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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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에서 변증으로 (우리교회)
너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묻는 모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베드로전서 3:15](%20)
### INTRO
여러분은 ‘변명’ 이라는 단어를 보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아마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변명에는 플라톤이 저술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있겠죠, 그리고 만약 저와 같은 세대이거나 저보다 나이가 많은신 어른들께서는 실미도 영화가 생각나실 수도 있을겁니다. 안성기와 설경구가 만들어낸 명작의 한 대사죠 ‘비겁한 변명이십니다!’
그런데 가만히 가만히 생각해보면, 안성기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변명을 합니다. 그것이 사적인 일이던 공적인 일이던, 크던지 작던지 간에 말입니다. 친구와의 약속 시간에 늦었을 때, 실수로 남의 물건을 망가뜨렸을 때, 귀찮다고 빨래를 뒤집어서 세탁기에 넣었을 때 우리는 자신을 와이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것이 설령 약간의 과장과 거짓이 들어갔을 지라도, 변명 하고싶은 욕구에 빠지곤 합니다.
물론 변명은 핑계와 구실 뿐만 아니라 사실도 포함합니다. 실제로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변명이라는 단어는 한국말처럼 핑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어 ‘아폴로기아’ 영어로 번역하면 Defense 즉, 방어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방어하는 말 이라는 뜻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도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변호하기 위해 쓴 책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한국말은 다릅니다. 우리말의 변명에는 비겁함, 구차함, 거짓말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오죽하면 속담에 이런 말도 있습니다. ‘도둑질을 하다 들켜도 변명을 한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과연 남자 없이 낳았을까요? 이게 얼마나 뻔뻔하고 무책임한 변명입니까?
그러나 변명과 달리 변증은 그 의미와 뉘앙스가 전혀 다릅니다. 변증은 어떤 일이나 사건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거나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증의 대상은 나를 변호하는 것에서 다른 사람이나 어떠한 사건을 변호하는 것으로 더 확장됩니다.
### Need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답’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묻는 모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가 바로 Apologia 즉 변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복음의 변증자로 부르심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현실에서의 우리는 삶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변명하기 바쁘다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가리기에 급급하고 성도들은 자신의 삶에 떳떳하지 못합니다. 성경을 알지만 지키지 않습니다. 명령을 듣지만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다들 나름대로의 구실을 찾으며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결국 변명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오늘날의 기독교가, 복음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힘을 잃어버린 이유입니다. 우리의 불성실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 Transition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에 대하여 변명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증하는 사람입니까?
### Background
오늘 함께 본 베드로전서, 이 편지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로마의 박해로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는 로마 사람들과 같지 않다! 그들과 다르다. 너희의 정체성을 찾으라’ 이렇게 권면하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믿음으로, 그리고 그것을 소망함으로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틀 안에서 로마 전역에 흩어져서 고통받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명을 다하며 살 수 있는지를, 오늘 같이 읽은 본문 베드로전서 3:15절, 변증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 1. 입술로 변증하는 삶
- Exegesis
저는 오늘 제 실패를 통해서 이 본문을 같이 살펴보고 싶은데요, 혹시 여러분은 주변에 복음을 설명하거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변증 해본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학창 시절, 주변에 믿지 않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하긴 했지만 삶은 그들과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일이 잘 안풀리면 항상 저에게 곤란한 질문을 했습니다. ‘성민아, 예수님이 좀 안도와주니? 기도좀 해봐!’ 밥을 먹을때도, 공부를 할 때도, 여행을 갈 때도, 축구를 할 때도! 뭔가 잘 안풀리면 ‘아 오늘은 성민이가 기도 안했나봐’ 하면서 저를 놀리고 비아냥 거렸습니다.
거기서 끝나면 다행이지만 신학자들도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던지곤 했습니다. 진화론과 공룡부터 시작해서 인류 고통의 문제와 종말까지 저를 공격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 질문의 바탕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음과 기독교에 대한 불신이 섞여 있었겠지요.
그런데 제가 잘 대답했을까요? 변증에 성공했을까요? 아니오 저는 실패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제가 변증에 실패한 이유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 “너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저는 그리스도의 주인되심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주인 되신다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를 포함하는데 가장 먼저는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만드신 창조주이자 전능하신 하나님 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모든 권한과 권리가 내 것이 아니라 그분께 있다는 것을 내 마음과 입술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의 베드로를 향한 사랑, 나사로를 향한 연민, 성전의 상인들에 대한 거룩한 분노, 슬픔 등을 볼때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 분노, 슬픔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인간이셨지만 또한 죄가 없으신 완전하신 하나님 이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이 우리를 심판하실 주권자 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어긴것을 두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스스로를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 말은 안식일을 준 자가 누구냐! 율법을 가르쳐 준 자가 누구냐! 내가 아니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율법을 뛰어넘는 권세가 바로 예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참으로 심판의 주인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제로 예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주인이시요 심판의 주인이시요, 안식일과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요, 우리 가정과 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믿으십니까?
