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그들의 열매로 알리라 (마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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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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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
헌금 :
예배를 위하여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믿음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봉헌을 위하여
우리의 피난처요 보호자이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을 믿음으로 인정하며, 봉헌합니다. 건강도, 물질도, 시간도, 주님의 허락없이는 하나도 허락되지 않사오니, 우리 인생의 주권자이신 우리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기도 찬양 : 우물 가의 여인처럼
본문 : 마 7:15-27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오늘날로 비유하면 뭘까?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노력해라.
수고해라.
애써라가 아니라,
당위성에 대해서,
당연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본문이라서, 더욱 놀랍게 들리는 부분인데,
오늘날로 비유하면 뭘까요?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린다.
당위성.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열린다.
당위성.
노력해라.
수고해라.
애써라가 아니라,
당연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본문이라서, 더욱 놀랍게 들립니다.
15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겉에는 아름다운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그 속에는 노략질하는 늑대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하라.
*여러분, 이단들의 특징이 뭡니까?
여호와의 증인,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신천지
예수님의 완전한 구원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예수님의 구원의 완전성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지켜야 된다.
제사를 드려야 된다.
토요일에 모여야 된다.
뭡니까?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와 부활,
은혜의 교리를 망각하고,
인간의 행위로 구원받겠다는 것이죠.
이게 이단들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16세기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핍박과 고난을 당하면서,
성경에 근거한 건전한 교리를 완성했습니다.
그게 뭐냐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입니다.
거기에 보면,
구조가 이렇습니다.
성경.
그리고 성부 하나님
죄와 타락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과 은혜의 바편
그리고
십계명과 주기도문 순으로 되어 있는데
소요리문답만 잘 알아도 거짓 가르침에 속지 않습니다.
이단들의 특징이 뭡니까?
항상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이고, 자신들만 유일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공동체이고, 자신들에게만 소속되어야 한다.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외에 누가 구원을 제시할 수 있습니까? 없죠.
예수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거짓 선지자를 주의합시다.
거짓 가르침을 주의합시다.
유튜브, 인터넷 블로그, 갖가지 다양한 네트워크 속에서 이단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과거, 16세기 독일에서도,
자신이 루터의 뒤를 잇는 마지막 사도라고 이야기하면서,
독일 스트라스부르크에 예수님께서 새예루살렘을 건설하실 거라면서,
설교했던 멜키오르 호프만은,
결국 죽었고,
그의 말은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도
얀 마티스라는 사람이,
네덜란드 뮌스터 시가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장차 성도들이 쇠막대기로 다스릴 천년왕국이 곧 이루어질 거라고 설교했지만,
그는 죽었고,
그의 말은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항상,
자신들의 공동체,
자신들이 직접 들은 말이, 특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을 중심으로 과장하면서,
사람들을 선동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속아서,
시간을 허비하고, 인생을 낭비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거짓 선지자를 주의합시다.
이단을 주의합시다.
*거짓 선지자의 특징이 뭡니까?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21절부터 23절까지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먼저 21절을 살펴볼 텐데,
‘주’라는 단어는,
로마의 군주,
퀴리오스 라는 단어인데,
내가 충성해야 할 대상,
내 의지를 꺾고 순종해야 할 대상을 의미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주여 주여’ 하는 자들에게
너희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아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 두 번 부르는데,
성경에서
두 번 부른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격하게 부른다는 의미인데,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이 죽었을 때,
그냥 ‘압살롬아’ 이렇게 안 되어 있고,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격한 다윗의 감정이 느끼는 본문인데,
아들 압살롬이 비록 반역을 일으켰지만,
자기 아들이 죽었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격한 반응,
슬픔,
눈물이 느껴지는 표현,
그래서 2번 반복해서 부른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열광적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열광적인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하나님을 열광적으로 부르면서,
하나님을 감정적으로 부르고,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인데,
핵심이 뭡니까?
하나님에 대한 감정과 열정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뭡니까?
의지의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죠?
주님, 주님.
주여, 주여
그런데, 당신 뜻대로 살지는 않을 거에요.
당신은 나의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만, 당신은 나의 주인이 아닙니다.
이게 뭡니까?
거짓 선지자,
나쁜 열매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매우 좋은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의 변화, 즉 순종이 나타나지 않으면 가짜라는 것입니다.
또 22절과 23절을 보니까,
이 사람들은,
봉사와 사역에도 열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22절을 보니까,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3번 반복되면서,
자신들이 주님을 위해서 했던 사역이 많다.
