는 산상수훈(마 5:1)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모티브는 모세가 시내산에서w를 받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도널드슨 1985 참조).
예수님의 위대한 설교가 시작되는 팔복(5:3-12)에는 구약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5:3)는 아마도 하나님을 유일한 소망으로 인정하는 가난한 자들, 특히 이사야 61장 1절에 등장하는 아나움()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슈바이처 1975: 86; 카슨 1984: 131; 브루너 1987: 135). 거기 성령의 기름 부음받은 선지자가 그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여기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복을 선언하는 것처럼. 이사야 61장 2절은 두 번째 팔복(마 5:4)에서 거의 확실하게 암시되는데, "모든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기 위함"입니다.
Isaiah 61:1 NKRV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Isaiah 61:2 NKRV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마태복음 5장 5 절은 시 37:11을 암시합니다. 땅을 상속받는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은 온 땅을 상속받는 예수의 온유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Psalm 37:11 NKRV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6절은 이사야. 55:1-3을 연상시키는데, 영적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주님께 나아와 먹고 마시라는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7절은 하나님의 자비를 강조하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유명한 자기 계시가 담긴 출 34:6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 24:3-5은 5:8의 기초가 될 수 있는데, 5:8은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가 그분의 축복을 받기 위한 요구 사항으로 깨끗한 손과 깨끗한 마음을 요구합니다.
Isaiah 55:1–3 NKRV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Psalm 24:3–5 NKRV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시편 34:14은 5:9의 화평케 하는 자의 축복에 울려 퍼지는 음을 들려줍니다.
Psalm 34:14 NKRV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Matthew: 마태복음: 소개와 해설
팔복'('복이 있나니/있다...' 유형의 진술)은 마태복음(11:6; 13:16; 16:17; 24:46)의 다른 곳과 누가복음에서 더 자주 발견됩니다. 구약성서의 시편(예: 시 1:1; 32:1-2; 40:4; 119:1-2; 128:1)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 형식에 기초하고 있지만, 구약성서나 다른 유대 문헌 어디에도 여기처럼 길고 세심하게 구성된 연작은 없습니다.
마카리오스 : 히브리어 '아슈레, '운이 좋은'을 나타내며 '아슈레'처럼 거의 전적으로 축하의 공식적인 상황에서 사용됩니다. 그래서축하를 받아야 할 사람, 인생에서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따라서 팔복은 '세상 사람'의 태도와 대조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인 참된 제자의 태도를 설명하며, 이것이 본질적인 선함뿐만 아니라 결과에서도 최고의 삶의 방식임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제자도의 보상은 각 구절의 후반부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여기서 말하는이 ( 누가복음 6:20에서처럼) 물질적 가난이 아님을 즉시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이 구절은 모든 팔복의 근간이 되는 구약성경의 주제, 즉 시편과 다른 곳에서 자주 등장하는 '가난한 자' 또는 '온유한 자'('아니 ' 또는 '아나와')의 주제(, 4절에 암시된 사 61:1-2, 5절에 암시된 시편. 37, 5절에 암시됨), 충성으로 인해 억압과 물질적 불이익을 받더라도 겸손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 교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백성을 핍박하는 '악인'과는 대조적으로불이익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후대의 유대 문헌, 특히 솔로몬 시편과 쿰란 문헌('심령이 가난한 자'는 1QM 14:7에 등장)에서 '가난한 자'는 계속해서 신실하고 핍박받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옹호하실 것입니다.
4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삶이 불행한 사람들, 특히 하나님에 대한 충성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입니다 ( 3 절 참조). 이 구절은 메시아의 사역의 일부로서 위로를 약속하는 이사야 61:2을 반영합니다
5. 온유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와 같은 구약의 사상을 반영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하나님께 의지하여 자신의 몫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 자신의 사역의 특징으로서 온유함을 강조합니다(11:29, 12:15-21, 21:5). 온유한 자에 대한 약속은 시편 37:11에서 인용한 것입니다('온유한 자'와 '악한 자'의 태도와 운명을 대조적으로 다룬 시편). 여기서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주로 팔레스타인을 가리키지만, 더 일반적으로는 온유한 자가 악인을 대신한다는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스스로 차지하지 못할 높은 곳을 그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온유해서 빼앗기고 빼앗기지만, 결국 하나님이 그들을 악인들을 대신하여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다.