네 이것은 정말로 믿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내 마음에 주인으로 삼고 있는지 우리는 늘 말씀이라는 거울을 통해 확인해봐야 합니다.그러나 제게는 그리스도의 주인되시는 그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거룩: “거룩하게 하고”**
두번째, 저는 거룩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합니다. 거룩하게 하라는 것은 구별되다, 분리되다, 깨끗하다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저는 세가지 단어의 의미가 다 들어가는것 같습니다. 더러움, 즉 죄와 분리되어 깨끗하게 구별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이 세상의 사람들과는 뚜렷하게 대비되는 모습과 마음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미 베드로는 1장에서 하나님 자녀로서의 정체성과 거룩함을 강조합니다. 1장 16절 17절을 보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외모로 보지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그러니까 우리가 복음을 올바로 변증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과 거룩하게 구별된 모습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 존 찰스 라일은 거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거룩은 단지 내적인 감동이나 신체적 흥분을 경험하고 눈물을 흘리거나 탄식하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어떤 설교자 혹은 종교단체에 뜨거운 애착을 느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변화하는 것입니다. 거룩은 우리의 성품과 습관과 일상의 행동을 통해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이처럼 거룩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만, 골방에서만 자기 혼자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찬송한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하루하루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화되는 삶을 살아 갈 때에 깨끗하고 구별된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제게는 거룩함, 구별됨이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하는대로 세상의 유익을 좇아 살았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소망: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묻는 모두에게)**
마지막으로 소망에 관한 이유에 대하여 제가 몰랐기 때문에 변증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아니,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것? 이직해서 연봉을 더 많이 받는것? 좋은 집을 사서 행복한 노후를 누리는것? 혹은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 과연 그것이 여러분의 소망이며 정말 그것으로 충분 하십니까?
베드로전서 1장 3절에서 베드로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1:3절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바로 새 생명! 부활인 것입니다.
산 소망! 영어로는 Living Hope 그러니까 이것은 살아있는 소망인 것입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안에 사시는 것! 죽어도 영원히 다시 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며 이 세대와 모든 세대에 필요한 소망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집이, 좋은 대학이, 많은 돈과 건강이 결코 죽음과 영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 당시 로마의 박해로 인해 산으로 들로 땅굴로 도망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는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지라! 오직 살아있는 소망! 예수 그리스도만이 희망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에 소망을 품지 말고 ‘그리스도의 소망을 가지라!’ 그 소망을 변증하라고 말입니다.
생명과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복음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을 변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이 소망 때문에 절망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치고 고통 가운데서도 희망이 샘솟기 때문입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악한 이 세상에 오직 소망은 예수님 한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말에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할 말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고전 2:13)
그러나 저에게는 그러한 소망이 없었고 능력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하나님을 변증하는것에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 Transition
여기있는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인정하며, 거룩하며, 우리의 소망을 지식으로, 입술로 변증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나그네, 변증하는 삶: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그러나 입술로 하는 변증 외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더 강력한 복음의 변증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행동입니다.
우리는 간혹 말보다 행동이 더 강력한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압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말없이 꼬옥 안아줄 때 더 사랑을 느끼기도 하구요. 매일 말로만 하겠다고 하는 남편이나 아이들이 갑자기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더 감동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말로 뭐라고 하든지 진실을 보여주는 건 행동일 뿐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착하고 남을 돕는 일에 앞장 선다고 떠들어 대도 지하철역 노숙자에게 천원짜리 한장 건네준적 없다면 그의 주장은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 이시며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너를 사랑하신다고 교회에서 백번 천번 떠들어봤자 우리가 세상에 말하지 않고 삶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니가 그렇게 사랑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야? 너에게는 어떤 소망이 있길래 그렇게 빛이나니?’ 라고 질문받아야 전도든 변증이든 뭐라도 시작될텐데..! 많은 경우 우리는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쳤어요?’ 라고 듣는것이 태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행동으로 복음을 변증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대표적인 변증자로 아브라함을 꼽습니다.
창세기 23장 1-20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무덤을 사기 위해 가나안 땅의 헷 족속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대화 내용을 살펴보면 아브라함과 헷 족속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달랐던것 같습니다. 4절에 아브라함은 자신을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헷 족속을 같은 무리로 생각하지 않은것이죠. 그러나 반대로 헷 족속은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공동체, 즉 같은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6절에 말하길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 이기 때문에 공짜로 그 땅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또 7절을보면 갑자기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절을 합니다. 그냥 거래하는 상황인데 갑자기 절을 한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대화 도중 그렇게 두번이나 상대방에게 절을 합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의 내용인 ‘온유와 두려움’ 으로 아브라함이 이방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여줍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태도는 하나님을 변증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전권 대리인이며 그 영광의 형상을 담은 이미지 전달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작은 행동조차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있음을 알았던 아브라함은 온유와 겸손과 두려움의 태도로 그들을 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무료로 땅을 주겠다는 헷 족속 에브론의 호의를 기어코 거절하고 사라의 매장지를 은 사백 세겔에 주고 사게됩니다.
