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자(삼하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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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사연조찬모임에서 설교

Notes
Transcript

동역자

아름다운 동역
사무엘하 23:13–17 NKSV
13 수확을 시작할 때에, 블레셋 군대가 르바임 평원에 진을 치니, 삼십인 특별부대 소속인 이 세 용사가 아둘람 동굴로 다윗을 찾아갔다. 14 그 때에 다윗은 산성 요새에 있었고, 블레셋 군대의 진은 베들레헴에 있었다. 15 다윗이 간절하게 소원을 말하였다.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나에게 길어다 주어, 내가 마실 수 있도록 해주겠느냐?” 16 그러자 그 세 용사가 블레셋 진을 뚫고 나가, 베들레헴의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바쳤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길어 온 물을 주님께 부어 드리고 나서, 17 이렇게 말씀드렸다. “주님, 이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시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 그러면서 그는 물을 마시지 않았다. 이 세 용사가 바로 이런 일을 하였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 사울의 추격을 피해 아둘람에 도망하였을 때 일입니다.
이미 블레셋은 베들레헴을 정복했고 르바임 골짜기까지 나와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이 블레셋의 요새로 변해버렸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이 숨어 있던 아둘람에서 20여키로 떨어져 있는 곳이었는데 아둘람과 베들레헴사이에 르바임골짜기가 쭈욱 이어져 있습니다.
베들레헴을 가려면 반드시 이 르바임골짜기를 지나야만 되었습니다.
어느날 다윗은 치열한 전쟁과 도망한 날들을 떠올리며 멀리 아련하게 보이는
자신의 고향땅 베들레헴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베들레헴의 작은 목동으로 있던 다윗이
블레셋의 영웅, 골리앗을 기적같이 무찌른 후에
다윗에게는 참 많은 일들이 갑작스럽게 생긴것입니다.
십수년이 지난 시간동안, 수많은 젊은이들이 동경하던 영웅에서
이제는 도망자의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동시대에 그의 용기와 절개, 신앙을 흠모하던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가는 곳마다 다윗의 용기와 신앙에 도전받은 젊은 실력자들이 수많은 고생을 무릎쓰고 그에게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지금 다윗의 등에는 그를 따르는 세상에서 가장 용기있고, 실력있는
무장된 삼십명의 장수가 그를 지키고 서 있습니다.
그 중에 요셉밧세벳이라는 장수는 단번에 800명을 쳐 죽인 대단한 장수와
엘르아살이라는 장수는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이 두려워 후퇴했는데도
손에 들린 칼이 지쳐서 떨어질까봐 손에 칼을 묶은채로 홀로 블래셋을 무찌른 장수였고
삼마라는 장수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곡식을 약탈하기 위해 곡식밭에 쳐들어왔을 때 혼자 떡 버틴채로 블래셋을 무찌른 장수도 있었습니다.
블레셋을 떨게 할 만한 무시무시한 장수들을 등에지고
다윗의 어린시절 추억이 가득한 저 먼 베들레헴을 바라다봅니다.
어쩌면 다윗은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 지긋지긋한 도망자의 생활도, 전쟁도 다 버리고
내 고향 베들레헴에서 평화롭게 양들을 키우며 살아가고 싶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그런 생각에 잠시 잠기면서 베들레헴을 바라보며
“아 저 베들레헴 성문 옆에 있는 우물물이 마시고 싶구나, 누가 저 물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하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이 구절에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다윗은 그 우물물이 마시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워서 혼자 중얼거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장수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있더니, 보고받기를
다윗장군이 베들레헴의 우물물이 먹고싶다하여 그 물을 가지러 세명의 장수가
블레셋적군이 가득 진치고 있는 르바임 골짜기를 뚫고 지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다윗이 그 소식을 듣고, “아차” 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이미 세명의 장수는 폭풍같이 르바임골짜기의 블레셋을 뚫고 베들레헴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헌신 해 준 동료들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추억에 잠겨 내 뱉은 말 한마디에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으로 달려간 장수들을 향한 걱정으로 잠시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후 다시 자신의 군대가 웅성이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살아서 돌아 온 것입니다. 수많은 블레셋 적군을 뚫고 세명이 살아서 돌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손에 다윗이 그리워했던 우물물이 들려져 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 우물물이 하나도 반갑지가 않았습니다.