6 마태복음 3장 15절에 나오는 의에 대한 의미는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과의 순종과 신뢰의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8. 시편 24:3-4 참조. 마음이 순결하다는 것은 도덕적, 성적 순결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신 6:5), 한결같은 충성을 다하며, 내적 본성이 외적 고백에 일치하는 사람( )을 가리킵니다( 사 29:13 참조).'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요일 3:2)인 천국에서만 온전히 실현될 수 있으며..
그러나 더 작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비전은 이미 이 땅에서 '보이지 않으시는 분을 보는 것과 같이'(그 b. 11:27) 그분을 섬기는 데 인내하는 그분의 참된 연인들의 경험입니다.
9. 갈등과 경쟁이 특징인 세상에서 평화를 지키는 사람은 드물고, 화평케 하는 사람은 더욱 드뭅니다. 앞의 팔복에 나타난 이기적인 야망의 부재는하나님이 특히 기뻐하시는 이러한 특성의 유일한 근거가 됩니다(시 34:14). 하나님은 최고의 화평케 하시는 분이며(참조: 엡 2:14-18, 골 1:20), 이 특성은 제자들을 그분의 아들로 구별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특성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10. 6절에서와 같이 의는 단순히 '착함'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향한 삶의 전체적인 방향을 나타냅니다.
iii. 제자의 고유성(5:11-16)
제자의 성격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에서 이제 설교는 예수의 제자들에게 직접 연설로 바뀌고, 그들의 삶과 증거에 미치는 영향을 나타냅니다.
11-12 모욕과 비방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초기부터종종 취했던 형태입니다(예: 10:24-25; 벧전 3 : 16; 4:4, 14-16 참조). 예수님 자신도 학대와 비방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추종자들이 내 계정 에서 동일한 대우를 받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참조: 10:18; 24:9). 실제로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충실한 종들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들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벧전 1:6, 4:13의 같은 동사 참조).
이 말씀은 제자들을 반드시 선지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 세상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킨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습니다.
A Handbook on the Gospel of Matthe
일부 학자들은 예수님이 군중을 피하고 방해받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 칠 수있는 산에 올라 갔다는 가정하에 분사를 원인으로 돌립니다d. 그러나 마태는 군중 전체가 들었다고 암시하므로(7:28-29), 인과관계가 의도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문맥에서 4:25과 5:1a의 "군중"은 5:1b의 제자들과 동일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4:25에서 군중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여러 곳에서 온 큰 무리의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여전히 군중이 있지만, 그들은 분명히 하나의 큰 군중으로 모였습니다.
유대인 랍비는 회당의 교사들(눅 4:20)과 마찬가지로 보통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자신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13:2; 23:2; 24:3 참조). 따라서 산상수훈은 실제로 가르치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으며,
"제자"는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신약 성경의 특별한 맥락에서 제자는 예수님이 그의 가르침을 배울 뿐만 아니라 그의 삶과 운명을 함께 나누기 위해 부르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여기서는 제자라고 말하며, 따라서주님과 그를 따르도록 부르신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암시합니다.
마태복음 5:2
그가 입을 열었다는 말은 고전 문헌과 유대 랍비 문헌에서 발견되는 공식을 문자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표현을 "셈어 관용구"(단 10:16, 욥 3:1, 33:2)와 "전통적인 공식"(행 8:35, 10:34)으로 분류합니다. 다니엘서 10장 16절과 욥기 3장 1절에서 사용된 것을 근거로 적어도 한 명의 주석가는 이 단어가의 의미를 강조하는 기능을 한다고 생각하며, 여기에서도 그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들은 11-12절을 3-10절의 팔복과 평행한 별도의 팔복으로 해석하지만, 확고한 결정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비와 축복을 받은 행운아들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팔복은 대부분 3인칭으로 되어 있습니다. 3~10절은 3인칭 형식을 따르지만, 11~12절에서는 덜 빈번한 2인칭 형식으로 바뀌었습니다( 13:16, 16:17 참조).
자주 사용되는 번역 중 하나는 "좋은 위치에 있다", 즉 "좋은 것을 받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입니다..
TEV는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자신이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 번역합니다(AT "영적 필요를 느끼는 사람").
