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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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제 :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연합된 공동체가 되고 신앙을 지켜가야 합니다.
명제 :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연합된 공동체가 되고 신앙을 지켜가야 합니다.
[도입]
서론 예화
지구에서 가장 추운 남극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삽니다.
동물들은 저마다 생존을 위해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곳으로 무리를 지어 떠납니다. 어떤 종은 추위를 피해 남극을 떠났고, 먹이가 풍부한 지역에 자리를 잡은 종도 있고, 남극에서 조금이라도 따뜻한 곳으로 움직인 종들도 있습니다.
황제펭귄은 남극 중에서도 가장 춥고 먹이도 많지 않은 혹독한 내륙으로 이동했습니다. 제 아무리 남극에 사는 동물이라 해도 영하 40도의 추위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펭귄들은 허들링이라는 방법으로 무리를 지어 살아갑니다. 모기향 모양처럼 줄을 서 바깥 쪽에 있는 펭귄들이 차가운 바람과 눈보라를 막아주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안쪽에 보호받던 펭귄이 밖에서 버티던 펭귄과 교대하며 추위를 이겨냅니다.
이렇게 조금씩 희생하며 서로의 체온을 지켜주자 황제펭귄이 머무는 남극의 가장 척박한 내륙은 오히려 천적도 없고 새끼들도 안전한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는 곳이 됐습니다.
남극 내륙에서 살아가는 황제펭귄의 이야기는 어쩌면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같습니다. 진리를 향한 공격과 비난이 더욱 거세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된 형제자매들과 연합함으로 승리하십시오. 아멘
에베소 교회 안에서는 내부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서는 옥중서신이라 불리는 서신서 중에 하나입니다.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마지막으로 빌립보서 그 중에 에베소서는 에베소 지역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전한 편지입니다. 15-16절을 보면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이 처럼 바울이 얼마나 에베소 성도들을 향한 사랑과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현재 상황이 감옥에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성도들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편지로 보낸 것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을 때 에베소 성도들은 어떻해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당대 역사와 문화
그 당시 에베소 성도들은 지중해에 연접하여 수 많은 항구를 끼고 있고 수리아와 아시아의 심장부를 향해 길게 뻩어 있는 소아시아의 상업 중심지로서의 입지조건을 갖춘 전략적 요충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는 해상 무역과 육지 무역이 자연스럽게 교차하는 장소여서 부요한 도시였고 로마의 소아시아 행정 도시로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지역에 주목할 만한 것은 직경 150미터 정도 되고 2만 5천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의 원형 극장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곳은 언제나 각종 경기로 활기찬 장소였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끔찍한 장소이기도 한 장소 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내부적 갈등
이러한 부요한 도시, 상업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곳에서 아무런 문제와 갈등 없이 에베소 교회가 잘지내면 정말 좋겠지만, 모든 공동체에는 크고작은 갈등이 있지 않습니까? 당연히 에베소 교회 안에서도 갈등은 존재했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에베소 성도들에게는 성도들 사이에 내부적인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외부적인 갈등이 있었습니다. 우선 내부의 갈등이 무엇이었냐면 바로 유대교 그리스도인과 헬라파 그리스도인들과의 갈등이었습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의 텃새 때문에 일어난 갈등이었습니다.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은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주의적 율례인 할례, 음식규례, 절기, 월삭, 안식일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은 에베소 교회 공동체를 그들 마음대로 이끌고 싶고 그 교회 공동체의 머리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 공동체의 머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분 이십니다. 에베소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의 지도자도 아니고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의 지도자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이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라는 말씀처럼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유대교나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은 연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공동체가 되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도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도 갈등은 있습니다.