22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주의 이름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치료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다.
봉사에 열심이 있고,
영적인 은사가 있어서, 영적인 이적들을 많이 행한 사람들인데,
23절을 보니까,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23절입니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결혼관계를 말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안다는 것은 깊이 알고 있고 친밀한 관계이고, 마음을 나누는 관계이고,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한몸과 같은 관계라는 의미인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모르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희가 나와 전혀 안 친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도 안 친하다는 의미입니다.
영적인 은사는 있는데,
영적인 열매는 없다는 것이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예수님을 닮은 영적인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지어
적은 사람이 아니라, 그 날에
그 날에 라는 표현은, 마지막 날에, 심판의 날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라는 관용어인데,
그 날에
많은 사람이,
거짓된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는 것이죠.
23절입니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 중요합니다.
감정도 우리가 주님께 올려드려야 할 중요한 예배의 수단입니다.
그러나 열정이 있다고 진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봉사도 중요합니다.
봉사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을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와 노력을 쏟아붓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봉사가 있다고 해서 진짜 그리스돈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
두 개의 집이 있습니다.
지붕도 똑같고, 집 모양도 똑같고, 집 재료도 똑같고, 모든 모양이 다 똑같은 동일한 집입니다.
그런데, 비가 오지 않는 건조한 날씨 때에는 몰랐는데,
폭우가 쏟아지고, 바람이 불고, 태풍이 불어서 홍수가 나니까,
한 쪽 집은 그대로 서 있는데,
다른 한 쪽 집이 와장창 박살이 나서, 무너져 온데간데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24절부터 27절까지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다 똑같습니다.
지붕도 똑같고, 집 모양도 똑같고, 집 재료도 똑같고, 모든 모양이 다 똑같은 동일한 집입니다.
그런데,
그 날에,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게 되는 그 날에는,
한 집은 그대로 서 있지만,
다른 한 집은 폭삭 무너져서, 온데간데가 없어질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도 똑같고,
하나님을 위해 하는 봉사도 똑같고,
영적인 은사도 있고,
그 은사를 가지고,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과, 가짜 그리스도인이,
정말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똑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있고, 기독교에 대한 열정이 있습니다.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일을 하고 봉사를 하고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결말은 다릅니다.
왜 그럴까요?
한 사람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지만,
다른 한 사람은 그 집을 흔들리는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는 흔들리지 않지만,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했다,
무엇을 했다,
무엇을 했다.
라는 자랑거리는 흔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
신앙의 정체성이 사역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봉사와, 열정 자체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물어봐야 됩니다.
“나는 예수님과 친한가?”
*말씀을 맺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뭡니까?
그들은
봉사도 하고,
열정도 있고,
모든 것들을 진짜 그리스도인들과 동일하게 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려 하지 않습니다.
어긴다고 할지라도, 철저히 반성하고 회개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열정적이라고 말하지만,
열심히 봉사와 사역도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결코 열정과 봉사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도 지붕이 있고, 뼈대가 있었듯이, 진짜 그리스도인들은 열정과 봉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 열정의 중심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냐?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냐?
내 사역의 중심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냐?
내 열심, 내 노력, 나의 애씀이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냐? 를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나는 너희에게 다 말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하면서,
자신은 천국에 들어가기 합당한 자라고 주장할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분명하고 말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다 내 뒤로 물러가라.
여러분,
우리는 어디에 집을 지은 사람입니까?
반석입니까, 모래입니까?
흔들리는 곳입니까, 결코 흔들리지 않는 예수님과의 관계입니까?
도대체 무슨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했는데,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인격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까?
이 사실을 질문하며,
신앙의 건강성을 확인해보는 귀한 시간이 있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찬양합시다)
이 시간 마음을 드리며 찬양합시다.
우리가 구했던 것은,
정말로 그리스도와의 관계였는지
인생에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은 아니었는지
헛되고 헛 된 것은 아니었는지
우물 가의 여인처럼 구했던 삶에서 돌이켜,
그리스도 한분만을 추구하는 참된 신앙이 되도록 기도하며,
우물 가의 여인처럼
찬양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추구하며 살아왔음을 이 시간 고백합니다.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다." 주님, 내가 이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나의 열정과, 나의 봉사에 대한 열심도 믿을 수 있는 기초가 아닙니다. 오직 주님과의 관계, 주님과 맺고 있는 친밀함이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완전한 반석입니다.
