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M. 십이선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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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차
어거스틴 때부터 ‘소선지서’라고 불렀다. 중요도가 작다는 말이라서 올바르진 않다.
어거스틴 전에는 십이선지서라고 불렀다.
각 권이 300년에 걸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쓰였는데, 마치 한 권처럼 통한다.
12권을 한 권처럼 읽을 수 있는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과제
책들의 연결점을 찾아서 설교 준비
두 편을 학기말에 제출
미가는 이사야와 동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다.
앗수르가 힘을 잃고 바벨론이 위용을 떨치기 시작했을 때 활동한 선지자는? 예레미야.
바벨론이 맹주가 되기 전 앗수르가 상당히 강할 때(하나님이 앗수르의 멸망을 예고하시긴 함) 어떻게 언약 백성으로 충실해야 할지를 가르치시는데, 스바냐와 나훔이 그 시대에 있다(이사야와 예레미야 사이).
바벨론의 1차 침략 때 하박국, 중간에 요엘, 3차 침략은 오바댜.
예레미야와 활동 시기가 겹친 선지자들은 나훔, 하박국, 요엘, 오바야 등.
학개, 스가랴는 두번째 성전 지을 때쯤 사역을 시작한다. 페르시아 초기이다.
성전을 짓고 나서 말라기인데, 성전이 거의 버려지다시피 취급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을 유지하는 제사장들에게 말씀하신다.
종말의 교회를 드러내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이 우리가 다니는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이번 소선지서를 통해 바라봐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분석!
교회가 이렇게 된 것은, 계획이 이끌어 주셨다는 것을 궁금해하는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고 답해야 한다.
선지서 설교는 현재 한국 교회가 약속으로 이루어졌음을 성도님들에게 알려 줘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교회가 돼야 하는지 설득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완성하시겠다 생각되는 교회를 우리가 발견해야 한다.
“세상을 부러워하는 성도들”
형편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당신의 백성으로 삼고자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 계획하셔서 이뤄낸 결과….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후손들의 모습이 우리이다.
12권을 1권으로 읽을 때는 어떤 유익이 있는가?
십이선지서(300년)가 쓰인 시기의 사이사이에 이사야도 있고, 예레미야도 있다.
앗수르에서부터 페르시아까지.
교회가 세상에 잠식되던 그 시기.
그 300년의 역사.
이스라엘이 앗수르를 만나기 전에는 중동을 다 지배하는 패권국가에게 위협 받았던 적이 없다.
그 전에는 다 동족 국가들랑 싸웠을 뿐이다(에돔, 암몬, 모압).
앗수르가 처음이었다.
이게 세상에게 위협받는 교회의 모습을 띄는 것이다.
앗수르는 세상이다.
내가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이 계획하신 성도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이 행하신 신실하심이 내게, 우리 교회에 어떻게 우리실지 알면 알 수 있다.
그럼 지적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십이선지서 설교를 하지 않는다. 기회도 적다. 재미도 없다고 생각한다.
선지자들을 좋아해야 한다.
선지자들은 그 시대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예수님도 그렇게 설교하셨다.
힘들면,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핍박 받았던 걸 기억하라고 하신다.
선지자들이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 받았다.
바울이 디모데를 부를 때,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부를 때, 이렇게 불렀다.
신약 시대에도 선지자가 아예 없진 않았다.
목사, 교사 등…
이 목회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신약 교회 속의 목회자와 구약 교회의 선지자들과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이 너를 완성시킬 것이다. 그럼 너 목회 잘 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오늘날 목회자의 선지자적 정체성이 뭐냐면, 성경이 목회자를 키워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시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하리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시리로다
‘부르짖고’ 이건 사자의 포효처럼 무서운 소리다.
그런데 요엘서가 아직 안 끝난 느낌으로 아모스가 시작된다.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여기도 부르짖는다고 나온다.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이스라엘의 고통..
비슷한 말이 나오지만, 반대 의미의 후반절도 나온다.
앞에서 한 말을 뒤에서 다시 한다기보다는 전개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아모스의 마지막 즈음에 오바댜가 이어가는 느낌을 준다.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바댜의 묵시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소식을 들었나니 곧 사자가 나라들 가운데에 보내심을 받고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날지어다 우리가 일어나서 그와 싸우자 하는 것이니라
오바댜는 전체적으로 에돔을 다룬다.
선지서를 읽을 때 앗수르에 대한 이해가 많이 필요하다. 십이선지서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이 열두권은 앗수르를 아주 흥미롭게 표현한다. 우리 삶과 비교하며 읽을 수 있다. 비슷하다.
패권을 가진 나라가 다른 나라를 어떻게 괴롭히는지 지적하고 책망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 나라를 어떻게 깨트리고 새롭게 세워지는지 분명하게 밝힌다.
요나의 분노를 알기 위해선, 미가서를 알아야 한다. 미가서(핵심 주제: 하나님의 공의)에 앗수르의 잔혹함이 담겨 있다.
나훔에서 앗수르의 수도 멸망의 예언이 나오는데, 스바냐서로 이어진다.
앗수르는 세상을 대변하는 이름이다. 강한 나라의 특징들이 있는데, 앗수르가 그 특징들을 보이고 있다.