가난하다는 단어는 5절에서"온유하다"("겸손하다")로 번역된 단어와 본질적으로 동의어이며, 그 의미가 너무 깔끔하게 구분되어서는 안 된다는 학계의 합의가 있습니다.
이사야서(40-55장 )가 쓰여진 시기에 "가난하다"는 용어는 자기 땅 없이 유배 생활을 하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에 "가난한 자"는 아마도 외적인 환경으로 인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라볼 수 있는irit(믿음)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서 있는 자"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는 것"은 기대되는 메시아의 구원에 대한 약속 중 하나입니다(누가복음 2:25 참조).
현재의 맥락에서 이 개념은 현 시대의 '애도'와 다가오는 시대의 '위로'를 대조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적어도 이사야의 말씀과의 연관성에 비추어 볼 때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것이다"(TEV). 이러한 소위 "신성한 수동태"( ) 구조는 셈족 언어 사용의 전형이었으며, 유대교의 신학적 전망은 신이 직접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위로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애통하는 자들을 말씀으로 위로하고 계시다.
5:5
이 단어에는 "보잘것없고, 비천한"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며 심지어 "무력한"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힘이 필요 없기 때문에 힘이 없으며, 하나님께 모든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제압하려고 하는 대신, 그들은 하나님을 섬깁니다.
땅을 소유하겠다는 약속은 원래 가나안 땅에 국한되었지만( 창 17:8 참조), 언젠가 하나님이 다스리실 온 땅을 포함하도록 확장되었습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은 3절의 천국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TOB 참고).
마태복음 5:6
의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 주림과 목마름은 구약(사 55:1, 시 42:2, 바룩 2:18)과 신약(요 4:13, 7:37, 계 21:6, 22:17) 모두에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이 그림의 의미는 온 마음을 다해 무언가를 구하고 무엇보다도 그것을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여기서 의로움의 또 다른 허용 가능한 번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자비는 누군가의 나쁜 상황에 대해 슬픔을 느끼고 그것에 대해 무언가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친절하다" 또는 "용서한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용서하실 것입니다." 또는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8
시편 24:3-4에 따르면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깨끗한 손과 깨끗한 마음"이 요구됩니다.
Psalm 24:3–4 NKRV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여기서 말하는 순결은 도덕적 완전성이나 성적 순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 없이, 분열된 동기와는 대조적으로 동기와 헌신의 단일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관심이 있는 마음.
예를 들어 이성에 대한 태도(5:28), 돈에 대한 태도(6:20-21), 심지어 자신의 말에 대한 태도(5:37)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NAB는 "... 주로 자기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섬기는 사람"을으로 "한결같은 마음"으로 번역합니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인 사람", "삶이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데만 집중된 사람",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완전한(또는 전적인) 사람" 또는 "하나님에게 완전히 헌신하는(또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전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을 본다"
비성경적인 유대교 문헌()과 성서 자체는 이 구절에서 말하는 화평이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평화라는 생각을 뒷받침합니다.
"사람들을 서로 친구로 만드는 사람들"
"사람들이 친구가 되게 하는 사람",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도록 돕는 사람",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만드는 사람", "사람들이 원수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람"
마태복음 5:10
천국은 첫 번째 팔복과 여덟 번째 팔복에 모두 등장합니다. 이는 한 섹션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이며, 마태복음의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 "포함"이라는 문학적 장치의 예입니다. 이 팔복의 형식과 마지막 팔복의 형식인 11-12절의 차이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핍박을 받다 헬라어로 퍼펙t 분사로 번역되는데, 이는 마태가 쓴 것처럼 당시의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박해를 받다'는 종종 "고통을 받다"로 번역되므로 이 구절은 "다른 사람들이 고통(또는, 박해)을 주는 사람들 "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에" 또는 "그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옳기 때문에" 또는 "하나님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살기 때문에"
(전환)
마태복음 5:11
11-12절은 10절과 평행을 이루며, 10절을 핍박받는 제자들과 교회에 구체적으로 적용합니다. 반대와 억압에 직면했을 때 예수님의 약속은 지금 여기에서현실이 됩니다. 이것은 2인칭 대명사 ' '로의 전환을 설명하며, 13~16절로의 전환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욕설(TEV "모욕")은 강한 언어적 폭력으로 사용됩니다( 27:44; 벧전 4:14 참조). 한 주석가는 유대인들이 언어적 학대를 극도로 악의적인 것으로 간주했다고 지적합니다. 랍비들은 우상 숭배, 음행, 유혈 사태를 모두 합친 것만큼이나 악하다고 여겼습니다. 인격의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한 사람은 공동체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었고 그날의 상황에 따라 그의 삶을 계속할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모욕적 인 단어 자체에는 그 자체의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욕설은 "악에 대해 말하다" 또는 "당신이 나쁘다고 말하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를 반대하기 때문입니다"는 가장 명확한 번역은 "당신이 나를 따르기 때문에" 또는 "당신은 내 백성이기 때문에"
마태복음 5:12
마태는 현재 시제에서 기뻐하라는 명령을 사용하여 제자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행복하고 계속 행복해지도록 격려합니다.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을 나타내는 것
70인역에서 사용된 것처럼 극도의 기쁨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특히 사 12:6; 25:9; 29:19; 35:1, 2; 41:17; 49:13; 61:10; 65:14, 19 참조).