주님, 내가 이 반석 위에 신앙의 기초를 쌓는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같이 기도합시다.
둘째로, 교회를 위해서, 담임목사님과 사모님을 통해 지역이 복음화되고, 영적으로 더욱 변화가 일어나도록. 영육간에 강건하시도록. 청년부를 섬기는 저와 리더, 순장들을 위해서.
특별히 이번주 금요일에는 청년부 주관으로 금요기도회를 은혜의 밤으로 섬기게 됩니다. 많은 지체들이 참여하여 예배하는 은혜가 있도록. 말씀을 전하는 저와, 찬양을 인도하는 찬양단과 리더에게 큰 은혜 베풀어 달라고. 교회를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신앙의 기초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오직 주의 말씀과 주님과의 친밀함에 신앙의 기초를 쌓기로 결단하고 기도하게 하심에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우리가 열정이 있고 사역과 봉사에 열심이 있어야하지만, 그것이 우리 신앙의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알고,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기초가 되게 하여 주셔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인생의 바람이 불어와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 안에 병약한 지체들 있습니다. 그들의 질병을 치료하시고, 속히 회복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고, 이 아픔을 통해 더욱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영적인 성숙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금요기도회를 은혜의 밤으로 준비하고자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시간 되게 하시고, 교회를 섬기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많은 청년들이 뜻을 정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는 시간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옵고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
주님과의 “관계”보다, 자신이 “행한 사역”에 더 마음을 두는 사람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라는 말씀에 전혀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관계에 기초를 두지 않는 사역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안 친한데, 그를 위해 행한다고 하는 모든 일들
좋은 나무는 항상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집중한다.
그러나 나쁜 나무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뒷전으로 두고, 항상 무언가를 더 많이 행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영광을 자신이 취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역
15 너희는 주의하라(프로스에코 / 주의하다, 조심하다 / 현능명), 거짓선지자들로부터, 그들은 온다(에르코마이 / 현재), 너희에게로, 양의 옷을 입고, 그러나 내부에는 하르팍스(탈취자, 사기관)의 뤼코스(이리, 늑대)들이다.
너희는 주의하라 (현재적으로 계속해서)
거짓선지자들을
그들의 특징?
양의 옷을 입고 있다.
내부에는 탈취하는 늑대들이 존재한다.
16 그들의 카르포스(열매, 결실)들로부터, 너희는 깨닫게 될 것이다(에피기노스코 / 알다, 깨닫다, 인식하다 / 미중직), 그들을, 가시나무들로부터 거둘 수 없다, 포도들을, 또는 엉겅퀴로부터 무화과들을
그들의 열매로 너희는 깨닫게 될 것이다.
17 이와 같이 모든 아가쏘스(선한, 좋은) 나무마다, 칼로스(좋은, 아름다운) 카르포스(열매)를 만든다(포이에오), 그러나 싸프로스(썩은, 무가치한, 못된) 나무가, 포네로스(악한, 나쁜) 카르포스를 만든다(포이에오).
선한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만든다
못된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만든다
18 아가쏘스(선한) 나무가 할 수 없다(뒤나마이), 포네로스(악한) 카르포스(열매)를 만드는 것을, 싸프로스(못된) 나무가, 칼로스(좋은) 카르포스(열매)를 만드는 것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부정 부사 / 아니, 아닌) 뒤나마이
선한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만드는 것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만드는 것
선한 나무는 악한 열매를 맺으려고 해도 안 되고
못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해도 안 된다.
19 모든 나무마다, 칼로스(좋은) 카르포스(열매)를 만들지 않는, 에크콥토(잘라내다, 찍어내다, 현수직)되어버린다, 그리고 퓌르(불, 불꽃) 안으로, 발로(던지다, 두다 / 현수직)되어진다.
결과
좋은 열매 만들지 않는 모든 나무마다
찍혀지게 된다.
그리고 불에 던져지게 된다.
20 그런즉 그들의 카르포스(열매)들로부터, 너희는 에피기노스코(알다, 깨닫다 / 미중직)될 것이다, 그들을
그들의 열매들로부터,
너희는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을
21 모든 사람마다, 나에게 말하는, 퀴리에(주여), 퀴리에(주여). 그 우라노스(하늘 / 남복)들의 바실레이아(나라) 안으로 에이스에르코마이(들어가다, 진압하다 / 미중직)하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우라노스(하늘 / 남복)들의 나의 아버지의 쎌레마(뜻, 의지)대로 포이에오(행하다, 만들다)하는 자가, (들어가리라)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마다, 나에게 주여 주여
19절의 ‘모든 나무’마다와 매칭된다.