놀라운 것은 히브리서가 이 이야기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소개할때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3-14절에 이르기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아브라함은 자신이 헷 족속과 같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나그네라고 소개했습니다. 어둠의 자녀가 아니라 빛의 자녀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별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가 그들에게 속하여 공짜로 가나안 땅을 얻었더라면 그는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진짜 소망이 무엇인지 보여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산 소망이 있음을, 태도를 통하여, 매장지를 구입함으로 그가 묻힐 곳은 썩어 없어질 가나안 땅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인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저자 베드로 또한 2장 11절에서 나그네 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우리가 어떤 태도와 행동으로 하나님을 변증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아멘
### Application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하나님께 참 감사하면서도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부족한 나를 복음의 변증자로 불러 주셨는데, 이 길은 정말 어렵고 좁으며 아직도 내가 가야할 길이 멀기만 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제 부족함을 많이 느꼈기 때문에 죄송했습니다.
또 한편으로 감사했던것은 그래도 내가 조금씩 예수님을 증거하며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세상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지만 아직 연락하는 몇몇 믿지않는 친구들은 가끔씩 묻습니다. ‘너 어떻게 그런 삶을 사니?’ 라고 제 삶에대해 궁굼해하는 것입니다. 예전의 제 친구들이었다면, ‘너 왜 그러고 사냐?’ 이렇게 뉘앙스는 완전히 달랐을 것입니다.
친구들이 정말로 궁굼한것은 이것입니다. 너는 어떻게 가진것이 없어도, 백이 없어도, 앞길이 막막해도, 그렇게 행복하고 만족하며 사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학업을 중단하고 시베리아로 선교를 가고 매일 취업 준비해도 모자를 시기에 아프리카로 1년 씩이나 고생하러 떠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잘 다니던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집안도 변변치 않는놈이 그 비싸다는 미국 유학을 선택 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투자 가치가 없는 신학을 하러 말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제 소망이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 아니라 하늘 나라, 우리의 본향! 곧 아버지 집에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선택 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오늘 세 가지만 도전할까 합니다.
첫째, 말씀으로 돌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거룩하게 구별되어 우리의 산 소망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앞에 자신과 이 세상을 비추어 보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입술로 변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알고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회복하십시오. 우리의 정체성을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두고 온유와 두려움으로 내 행동에 변명하는 삶이 아니라 복음을 변증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아브라함 처럼 말입니다. 그 정체성이 행동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에 잠기세요. 그분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날마다 구하며 감사하며 사는 것이 바로 은혜에 잠기는 방법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쓴 베드로를 생각해보세요. 사실 베드로는 복음에 대하여 변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거짓말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는 예수님이 계신 회당 주의를 서성이다가 예수님의 한패가 아니냐는 질문에 저주하며 맹세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 이렇게 세 번이나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베드로를 만났을 때, 예수님은 꾸짖지 않으시고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 이런양을 먹이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여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만약 여러분이 베드로였다면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저였다면, ‘아 예수님 진짜 죄송해요..근데 그때는 저만이라도 살았어야 됐잖아요.. 그래서 어떻게든 주님을 탈옥시키거나, 다시 소송하던가 어떤 전략이 필요했잖아요! 그래서 그랬어요.
그러나 베드로는 변명했었나요? 아니요.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왜 변명하지 않았을까요? 거짓말까지 했던 베드로인데, 왜 주님이 내가 사랑하는 것을 아신다고 고백했을까요?
왜냐하면 베드로는 주님의 용서와 사랑의 은혜에 깊이 잠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잡히시던날,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것을 알고도 연약한 베드로를 사도로, 친구로 부르셨어요. 그렇게 여러분과 저도 부르셨어요. 믿으십니까?
은혜에 잠긴 사람은 변명하지 않습니다. 죄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조롱하여 넘어뜨려도! 다시 일어나서 나아갑니다. 일곱번 넘어질 지라도 일흔 일곱번 일어나는 것입니다. 베드로 처럼요! 그 후에 베드로의 행보와 이 말씀을 보세요. 예수님을 부인하던 베드로는 어디 갔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그분의 은혜에 깊이 잠기십시오.
### Outro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본성적으로, 태어난 그 순간 변명하는 존재들입니다. 세계 최초의 변명자가 누구일까요? 맞습니다.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은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어놓고 이렇게 변명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 여자가 주어서 먹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이 여자 때문에 내가 먹은 거잖아요! 하나님이 안주셨으면 안먹었을텐데!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하는 변명이었습니다. 또 하와는 어떻게 변명했나요? ‘뱀이 나를 꾀어서 내가 먹었나이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만드시고 짝을 지어주신 하나님께 대한 정말 비겁한 변명이 아닐 수 없으면서도, 또 우리는 아담에게서, 하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끔찍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원죄로부터 비롯된 우리의 악하고 죄악된 본성 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억울해도,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잘못 때문에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 때에도 변명하지 않은 분이 계십니다. 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짊어 지심으로 우리에게 속한 불의와 사망의 권세를 모두 깨뜨렸음을 선포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아무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싸워야 합니다. 죄와 변명과 세상의 정체성으로부터 우리의 정체성, 나그네, 본향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저 천국에서 우리의 소망되신 예수님을 만나뵈었을 때 우리의 불성실에 대하여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도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이렇게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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