두 단어의 의미는 비슷하며,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하면 사람들이 정말 행복해야 한다는 요점을 강조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보상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상, 즉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분을 충실히 섬기는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보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행한 일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오히려 제공된 서비스를 훨씬 능가하는 선물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엘리야, 아모스,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이 어떻게 박해를 받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나옵니다. 또한 서기 1세기 유대인들은 선지자 이사야가 속이 빈 나무에 몸을 숨긴 후 벌에 쏘여두 동강이 났다고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11:37은 이 사건에 대한 참조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자기 세대의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는 전통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마 23:29-36).
"사람들은 오래 전의 선지자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고통을 주었다"
NIV Cultural Backgrounds Study Bible: Bringing to Life the Ancient World of Scripture
5:11 나 때문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위한 고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이, 곧 하나님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신다.
모두를 위한 마태복음, 1부: 1장~15장
신명기에서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 국경에 도착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엄숙한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순종하거나 불순종할 때 그들에게 임할 축복과 저주를 열거하셨습니다( 28장). 이제 마태는 예수님이 이집트(2:15), 물과 광야( 3장과 4장)를 거쳐 약속의 땅(4:12~25)으로 나오시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 그의 새 언약이 있습니다.
약속의 땅을 마주보며, 언약을 갱신하였다.
예수님 역시, 약속의 땅을 바라보시며, 하나님 백성들과 언약식을 행하고 있다.
산에서
Matthew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섯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산상수훈( 5-7장)은 이 중 첫 번째 섹션입니다. 나머지는 열두 제자에 대한 가르침( 10장), 천국의 비유 ( 13장),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 18장), 종말론적 심판( 23~25장)입니다. 각 블록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7:28; 11:1; 13:53; 19:1; 26:1)와 유사한 공식으로 마무리됩니다.
베이커 일러스트 성경 배경 해설
산상수훈(5:1-7:29)
예수님은군중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5:1). 마태는 예수를 산에서 율법을 전달하는 새로운 모세( 신 18:18 참조)로 소개합니다(그 산). 모세가 가르칠 때 모세의 자리에 앉았던 랍비들처럼(마 23:2), 예수님도 제자들과 군중에게 가르침을 전하실 때 앉으셨습니다.
심령이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5:3 ).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고, 영적 가난(불순종)은 경제적 가난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이것은 모순된 말입니다(신 28:15-68). 그러나, 왕과 그의 나라가 도래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을 받습니다(사 61:1)-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적인 치유가 이를 증명했습니다(마 4:23-25).
이것이그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하는 방식입니다(5:12). 디스사이플은 고대 선지자들처럼(그리고 예수님처럼) 이스라엘에 의해 거부당할 '예수 선지자'였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으면(5:13).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고, 고기를 보존하고, 물을 정화하고, 제물을 정결하게 하는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는 생명의 기본 미네랄입니다. 예수님에게 갈릴리 사람들은 그의 목적에 있어 흔하고 생명에 필수적인 소금과 같았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통해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을 확장할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부한다면 그들은 맛없는 소금과 같을 것입니다 소금을 맛있게 만들 방법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버려지고 학대당할 것입니다ain. 더 이상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의미해집니다.