21절의 ‘모든 사람’마다
들어갈 것이다.
하늘들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대로 만드는 자
포에이오(만들다)
좋은 열매를 만든다 =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
22 많은 사람들이 에이폰(말하다, 미능직)할 것이다, 나에게, 그 날에, 퀴리에(주여), 퀴리에(주여), 당신의 오노마(이름)으로 우리가 프로페튜오(부능직 / 예언하다, 선지자 노릇하다)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오노마로 우리가 다이모니온(귀신, 악령)들을 아크발로(내쫓다, 몰아내다, 빼내다 / 부능직)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오노마로, 우리가 많은 뒤나미스(힘, 권능, 권세, 능력)을 포이에오(행하다, 만들다 / 부능직)하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할 것이다.
그날에 = 종말의 날, 마지막 심판 대에서
퀴리에(주여), 퀴리에(주여) = 21절과 연관된다.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마지막 때에 22절에서 주여 주여 하고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이름으로 x 3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귀신들을 빼내지 않았습니까?
능력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포이에오)
여기서 ‘만들다’라는 동사가 나온다. 이들은 자신이 ‘선한 열매’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주의 이름’을 들먹이며, 하나님을 훼방하는 악한 나무, 거짓 선지자들이었다.
23 그 때에, 내가 호몰로게오(고백하다, 밝히 말하다 / 미능직)할 것이다, 그들에게, 오데포테(결코~ 아닌), 내가 기노스코(알다, 깨닫다)하지 못한다, 너희를. 너희는 아포코레오(떠나가다 / 현능명)하라, 나로부터, 아노미아(불법)을 성취하는(에르가조마이) 자들아,
밝히 말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한다.
너희는 나를 떠나가라, 불법을 성취하는 자들아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로고스(말씀)을 들으며(아쿠오) 그리고 만드는(포이에오) 그들은, 그와 같을 것이다(호모이오 / 비교하다, ~과 같다 / 미수직), 프로니모스(지혜로운, 현명한) 자와, 오이코도메오(짓다, 세우다, 강하게 하다 / 부능직)하는 자, 그 집을 페트라(반석, 바위) 위에
나의 이 말씀을 듣고 만드는 자 =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운 지혜로운 자
25 브로케(비, 폭우)가 내리고, 포나모스(창수, 강, 탁류)가 에르코마이(오다, 이르다)하고, 아네모스(바람)들이 불어, 그것들이 프로스핍토(부딪치다, 엎드리다)하였다, 저 집에서. 그러나 그것이 핍토(넘어지다, 엎드러지다)하지 않는다, 세밀리오오(세우다, 기초를 놓다 / 과거완료, 수동태)되어졌기 때문이다, 페트라(반석) 위에.
브로케, 포나모스, 아네모스
그것들이 저 집에 부딪치되,
그것이 넘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석 위에 기초를 놓았기 때문이다.
26 그리고 모든 자는, 나의 이 로고스(말씀)을 아쿠오(듣다)하고, 포이에오(만들다, 행하다)하지 않는 자들은, 호모이오오(비교하다, ~과 같다 / 미수직)될 것이다, 모로스(어리석은, 미련한, 멍청한)한 자와, 오이코도메오(짓다, 세우다, 강하게 하다)한 사람, 그 집을, 암모스(모래) 위에,
나의 이 말씀을 듣고 만들지 않는 자 = 그 집을 모래 위에 세운 멍청한 자
27 브로케(비)가 내리고, 포나모스(창수)가 에르코마이(오다)하고, 아네모스(바람)이 프네오(불다)하여, 그것들이 프로스핍토(부딪치다)하였다, 그 집에, 그리고 그것이 핍토(넘어지다)한다, 그리고 그 프로시스(무너짐, 패함)이 메가스(위대한, 큰, 커다란)하다.
브로케, 포나모스, 아네모스
그것들이 저 집에 부딪치고,
그것이 넘어진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심하다.
개요
15-27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주석
구약성경의 신약성경 사용에 대한 해설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배경(7:15-20)에 대해서는 특히 신 13:1-5, 18:20-22를 참고하십시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는 탄식(7:22)는 렘 14:14, 27:15와 같은의 언어를 암시합니다. 예수님의 추방하는 대답(7:23)은 시 6:9 LXX(6:8 ET)를 암시할 수 있습니다: "불법의 일꾼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데이비스와 앨리슨 1988-1997: 1:719).