살아서 돌아온 그 장수들이 더욱 반가웠습니다.
다윗은 그 우물물을 받아들고,
생명과 바꾼 이 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재단의 피로 여기며,
제사드릴 때 포도주를 담는데 사용하는 그릇에다 부어 드립니다.
다윗이 고백하기를
“하나님, 나를 위해 절대로 이 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 물은 목숨을 걸고 가지고 온 장수들의 피입니다. 어찌 제가 이 물을 마실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 받아 주세요”
다윗은 그 세 장수를 끌어안으며, 잠깐 자신이 나약해졌고, 포기할 뻔 했던 마음을 버리고
다시 힘을 내서 그들과 함께 다짐했던 목적을 이루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우물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다윗공동체를 다시 가슴뛰게 만드는 거룩한 피가 된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이렇게 귀한 동역자들이 곁에 있었습니다.
동역자는 “함께 일하는 자”, “함께 땀을 흘리며 수고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사도바울이 이 표현을 참 많이 사용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자신의 사역을 돕는 성도들을 향해서
고린도전서 3:9“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에서,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최고의 동역자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였습니다.
로마서 16:3–4“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4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해 준 사람들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 목숨도 내어 놓고 함께 동역을 했다고 합니다.
다윗에게 있었던 세명의 장수처럼 말이죠.
이제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동역자는 어떤 사람인가의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동역은
우리의 왕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소원에 이처럼 민감하고도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땅을 향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어지고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동역자로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동역자 이전에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고전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하나님께서 창 1:26에서 이 땅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라고 하심으로 우리는 그분의 사역을 돕는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축복하실 때도 복을 받는 자라고 하지 않고 복의 근원되게 하시고,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얻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축복 사역의 동역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의 근원적 사명은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그 동역을 위해 오늘 우리는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 본질의 사명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소명에 동역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동역의 키워드는 하나님 나라 본질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제 교회학교 수련회가 다가옵니다. 이 수련회를 위해 어떻게 동역할까 고민하다가
어떤이는 시간이 안되서 조금의 후원금을 전달하고
어떤이는 아이들을 전도해서 데리고 오고
어떤이는 식당에서 설거지를 돕고
어떤이는 짐을 나르고 청소하는 일에 자원하고
어떤이는 교사로 지원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으로 아이들이 성경학교를 통해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 위해
내가 어떻게라도 보템이 되어야지 생각합니다.
이것은 본질의 사명에 동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식당에서 밥을 하다가 된장국을 해야 될지 소고기국을 해야 될 지를 놓고 싸움이 벌어졌다고 합시다.
주차장에서 로비에 해야 하는지 지하 주차장에 해야하는지를 놓고 싸움이 벌어졌다고 합시다.
논쟁에 본질이 어디에 있습니까?
된장국을 끊여도 되고 미역국을 끓여도 됩니다.
단지 결정할 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면 무엇을 선택하실까. 염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라면 무엇을 선택하실까입니다.
핵심 키를 가지고 있는 분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군사들이 다윗의 작은 읊조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 본질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 교회는 원래 이래왔어 하는 말입니다.
구원사역과 하나님 나라 회복을 위한 본질의 사역과 관계가 없는 것이라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변함없이 개혁하는 교회입니다,
본질빼고 다 바꿔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늘 우리의 과거의 경험과 상처와 습관이 개혁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삼성이 이렇게 성장한 이유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고 하잖아요.
동역을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본질을 공유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본질을 공유하는 방법은 예배와 설교를 통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요구를 이해하는 것이고요
셀모임이나 기도모임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영적인 소통과 육적인 소통을 쉬지 않고 해야 합니다.
교회의 성공은 돈에 있지 않고 사람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맡기신 대 사명을 성도들이 얼마나 공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좌우하게 됩니다.
정재승교수라는 분이 신문 인터뷰 기사에
“전에는 남보다 두 배 정도 똑똑하면 성공할 수 있었지만 이제 시대가 달라졌다.