Feasting on the Word: Preaching the Revised Common Lectionary: Year A, Volume 1
해석학적 핵심은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너희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명령하신 5:48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사람들은 로마 황제나 유대교의 특권층이 아닙니다(). 팔복은 자신의 업적이나 사회에서의 지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자, 잊혀진 자, 멸시받는 자, 정의를 추구하는 자, 평화를 만드는 자, 신앙 때문에 박해받는 자의 편에 서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합당하다고 생각하시는 집단에게 선포됩니다..
따라서 예수교의 정치l 의제는 가치 없는 사람들(박해를 받는 그들 자신도 포함)이 마침내 인간으로서 온전히 가치를 인정받는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의를 추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의를 추구하는 것을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3 5:1-12의 내러티브 맥락은 4:18-22 (예수님의 제자 소명)과 4:23-25 (예수님의 메시지 선포e와 그를 따르는 군중 치유)에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첫 구절은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하는 군중들에게 필요한 지침(설교의 나머지 부분)의 기초가 되는 위임장을 제공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축복을 선포하시면서 제자가 되어야 할 사람(성품)과 현재의 사회 정치적, 종교적 맥락에서 그들의 삶에 미칠 결과, 그리고 하나님의 미래라는 관점에서 제자도에 대한 부르심을 구성합니다..
마지막으로, 팔복의 신학적 핵심은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선하심, 공의, 자비)에 근거한 의를 추구하며그가 축복하는 덕을 실천하는 제자가 되라는 부름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의 명령입니다.
우리 세상에 희망이 없다는 데는 이견이 거의 없습니다. 저명한 신학자n 위르겐 몰트만은 교회의 죽음의 무릎은 전반적인 태도가 분노에서 냉소로 옮겨갈 때라고 말했습니다.2 냉소는 분노와는 다릅니다. 냉소주의는 무엇이든 받아들이기로 결정합니다. 관련에 대한 결과. 냉소주의는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거의 제시하지 않습니다. 만트라는 "걱정하지 마세요. 원래 그런 거니까. 익숙해질 것입니다." 팔복은 우리를 그 반대의 관점, 즉 희망으로 초대합니다. 우리는 절망적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셨던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징후가 그렇지 않더라도 희망의 정신으로 세상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질 때, 우리는 자비, 겸손, 평화, 사랑이 삶의 의미를 설명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가능성을 확신하며 세상에 서게 됩니다..
주석적 관점
팔복은 왕국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종말론적 축복입니다. 설교의 후반부는 윤리적 명령으로 가득 차 있지만, 팔복(des)은 명령이 아니라 지시적 모드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를 위해 심령이 가난하거나 애통하는 자가 되거나 박해를 받으라고 군중에게 요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난하고 애통하며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천국의 좋은 소식 선포"(마 4:23)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듣게 됩니다.
‘조건이 아니라, 이미 겪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모세가 되실 것이며, 그의 설교는그는 토라를 주는 것에 비유한 설교입니다. 이 독서에서 "산에 올라가다"라는 구절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것을 암시합니다(출 19:3, 12; 24:15, 18; 34:1-2, 4). 마태복음 첫 장의 사건 순서가 출애굽기의 순서와 유사하다는 점( )은 두 내러티브 모두 유아 학살, 영웅의 귀환, 물 속을 노래하는 파스, 광야에서의 유혹, 산에서의 율법 수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독해를 뒷받침해 줍니다. 또한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루러 왔다"( 17절)고 하신 율법과 선지자들을 직접 언급하십니다.
설교가 새로운 토라라면, 팔복은 그 서문으로서 십계명의 첫 주장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주 너희의 하나님pt이다"(출 20:2). 모세의 토라가 노예로부터의 해방으로 정당화되었듯이, 예수님의 계명은 약속의 땅의 윤리입니다.