TNTC
16-18. 이 거짓 가르침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어떤 시험이 필요합니다(요일 4:1-3 참조). 여기서 예수님은 교리적인 시험이 아니라 윤리적 시험을 제시합니다.
이 이미지는 아마도 이사야 5:1-7에 나오는 하나님의 포도원의 나쁜 열매에서 유래한 것 같습니다(렘 2:21 참조).
사람이 진정으로 어떤 사람인지는 필연적으로 그의 삶의 방식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존 코슨의 애플리케이션 해설
초대 교회에 유포된 디다케( )라는 글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스테이크 저녁 식사와 새 옷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면 즉시 거짓 선지자로 낙인 찍혀야했습니다. 자신의 필요에 대해 설교하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우리는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열매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열매 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결점과 단점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요, 문제는 완벽함이 아니라 결실입니다. 잎은 많지만 열매가 없는 나무는 잘려서 불에 던져질때 가혹한 처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듣는다. = 겸손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절대적 권위”를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은 옳지 않고, 그리스도가 옳다.
나는 틀렸고, 하나님이 옳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선한 ‘열매’를 만드는 사람이다.
이 늑대와 거짓 나무들 중 이 예수님께 와서 "하지만 주님, 우리가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귀신을 쫓아내지 않았습니까?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늑대들, 이 거짓 지도자들, 이 가짜 나무들이어떻게 이런 일을 할수 있었을까요? 가짜라면 어떻게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할 수 있었을까요?"라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세 가지 가능한 대답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단지 그런 일을 할 생각을했거나 그렇게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둘째, 그들이 마귀의 권능으로 이런 일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마술사 시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기적을 행했지만성령의 능력은 아니었습니다. 모세 시대에 파라오의 마술사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어느 정도 모방했지만 그것은 마귀의 권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셋째, 주님은 단순히 그들을 사용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발람이 주님과 맞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발람을 사용하셨습니다. 사울 왕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멀어져 있었음에도 사울 왕을 통해 예언하셨습니다. 가야바는 알지 못했지만 대제사장 가야바를 통해 "한 사람이 나라를 위해 죽지 않아야 하는가?"라고 예언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 우리가 예언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주목하세요. 항상 사역에서 자신을 홍보하는 사람들을 경계합니다. 예수님께서 겸손과 비밀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사역자들이 " 우리가 하는 일을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종소리가 울리고 제 마음속에 적신호가 켜집니다.
자기 자신을 홍보하는 사람을 주의하라.
다음은 집을 짓는 두 남자의 친숙한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 모두me 자재를사용했습니다.둘 다 같은 지리적 위치에 집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한 남자의 집은 서 있었고 다른 남자의 집은 무너졌습니다. 차이점은 기초에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위 위에, 다른 하나는 모래 위에 세워졌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여름에 모든 땅이 메말라 모래가 많고 불안정한 지역도 바위처럼 단단해 보입니다. 진정한 시험은 비가 내릴 때까지 오지 않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듣고도 행하지 않는다 = 말씀이 육신의 귀에는 들어왔지만, “그 심정”에는 들어오지 않은 사람이다.
성경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는 듣는 것을 행하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실천에 옮깁니다. 그리고 그의 집은 폭풍이 올 때 서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분은 넓은 길은 위험하다고 가르치시며 다음과 같은 냉정한 권면으로 설교를 마무리하셨습니다: "올바른 길과 잘못된 길 사이에는 반드시 선택이 있습니다."
두 개의 문이 있습니다.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고 넓은 문은 저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선택을 해야 하며, 잘못된 선택은 영생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두 개의 나무가 있습니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궁금하다면 그 열매를 확인하세요.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속임수를 조심하세요.
두 가지 기초가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어리석은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습니다. 잘못된 선택은파멸로 이어질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ESVEC Mt-Lk
7:15-20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참 선지자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 을 묘사하고 평가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반항적인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명확하게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에게 "우리에게 옳은 것을 예언하지 말고, 우리에게 부드러운 것을 말하고, 환상을 예언하고, 길을 떠나고, 길에서 돌이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에 대해 다시는 듣지 않게 하라"(사 30:10-11)고 말했습니다. 역대하 18:1-27은 거짓 선지자들이 자신이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그래픽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합니다(딤후 4:3). 그들은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 평화'라고 말합니다"(렘 8:11). 오늘날, 그들은 진실을 왜곡하는 번영을 선언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겉모습과 소리는 좋지만 "이리"입니다(마 7:15). "굶주린"은 하팍스 를 번역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사기를 치거나 갈취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속임수를 통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너희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아볼 것이다"(마 7:16a, 20)라고 두 번 말씀하십니다. 두 번 모두 예수님은 강조하기 위해 "열매"를 먼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몇 가지 비유를 통해 요점을 확장하십니다. 처음 두 번은 사람들이 한 식물을 다른 식물과 잠시 혼동한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적절한 식별이 이루어지면 아무도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따거나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7:16b).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열매입니다. 나무는 그 본성에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y는 그렇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무 또는 사람을 식별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반드시 쉽거나 빠르지는 않습니다."