십이선지서의 이스라엘 모습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비슷한 처지를 띄고 있다.
신약교회의 성도들이 십이선지자들의 책이라고 불렀다.
2주차
#호세아에 대하여
호세아의 진행을 보면, 종말의 교회를 바라보게 한다. 결론은 아름다운 전망으로 이어진다.
12권을 1권으로 읽을 때, 12권을 통일성 있게 읽을 수 있는 배열이 있다. 호세아는 12권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호세아 참 불쌍했다. 지금은 상담도 받을 수 있는데, 그 당시에 호세아는 누구에게 가서 말하겠는가? 결혼 생활이 행복한 남편들도 있지만, 불행한 남편들도 있다. 호세아는 정말 불행했을 것 같다.
우리는 이 호세아를 공감하며 이 책을 읽어야 한다.
호세아는 심리적 내상을 심각하게 입었다. 회복하기 어려워 보일 정도다.
호세아의 이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그런 남편이시다.
‘이런 오해가 있다.’
하나님이 비유로 얘기한거지, 호세아가 정말 이런 결혼생활을 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잘못된 생각이다.
선지자의 강요된 삶도 하나님이 하실 말씀을 위해 필요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다. 목회자의 삶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기 위해 삶이 고될 때가 있다.
앗수르가 분영 왕국을 참 많이 괴롭혔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어떤 나라를 의지해야 되느냐? 를 놓고 상대를 제거해야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첨예한 갈등이 있었다(아람이냐? 앗수르냐? 이게 심했다).
교회 분열도 보면, 뭘 의지해야 되는지?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이렇게 되면 상대 측을 제거하려고 한다.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앗수르의 의미가 있다.
하나님을 배신하는 성도들은 앗수르가 뭔지 잘 모른다.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나라가 자신을 학대해도 학대 받는동안 또 좋아한다.
미래의 교회상을 어떤 군대도, 어떤 지도자도, 어떤 나라도 의지하지 않는 모습으로 제시한다(돈을 의지하지 않는 성도). - “여호와의 날”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다. 성도 간에 어떤 분리도 용납하지 않으시고, 평화를 원하신다. 성도는 평화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앗수르가 만들 수 없는 나라다. 힘, 강요, 경쟁? 그걸로 만들 수 없다. 절대 짐작할 수도 없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으면, 우상을 따르게 된다.
교회 안 나오고, 장사만 하고 출근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교회 갔다. 기도 많이 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손 들고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 사람들의 신앙이 어땠길래?
메시아만 의지하는 교회는 치료가 일어난다. 치료를 받으려면 징계를 받아야 한다. 정결하게 하시기 위한 고난과 징계를 당할 때, 싫어하거나 방황만 해선 안 된다.
징계를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 성도들은 징계가 뭔지 잘 모른다.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이 떠났다고 생각한다.
기다리시는 것이다.
백성들이 돌아오게 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들의 완전한 인애가 있는데, 그 인애를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 하셨다.
앗수르같은 자들이 누군가?
교회를 폐허로 만드는 성도 외의 사람이 누군가?
호세아의 예언은 교회가 회복될 것을 바라보고 있고,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 끝난 예언이 아니다.
언약 백성이 정결해지는 과정은 안 끝났다. 그럼 앗수르와 같은 강한 외부 세력은 누군지 잘 알고, 거룩한 미래를 기다리며 향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를 치료하기 위해서 교회를 힘들게 하시는 것은 끝난 예언이 아니다.
교회의 어려움이 있을 때 이 관점이 필요하다.
이 예언 속에서 백성들에게 치료가 필요한데, 치료의 방법으로 그동안 의지했던 이 끔찍한 나라가 자기를 힘들게 하는데도 계속 좋다면서 따르곤 했는데, 환멸을 느끼고 완전히 버리는 것이 치료다.
그 끔찍한 것이 나를 아주 힘들게 하면, 완전히 버리게 된다.
교회가 의지해선 안 되는 것을 의지하게 하는 지도자들이 없어져야 한다고 많이 말한다.
우리 자주 보게 된다.
교회에 왜 이렇게 나쁜 사람이 많지?
교회를 떠나게 하는 자들이 왜 많은가?
그 자들을 하나님이 미련하게 만들어서 그들을 통해 뭔가 추종하는 자들을 소멸하시겠다는 뜻도 있다.
나는 참된 지도자인가? 이걸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예언의 길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고민하고 순종해야 한다.
‘공의’로 결혼한다.
그 당시 신랑은 지참금(공의)을 줘야 했다.
신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공의를 가지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공의가 주어지는데, 그들은 어떻게 따르는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인들….”
그들이 유대인인 줄도 모르게 흩어졌다….
‘온 이스라엘’
다윗과 솔로몬 시대 쓰던 말인데, 페르시아 시대 때 돌아오는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데,
실제 옛 땅으로 돌아온다는 말보다는 ‘교회가 생긴다는 말’이다.
종말이 예수님의 은혜로 더 아름다워진 성도로 이뤄진다는 말이기 때문에, 더 완성될 우리 교회를 생각해 보는 게 합당한 예다.