마치, 출애굽한 백성들 앞에서, 십계명을 선포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사야 본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사 61:1; 마 5:3), 애통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며(사 61:2; 마 5:4),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하는 것(사 61:1; 참조. 마 5:8)에 대해d로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LXX는 히브리어 '아나윔(사 61:1)'을 땅을 상속받을 자, 온유한 자(마 5:5)로 번역합니다(클레로노메소신 tēngēn). 또한 의(마 5:6, 10)의 개념은 이사야 61:3, 8, 11의 약속과 공명합니다. 억압받고, 마음이 상하고, 추방당한 사람들()에게 약속된 종말론적 사건들, 즉 도시의 폐허를 슬퍼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말씀이 선포되는 특정한 정치적 상황에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켜야 합니다. 설교의 윤리는 일반적인 윤리가 아니며, 팔복은 진공 상태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설교는 망명에서 돌아왔지만 여전히 제국의 포로가 되어 군홧발에 억압당하고 강도와 억울한 일을 당하는 등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을 위한설교입니다.
이 개념은 외부 및 내부 문제에 모두 직면했기 때문에 마태 회중에게 중요했습니다.외부적으로는 전통 유대교 지도자들과 마테안 공동체가 얼마나 신실한 유대인인지에 대해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어떤 사람들은 서로 긴장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떠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팔복을 통해 마태는 공동체에게 지금은 삶이어려울지라도 충실히 인내하는 사람은 천국을 기대할 수 있다고 확신시켜 줍니다. 팔복에서 공동체가 복을 받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모든 사람이 거품이 끼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혼란 속에서도 회중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설교자는 회중이 팔복에 대해 명령이 아닌 분위기에서 들을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팔복은 심령이 가난해지라, 애통해하라, 온유해지라는 등의 직접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팔복은 약속입니다.
오늘날의 순진한 독자들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수반되는 슬픔에 대한 언급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태는 세상의 현재 상태가 하나님의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인식하는 신자들의 애도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 불의, 착취, 폭력을 보고 슬퍼합니다. 이 찬송은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약속합니다.
문법적으로 팔복은 명령(명령)이 아니라 지시적 진술, 즉 사물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사람들을 권면하거나 꾸짖는 대신 팔복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천국의 약속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설교를 듣는 것 자체가 축복의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팔복과 산상수훈의 사상은 유대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혁신적인 요소는 핵심적인 신학적 내용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천국과 종말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로 해석하는 데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설계를 안내하는 모델은 위대한 율법 시편인 시편 1편입니다. 예수님은 시편 1편처럼"악인의 길을 걷지 않고 여호와의 길을 걷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내 번역)라는 "축복"이라는 단어로 설교를 시작하십니다.
시편 1편의 렌즈를 통해 산상수훈()을 읽으면 예수님이 설교의 시작 부분에서 아홉 가지( ) 축복을 말씀하실 때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팔복의 목회적 함의에 대한 이해를 형성할 수 있는 방식으로 팔복을 풀어낼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에서 영어 본문에서 "축복"이라는 단어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ʾ아샤르인데,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 센세 "올바른 길을 찾다"라는 뜻입니다.
아슈레:
ANE 히브리어의 모든 단계에서 발생하는 אָשַׁר와 동족 인 셈어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셈어 동족이 있는 אָשַׁר, 걷다, 앞으로 나아가다, 인도하다(#886)와 구별되어야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 어근이 원래 אָשַׁר(HALAT 94)에 속했다고 주장합니다.
세상이 "운이 좋다" 또는 "운이 좋다"라고 부르는 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삶을 강조하면서 אַשְׁרֵי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첫 번째 팔복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의 풍요로움으로 웃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영적 가난에 대한 자각이 우리를 예수님 안에 있는 친구에게로 인도할 때 옳고 바른 길에 대한 확신을 느낍니다. 펜세스의 블레즈 파스칼은 "지치고 피곤한 것이 좋다... 그래야 구속주께마음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1라고 말했습니다.