좋은 열매는 좋은 나무에서 맺히지만 병든 나무는 썩은 열매를 맺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한동안은 멀리서 속일 수 있지만 결국 그들의 열매는 그들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현명한 나무꾼은 병든 나무를 베어 불태웁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짓 선지자들을 처형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약에서 이단에 대한 처벌은 처형이 아니라 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지도자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에 대한 형벌은 죽음이 아니라 소통의 단절입니다(딛 3:10). 교회는 현세적인 권위가 아니라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거룩하지만 국경이 없는 나라입니다(벧전 2:9-10). 그 무기는 육체가 아닌 영적인 것입니다(엡 6:10-20).
7:21-23 세 번째 이미지는 두 번째 이미지의 자격을 부여합니다. 좋은 나무는 열매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비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예언하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강력한 일"( 22절, 다이나미스는 일반적으로 기적을 의미함)을 행할 수 있지만 아버지의 뜻은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그를 알지도 못하고 그에게 알려지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유다는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지만 예수님은 그를 "멸망의 아들"(또는 "멸망의 아들", 요한복음 17:12 KJV)이라고 부르십니다.
마태복음 7:16-20에서 선한 열매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면, 7:21-23에서는 선한 열매를 올바르게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행위가 진정으로 선하려면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법과 가치)에 부합해야 하고, 올바른 동기(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를 가져야 하며, 올바른 목표(하나님의 영광과 창조 세계의 선)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 출발점은 믿음입니다.
비극적으로도 "많은 사람"이 신앙고백과 주목할 만한 행위의 명단에 대한 거짓 확신을 가지고 "그날"에 올 것입니다. "그 날"은 사실상 마지막 날, 심판의 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종말을 뜻하는용어입니다(참조: 마 24:22; 눅 10:12; 딤후 4:8; 사 24: 21; 25:9; 26:1; 27:1). 많은 사람이 "주여, 주여,"라고 말하겠지만,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좋은 열매"를 요구하신 다음신앙고백이나 위대한 행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요점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믿음이 없어도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고 놀라운 종교 활동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나 사랑 없이도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그분의 이름으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필수적입니다. 바울은 "믿음에서 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죄"라고 경고합니다(롬 14:23). 존 프레임이 말했듯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 진정으로 믿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자신이 인류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위선을 아시기 때문에(9:4; 12:25; 22:18; 23:13-33) 모든 사람을 공의롭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는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악한 자들을 그의 왕국에서 제거할 것이며(13:41), "각 사람이 행한 대로"(16:27) 보상할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그는 모든 육체를 소환하여 "안녕"의 영광스러운 보좌 앞에 서게 할 것입니다(19:28, 25:31). 거기서 그는 영원한 복과 화를 선포할 것입니다. 악인에 대한 심판이 시작되고 예수님께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실 때라는 판결문은 악인에 대한 형벌의 본질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으로부터의 분리임을 요약합니다(7:23; 25:34, 41).
7:24-27 마지막 비유는 대조를 제시하는 동시에 결단을 촉구합니다. 두 종류의 기초가 있고, 두 종류의 건축업자가 모래와 바위라는 서로 다른 기초 위에 집을 짓습니다. 건조한 날씨에는 둘 다 견고해 보이지만 큰 비와 바람, 급류가 오면 기초의 품질이 드러납니다. 바위 위에 지어진 집( )은 서 있지만 모래 위에 지어진 집은 큰 충돌로 무너질 것입니다.