지금은 다른 사람 백명을 설득할 수 있는 소통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자신이 아는 것을 개방하고 공유하고 남과 협동해야만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시대다“
소통하지 않으면 고통이 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의외로 사역자들이 소통을 안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윗과 충성된 군사들에게는 목적을 함께 공유하는 신뢰의 관계가 바탕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목숨도 아깝지 않았던 것입니다.
삼상 24:4~7에서 사울이 다윗을 쫓다가 엔게디광야에서 볼일을 볼때에 다윗이 죽이지 않고 옷자락만 베어와서 자신의 군사들에게 왜 해하지 않았는지 설득을 합니다.
그 설득의 중심에는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본질은 구원사역을 통한 하나님 나라 회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분명한 대사명을 함께 이해하고 우리의 목적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도 이 대사명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동역한다고 해서 모든 일을 함께하고 좋아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의 사역, 대사명과 상관없는 일일때에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단호하게 “안됩니다”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살아가는 동안 참 많은 동역자들이 그와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다 오늘처럼 이렇게 목숨을 다하며 좋게만 했던 동역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단이라는 선지자는 다윗의 귀한 동역자인데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을 때에 나단은 다윗에게 직고하며 잘못을 늬우치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에게 나단이라는 동역자가 없었다면 그는 더 많은 고난의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이런 다윗과 나단같은 사이가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실록에 실려 있는 이야기인데요.
세종대왕에게 늘 직언을 하고 쓴 소리를 아끼지 않는 신하가 하나 있었는데
그 신하 이름은 “고약해”입니다. 세종대왕도 넌더리를 치는 인물이었는데 오죽하면 “고약하다”라는 어원이 고약해일 것이다라는 민간어원설까지 돌았을 정도입니다,
한 일화로, 그 시대에 육기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육기법은 지방 수령의 임기를 6년으로 하는 것입니다. 세종때 3년이었던 것이 6년으로 바뀐것입니다.
고약해는 이 육기법이 임기가 길어 수령들이 나태하게 되고 비리가 많아지고 탐관오리가 되어 백성들이 고생하니 육기법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세종이 끝까지 임기가 6년이라고 탐관오리가 된다는 것은 맞지 않다고 맞섭니다.
그러자 고약해는
“신이 탐관오리가 누구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신은 어려서 공부를 하며 성군을 만나 세상을 밝히고자 하였는데, 신이 육기법을 몇 번이나 폐하자고 말씀드려도 윤허하지 않으시네요. 정말 유감입니다.
전하께서 성군이 아니신 거니 신이 벼슬을 관둬야겠습니다.
신이 수령 일이 힘들어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폐해를 보았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전하는 신의 간언을 윤허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신이 잘못되었다고 하시니 정말 실망입니다.”
그리고 사표를 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세종은 이 고약해를 끝까지 관직으로 불러 들여 대사헌이라는 자리에 앉힙니다.
세종은 자신에게 늘 직언을 하고 옳지 않은 것에 대해서 끝까지 반대하던 고약해를 절대 버리지 않았습니다. 세종에게 고약해는 이런 고약한 놈이 있나가 아니라 귀한 동역자였던 것이지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과 사역, 봉사에 대해 달콤한 말로 칭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바로 잡기 위해 견책하고 책망하는 사람을 더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다윗은 목숨을 바쳐 충성하는 아름다운 동역자들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헛된 바램으로 목숨을 잃을뻔한 일을 당했습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임을 아는 그들이
목숨걸고 가져온 물을 하나님께 거룩한 동역의 피로 바칩니다.
다윗은 이 일로 사명을 새롭게 하고
다윗공동체를 새롭게 세워가는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대 사명을 붙들고 살아갑시다.
대사명에 함께 붙들린 바 된 동역자가 되어서 오늘 우리 교회가 새롭게 일어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동역자로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흘리게 하셨습니다.
다윗의 군사들이 생명과 바꾼 물이 하나님께 드려진 피의 제사가 되어서
다윗과 영원한 동역관계가 된 것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동역자로 부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는
이 땅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 회복을 위한 일에 생명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