신실하지 못했던 신부가 신랑만을 사랑하는 것이 ‘돌아오는 것’을 뜻한다. 앗수르와 바벨론에서…
‘그 야곱이 우리였다…’
주전 8세기를 살고 있던 이스라엘이 주전 15세기의 야곱처럼 이미 하나님을 만났었다고 얘기한다.
야곱을 통해 우리가 어떤지 배우자! 이게 아니라,
실제 자기들이 야곱이라고 말한다. 자기 조상이지만, 멀리 있던 다른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라고 한다. 시간을 구분하지 않는다.
거짓 저울 같은 것들을 쓰는 속임수로 재물을 욕망하는 태도를 버리라고 하신다(실제 300g 추를 600g으로 속이고 소고기를 파는 경우).
고멜은 자기 남편 대신 다른 사람이 자기 남편이 됐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여인이다. 호세아보다 더 잘생기고 건장한 남자를 찾는다.
자신이 의지해선 안 되는 것을 의지하는데 왜?? 매력적이니까…
성도들이 무엇을 의지하는 행동도 마찬가지다.
여호와는 백성으로 하여금 그 어떤 것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모습은 ‘아름다워지고’ ‘강해져야 한다.’
그렇게 되리라 믿음이 있다면 추구해도 좋다.
자기도 아름다워지지만 찾아오는 사람도 아름다워지게 하는 것이 교회다.
뜬금 없이 ‘자, 이제 지혜를 깨달았느냐?’ 하고 끝나는 것 같다. 14장 9절을 보면, 지혜서의 마지막 같다고 여긴다. 그래서 지혜서 본문이 이질적으로 붙었다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있다.
여호와의 길…
여호와는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하실 것인가?
내가 여호와의 길을 가는가? 아님 제 풀에 걸려 넘어지는가?
제1장
1절.
호세아서를 이해하려면 이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
‘시대’는 ‘날들’의 번역이다.
임한=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있었다는 게 선지자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져야 설교할 게 정해진다.
그 사람이 선지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할 말을 주셨는가? 이다.
오늘날 목회자는 성경을 들고 다닐 수 있지만, 성도에게 가르쳐 줄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목회를 하면, 성도의 사정을 알게 되고, 기도도 알게 되니까 성도에게 뭘 말해야 할지 깨달아지는 게 있다. 없으면, 성령과의 교제가 간절히 필요하다.
호세아 서는 북쪽에서 활동했지만, 남유다의 맹수같은 왕들을 더 언급한다. 유다와 이스라엘을 둘 다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미가서, 아모스도 호세아서와 같이 읽어야 한다. 이들을 통해 공통적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 (1시간 28분. 이 세명 말고 또 한 명 말한 것 같은데?)
예수님을 왜 머리라고 하는지 보면, 예언을 보면 알 수 있다.
교회의 머리라고 할 때, 사람이니까 움직이는 몸의 머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기도 하지만, 선지자들이 지도자들을 머리로 종종 비유했다.
큰 책인 이사야는 뭔가 자세하게, 화려하게, 현란할 정도로 발전시키는 책이라면, 상대적으로 얇고 압축적이게, 단순하고 투박하게, 꾸미지 않고 말하는 느낌이 든다(호세아).
지도층이 타락하면, 백성이 불행해진다. 백성이 반역하게 된다.
호세아에게 자녀를 ‘취하라.’라고 나온다.
호세아가 직접 낳은 것인지, 고멜과 다른 남자 사이에 나온 아이인지,,,
성도들이 목사를 보면, 목사를 보기만 해도 은혜가 되는 경우도 있다.
호세아가 선지자로서 설교도 하고, 예언도 했을텐데,,,
호세아로 말씀했다….
호세아의 삶 자체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려는 방법이었다.
내가 목사로서 사는 것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호세아는 자기 세 아이의 이름을 짓는다.
그런데 이 세 아이들이 자기 자식인지 모호하다.
하나님은 신부 이스라엘이 우상과 간음하여 낳은 자식을 얻으신다.
하나님은 역기능 가정의 ‘가장’이시다.
보통 역기능 가정을 보면, 남편이 문제를 일으키는데, 이 경우는 다르다. 아내가 문제를 일으킨다. 그래서 남편이신 하나님이 화를 내신다. 부수신다. 뛰쳐 나가신다. 대단히 인격적이시다. 왜 이렇게 자신의 상처를 알리고 싶어 하는가?
호세아는 좋아하는 여자가 없었을까? 근데 웬 이상한 여자랑 결혼하게 하신다….
에스겔은 아내를 사랑했는데, 하나님이 너의 눈을 하나 뽑을 거라고 하시고, 그 다음에 아내를 죽이신다. 그런데 여기서 에스겔의 감정이 표현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실까?
호세아도 호세아서에 자기 감정을 아예 담아내지 않는다. 그 정도의 여지도 없을만큼 아무렇지 않게 쓰여졌다. 이 회오리 치는 내면의 온갖 것들이 감춰져 있다. 극도로 절제돼 있다.
그럼 고멜이랑 어떻게 됐을까?
결과가 나오지도 않는다.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