어떤 두 사람이 버스 안에서 심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다른 승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를 높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함께 타고 있던 다른 승객들이 얼마나 불편이 컸겠습니까? 어느 중년의 승객이 참다못해 다음 정거장에 버스가 도착하자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던 승객은 버스 문앞에서 뒤를 돌아보더니 다투던 사람들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이 사람들아 !! 여기가 교회인줄 알아?”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다툼의 장소로 인식된 것은 슬픈 일입니다. 세상에서의 큰 다툼은 작게 인식되지만 교회에서의 작은 다툼은 세상에서 큰 다툼으로 인식됩니다. 교회는 작은 다툼이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는 다툼이 있는 곳에 화평이 되어야 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우리 한국교회는
코로나 19 팬데믹 기간에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다른 교회를 비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 이 교회는 이렇게 운영을 했지?, 왜 저 교회는 이렇게 밖에 못한거지? 라며 이해와 공감을 하려고 하기 보다는 비판을 앞세웠던 것 같습니다. 이번 코로나 19 기간 동안 교회 내에서는 어떤 내부적 갈등이 있었나요? 바로 정부의 방역을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저항하는 교회와 정부의 방역지침을 앞장서서 따르고 지켜왔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교회는 서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너 때문에 교회가 욕먹는거라며 핏대를 세우며 비판 했습니다. 정부의 방역지침에 저항한 교회는 방역지침을 지키고 있는 교회들을 향해 믿음이 없는 교회라고, 신앙의 자유권와 예배의 자유권을 위해 저항운동을 해야지 이렇게 순수히 따르는 것은 믿음이 없는 행동이라며 비판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부의 방역지침을 앞장서서 지켜왔던 교회는 정부의 지침에 저항한 교회를 향해 이렇게 비협조적인 교회에서 다수 확진자가 생기니 세상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고, 모든 개신교 교회의 이미지를 실축시키는 것 아니냐며 비판을 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오늘날 코로나 19 팬데믹 기간에도 에베소 교회처럼 서로가 하나로 연합되지 못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던것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는 외부의 고난과 핍박도 있었습니다. 하자만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로 이겨냈습니다.
로마가 유럽을 정복할 만큼의 강대국이었을 당시 로마 시민권자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힌 통행증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만약 땅이나 바다에서 이 통행증을 가진 사람을 해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이 로마 황제와 전쟁을 할만큼 강한지 생각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이 말은 즉 로마의 시민을 건드리면 로마의 황제를 건드린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로마는 일정 거리마다 여행 중인 로마 시민들이 의무적으로 정무관에게 연락을 하게 했는데 단 한 명의 시민이라도 오랜 기간 연락이 끊기면 경로에 있는 모든 무장세력들을 싹 쓸어버렸습니다.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는 “로마 시민을 결박하고, 채찍질하는 것은 무조건 범죄나 다름없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매질하던 빌립보의 행정관들이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두려워하며 즉시 풀어줬던 것입니다.
비록 일개 시민일지라도 강대국에 속해있다는 것만으로 엄청난 권리가 됩니다. 세상 그 어느 나라보다 강하고, 영원히 망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 내가 속해 있고, 그곳의 왕이신 주님께서 나를 지키고 보호하심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멘
에베소 교회는 내부적 갈등 뿐만 아니라 외부의 고난과 핍밥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로마황제를 숭배해야 할 것을 강요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로마황제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존재였으며, 로마의 “신”으로 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의 권력이 절대 권력이 된 이유는 ‘호민관 특권'과 ‘대행 집정관 권환' 마지막으로 ‘최고 사제장'으로서 종교 조직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호민관 특권'은 원래 공화정 때에 권력 집중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된 조치로서, 이 권한을 통해 황제는 원로원과 민회 결정까지 거부할 수 있는 막강한 거부권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또한 ‘호민관 특권' 으로 인해 황제의 신체는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분류되어서 황제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황제의 의무 수행을 방해하는 자는 그 누구라도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는 공화정 때 호민관에게 주여졌던 특권인데, 당시 평민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호만관의 직무 특성상 신변 안전을 보장해 주던 특권이었습니다. 