헬라어 어순이 주목할 만합니다: "내 말, 이 말을 듣고 행하는 모든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습니다.126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독특한 의미로 그분을 듣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그분의 마음과 성품과 행동을 완벽하게 표현합니다.127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분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것을 정확히 알고, 알고,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특히 예수님의 정체성과 성품을 고려할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난공불락의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 24절).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며, 시험에 무너지는 것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청중들에게o 올바른 기초를 선택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7:28-29 27절은 산상수훈을 완성합니다. 마태복음의 각 가르침 블록( 5-7장, 10장, 13장, 18장, 24장-25장)의 끝은 거의 같은 방식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예수께서 [다] 마치시고 ..."
7:13-27은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두에게 알려줍니다. 예, 그는 어려운 길을 제시하지만 그것을 취하는 것이 옳습니다( 13-14절 ). 진정한 제자도는 그 일의 활력을 보여줍니다( 15-20절). 선행은 구원의 결과이자 증거입니다. 행위는 구원할 수 없지만, 살아있는 믿음은 반드시 작용합니다.
21~23절은 종교적으로 활동적인 사람들에게는 냉정합니다. 예수님은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하셨으며,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10:7-8). 그러나l 그렇게 하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종교 활동에도 불구하고 무법자가 될 수 있습니다."믿음이나 사랑이 없는 '종교'는 부, 관능, 권력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위험합니다(계 11:8, 13:1-18). 교만하고 사랑이 없고 믿음이 없는 교회 활동은 하나님과 분리됩니다. 따라서 종교인들은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예수님에 의해 알려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설교 말미에 예수님은 마태가 독자들에게 전한 일련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문으로 들어갔습니까?어떤 길로 가십니까? 당신은 어떤 열매를 맺습니까? 당신은 어떤 나무입니까? 당신은 진심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십니까? 여러분의 종교 활동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에 대한 지식에 의해 주도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반석 위에 집을 지으셨나요? 마태복음 7장 24절은 이 반석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이 반석 또는 반석이시며 언약 백성을 위한 피난처라고 말합니다(시 31:2-3; 42:9; 62:1-7; 78:35; 92:15; 94:22; 95:1 등).
베이커 일러스트 성경 배경 해설
잘려서 불 속에 던져집니다(7:19). 나쁜 열매를 맺어 잘려 불에 타는 나무(또는 포도나무)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일반적인 예언적 이미지였습니다(사 5:1-6, M참고 3:10).
반석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7:24). 오늘날과 달리 집을 짓기 전에 기초가 있어야 했습니다. 아랫 갈릴리 땅의 대부분은 현무암으로 된 커다란 암반()이 지표 바로 아래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마 13:5) 전형적인 원룸형 집을 지을 수 있는 완벽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은 통념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곳, 즉 모래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예수님은 "바위 같은" 산에서 설교를 하시면서 청중들에게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근본적인 가르침(지혜)을 바탕으로 삶을 세우라고 권유하셨습니다.
그는 그들의 서기관이 아니라 권위를 가진 사람처럼 그들을가르치고 있었습니다 (7:29). 미슈나(2세기 랍비들의 400년 이상의 가르침을 모은 책)를 보면 랍비들이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알 수 있는데, 대부분의 가르침은 이전 랍비들이 성경에 대해 가르친 내용을 전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랍비들의 말을 단 한 번도 인용하지 않으셨습니다(랍비 학생으로서 율법을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마치 자신의 가르침이 그 자체로 권위 있는 것처럼 군중들에게 성경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 말씀하셨습니다.
The Timothy Keller Sermon Archive
주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 영역을 제시합니다. 13, 14, 15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에는 하나님께로 가는 다양한 길이 제시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주장을 하며 이것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고, 이것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는 참과 거짓을 분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들이 모두 진실은 아닙니다.
일반인이 참된 종교적 스승과 거짓 종교적 스승이 있다는 것을 알기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매우 생생한 예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영적 스승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자신들이 양이고 다정하고 친절하며 오직 자신들에게만 관심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 속에는 추종자들을 이용하고 조종하려는 늑대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대부분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날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마지막 날, 심판의 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내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라.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할 것입니다."나는 당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악한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그런 다음 그는 비유를 들려줍니다. 바위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 있었는데 비가 오고 시냇물이 솟아나자 그 집은 견고해졌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었는데 비가 오고 시냇물이 솟아오르고 바람이 불면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무엇을 말씀하시나요? 예수님은 여기 두 사람, 두 집이 있는데, 육안으로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지만 그 밑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기초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며 같은 교회에 나란히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그 중 일부는 전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가 읽고있는 내용을 알고 있다면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튀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첫째, 이 구절은 진정한 크리스천과 그렇지 않은 크리스천이 공유하는 세 가지 특성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그것을 공유합니다. 그 세 가지 특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선, 교리의 정통성입니다. 이들은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 다가와 그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제 그리스어로 그들이 그를 부르는 것은 키리오스입니다.