설교의 이 부분이 만들어낸 해석의 생생한 역사는의 밀도 덕분입니다. 이 밀도는 무엇보다도 구약성경의 빈번한 반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애도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약속합니다(사 61:1-3). 시편 기자는 온유한 자가 땅을 상속받는다고 말합니다(시 37:11). "마음이 청결한 자"(마 5:8)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민 12:8) 성경에서 모세와 다른 누구에게도 보장되지 않았던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마태복음 5장에서 칭찬하는 자질( )이 시편 15:1-5 및 24:3-6과 같은 전례 본문에서 성전 입장에 필요한 자질과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성전 입장 = 하나님 나라 입장
Psalm 15:1–5 NKRV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Psalm 24:3–6 NKRV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팔복의 내러티브 배경. 마태복음의 첫 구절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부릅니다 (1:1). 역사적으로 우리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 군중을 반란으로 이끌었던 메시아가 될 만한 인물들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66-70년에 일어난 유대인 대반란은 로마의 군사적 진압( )을 필요로 했고, 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절정에 달했습니다. 마태의 예수 이야기는 강력하고 정치적인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소환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족보를 보면 위대한 다윗 왕이 조상이자 원형으로 등장합니다( 1:2-17). 그런 다음 동방에서 온 이국적인 방문객들이 새로 태어난 "유대인의 왕"(2:2)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현 통치자는 이 소년 왕과 정치적 경쟁에 직면하지 않기 위해 자기 지역의 모든 유아를 학살하라는 마기스의 주장을 충분히 생각했습니다(2:16-18).
마태복음의 다음 등장인물은 "나보다 더 능력 있는 자"(3:11)가 오실 것을 외치는 강력한 선지자로, 그는 심판자의 권능을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 사람에 대해 "그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손에는 타작마당이 있고, 그는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고 알곡은 곡간에 모으되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울 것입니다."(3:11-12). 다가오는 분은악인에게 정의를 울리고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읽기: 마태복음 읽기: 첫 번째 복음서에 대한 문학적, 신학적 해설
예수님의 팔복은 모든 것이 바로잡힐 천국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예고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우는 자, 낮은 자, 굶주린 자, 욕을 먹는 자, 박해받는 자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미래 시대의 축복이 가까이 왔습니다.
지상의 행복만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칭찬하기는커녕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팔복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봅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페사힘 50a: "이 세상에서는 존경을 받지만 다음 세상에서는 가볍게 존경받을 사람들" 참조). 그는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에 열려있는 사람들을 축하합니다. 운이 좋은 외부 환경은 무관하며, 그러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미래에서 배제 될뿐입니다..
마태복음 팔복은 "천국은 그들의 것"(5:3, 10)이라는 약속을 중심으로 네 개의 팔복(5:3-6, 7-10)으로 구성된 두 연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성향과 관련이 있고, 두 번째 그룹은 자비를 베풀고, 마음이 순수하고, 화평하게 하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등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두 번째 송영은 "이 고통의 시대를 있는 그대로 보고"(R. 불트만, "펜테오", TDNT 6:43) 웃는 사람들처럼 세상의 매력에 속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눅 6:25).이들은 사탄의 폭정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명백히 가려진 것을 슬퍼하는 사람들로서(겔 9:4 참조), 전쟁과 불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는 구별됩니다. 그들의 펜은 자신의 죄와 세상의 죄로 인한 고통으로 인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행동해 주실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사 66:2, 13, 계 21:4 참조).
"온유한 자에게 축하를." 온유한 사람은 무력한 사람입니다(시 37:11, 사 11:4, 29:19, 57:15, 61:1).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환영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운이 좋은 반면, 이 땅의 현재 왕국을 다스리는 자들은그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릴 것을 약속하는 다가오는 왕국에서 안식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의로움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말하며,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에서 성취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모스 8:11 참조). 모든 잘못된 것을 갈망하는 도피에 굶주린 사회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장 깊이 갈망하는 사람만이 하나님만이 공급해 주시는 위로를 알 수 있습니다.
자비는 단순히 내면의 감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아끼거나 돕도록 이끄는 행동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로 산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다른 사람에게서 자비를 베풀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비를 베풀라는 명령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큰 죄 중 하나입니다( 9:13; 12:7; 23:23).
이들은 ‘율법주의’만 있고, 사람에 대한 ‘자비심’이 없었다.
교회의 상황 (5:11-12)
"사람들이 나를 인하여 당신을 욕하고 당신에게 온갖 악을 행할 때 당신을 축하합니다." 아홉 번째 팔복은 또한 높은 기독론을 수용합니다.왜냐하면 예수님과의 관계로 인한 핍박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에 대한 헌신으로 인한 핍박만큼이나 하늘에서 큰 상을 거둘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입니다. 3인칭에서 2인칭으로의 전환은 괴롭힘, 공개적인 조롱, 명예훼손의 대상이 되어온 기독교 공동체를 직접적으로 언급합니다. 그들은그들은 선지자와 같은 운명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축하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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