이 특권을 잘못 악용하여 로마황제를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분류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대행 집정관 권한'을 통해 황제는 로마 군대의 통수권자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황제는 전쟁 선언, 조약비준, 외교협상 등 제국을 대표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으며, 과거 감찰관이 맡던 여러 권한 및 법정에서 최고 결정권자로서의 권한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권자들은 법정 송사에서 최종심으로 가이사에게 직접 상소하는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로마 시민권자였던 사도 바울 역시 이 권리를 사용함으로써 로마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마 황제는 ‘최고 사제장'으로서 종교 조직을 통제했습니다. 로마 시대 화폐인 데나리온의 앞면에는 B.C. 4년부터 A.D. 100년 사이에 로마를 다스렸던 12명의 황제 초상이 각각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중에 디베료 황제의 흉상이 그려져 있는 데나리온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 케사르'란 글씨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 종려나무 가지를 쥐고 앉아 있는 평화의 여신 그림과 함께 ‘대제사장' 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당시 황제가 지녔던 정치・종교 양면의 절대 권력을 명확히 드러내 주는 증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로마황제의 절대적 권력 앞에서 유일한 구원자 삼위일체 하나님을 유일 신앙으로 믿고 있는 에베소 성도들 입장에서 너무나도 거대한 외부의 압박이었을 것이고, 거대한 핍박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황제를 숭배해야되는 공동의 시민법을 거부한 이들은 사회적으로 왕따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었는데 오늘날로 보면 로마황제에게 숭배 해야되는 시민법을 지키지 않은 것만으로 직장에서도 짤리고 사업장도 빼앗기게 되어서 생계를 유지하는게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설명한 직경 150미터 정도 되고 2만-2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의 원형 극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기 전에 난잡한 귀족들의 성문화를 재현시키는 연극을 강제했습니다. 잡혀온 그리스도인의 아무 남자와 여자를 붙여서 강제적으로 성관계를 시켰는데 이 모습을 자신의 본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가 보는 앞에서 조롱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관중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수치심과 조롱을 주었던 이유는 단순히 재미와 유흥을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신앙과 종교를 잊어버리게 만들고 넋을 잃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제 1부로 난잡한 연극은 마치게 되고 아직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은 무사히 풀어주면 정말 좋았겠지만 남은 이들은 몇일씩 쫄쫄 굶은 사나운 맹수들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감옥에 갖혀있는 사도바울은 이러한 안타까운 에베소 성도들의 소식을 듣고 권면과 위로를 하기 위해서 편지를 썼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라며 위로와 권면을 합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외부의 거센 고난과 핍박에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외부의 세력보다 더 크고 능력이 있으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그러니 우리 주님을 끝까지 의지하고 믿음을 저버리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도 대단하다고 생각이 드는건 이렇게 에베소 성도들이 온갖 핍박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교회 공동체의 보존을 위해서 적절한 타협을 하라고 권면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두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며 위로를 해줄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사도바울은 그들에게 당당하게 선포합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아멘. 새번역 성경 에베소서 1장 19절 말씀입니다. 19절 말씀에서 “μέγεθος(메게소스)”는 ‘지극히 큼, 가장 강력하다.’ 라는 의미로 최상급 용어로 쓰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하나님의 능력을 설명할 때 붙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만큼 온 우주를 통치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에베소 성도들에게 다시한번 전하고 각인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셨다는 것을 강력히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휘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아멘 새변역 성경 에베소서 1장 20-21절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발현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강조한 이유는 온 인류에 어떠한 황제도, 어떠한 사람도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에베소서 성도 너희들이 섬기고 있는 왕이 로마황제보다 더욱 위대하고 힘과 능력이 더 크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사도바울이 전해준 희망의 메시지를 통해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소명제 2 : 우리의 신앙을 흔드는 우상의 유혹에 조심해야 합니다.
- 앞으로 졸업한 이후의 인생의 선택을 풍요로움과 세속적인 기준으로 선택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유일한 분으로 섬기는 자로서 그분의 뜻을 따르는 선택을 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