두 번째 특성은 감정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냥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주님"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제가 자주 지적하듯이 성경을 읽다 보면 셈어에서 감정의 강도를 표현하고 싶을 때마다 이름을 두 번 말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마르다, 이리 와"라고 말할 때는 "마르다"라고 말하지만, 열정을 담아 말하고 싶을 때는 "마르다, 마르다"라고 말하죠.
다윗이 아들 압살롬을 슬퍼할 때 "압살롬, 압살롬. 내 아들, 내 아들." 감정의 강렬함입니다. 그냥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주님"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단순히 교리적으로 정통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관여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흥분합니다. 예배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은 정말로 참여합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이든 그렇지 않은 크리스천이든 이 모든 사람들의 세 번째 공통점은 봉사에 적극적이라는 점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들은 "주님, 주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정통적이고 감정적으로 참여합니다. "...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부인하지 않으시고 "거짓말쟁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랬겠죠! 그들은 (예언하는) 말씀의 교사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고쳤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나는 너에 대해 몰랐다"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놀라지 않으십니다. "너는 누구냐?"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여기 있는 명단에도 없는데?"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다. 그는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라고 말합니다. ' 안다 '는 말은 "당신과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는 그들에게 "당신들은 변절한 기독교인인가 보군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당신을 전혀 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논리를 보세요. 정통 교리, 감정적 참여 또는 깊은 사역에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요! 사실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거부당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특성이기도 합니다.
논리를 이렇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세 가지 특성이 없다는 것은 당신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만, 이 세 가지 특성이 있다고 해서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이 세 가지 특성이 없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있지만, 이 세 가지 특성이 있다고 해서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이 세 가지 특성은 비신앙인들과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지표가 있나요?" 사실, 본문을 보면 두 가지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두 가지를 살펴봄으로써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그것은 주권 문제와 은혜 문제입니다.
주권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매우 예리한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적으로 자극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고 정서적으로 만족스러운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구속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당신의 삶에 하나님이 있다면, 당신은 자신의 의지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실제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과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교리에 정통하고 감정적으로 관여하며 봉사에 깊이 관여하는 사람이지만 결코 자신의 의지를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표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지를 포기합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기독교의 표징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해입니다. 두 집을 보십시오. 두 집은 모두 지어졌지만 똑같이 생겼습니다. 이 비유에서 그 집들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아십니까? 이 비유는 "주님, 주님, 우리가 이 모든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한 사람들 바로 뒤에 나옵니다. 정통 교리. 봉사. 가르침. 사역.
다시 말해,이 두 사람은 모든 도덕적 노력과 모든 종교 활동 (그것이 집이 나타내는 것)을 취하고 있지만, 두 사람의 차이점은 한 집은 전체 집을 반석 인 예수 그리스도 위에 기초하고 다른 집은 모래 위에 있다는 것
나는 이렇게 선한 일을 했으니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셔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기초, 순종, 도덕적 노력, 종교 활동이 그 자체로 기초가 되기 때문에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나요? 이것이 여러분이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올라가서 "주님, 주님, 우리를 왕국에 들여보내 주세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룬 업적을 보세요!"
그날 당신이 다가와서 "내가 이룬 업적을 보세요. 왜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세 가지 생활 방식
구세주와 스승-마태복음 연구-2012년 6월 24일
마태복음 7:13-27
이것은 헬라어로 쓰여졌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키리오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군주라는 뜻이지만, 그 문화권에서 카이사르가 군주라는 뜻의 카이저 키리오스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단어는 매우 부담스러운 단어였습니다. 군주라는 단어인 키리오스에는 신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카이사르는 주님이다"가 아니라 "그리스도는 주님이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당신은 교리가 옳습니다. 당신은 저에 대해 흥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교회에 있습니다. 당신은 사역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지만 당신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나와 구원 관계가 없습니다. 저와 진정한 영적 관계는 없습니다. 그런 적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오, 잠깐만요. 이 말이 무섭나요? 이것은 우리의 심장을 겨누는 화살입니다.
이 사람들은 성경에서 영적 은사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예언을 합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사울 왕도 성령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유다도 성령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유다는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귀신을 쫓아내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영적인 열매가 없습니다.
영적 은사는 여러분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영적 열매는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영적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자제력, 겸손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성장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내면이 그렇게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이 실제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