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22 주기도문 4 (6번째, 결론)
오해가 습관인 사람들과 살지 않는 행복
주기도문의 결어,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 가지고 있는 가치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이유들을 가지고 우리의 기원을 강화해야 함을 가르친다. 또한 하나님께만 영원한 주권과 전능함과 영광스럽게 탁월하심을 돌리는 찬양이 담긴 기도로 우리의 기원을 강화해야 함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이런 주권과 전능하심과 탁월하심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꺼이 도와주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기를 믿음으로 담대하게 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제목들을 이루어 주시도록 잠잠히 그분을 의지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며 확신임을 증언하기 위하여 우리는 “아멘”이라고 말한다(대196).
송영은 누가복음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마태복음에서는 괄호 안에 나타난다. 대부분의 고대 신약 사본에는 송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송영은 후대에 첨가된 것이며, 송영이 없는 것이 원래 본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럼에도 주후 1세기경에 기록된 「디다케」에는 “권능과 영광이 아버지의 것입니다”는 송영이 나타난다. 유대인들의 기도도 송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으며, 주기도문이 시험과 악한 자에 관한 언급으로 끝이 나는 것도 어색하다. 이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는 것은 어렵다고 여겨진다.
우리 신조는 주기도문의 결어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송영과 동시에 만유가 주께로 돌아간다는 송영으로서 모든 기원들을 강화한다고 해설한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원을 들어 기꺼이 도와주실 것을 믿음으로 구하며 응답하실 그분을 조용히 기다리고 의지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확증으로 아멘이 나온다고 첨언한다.
예수님께서 고난과 십자가의 삶을 통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렸듯이, 이제는 우리도 이 고난을 통한 성화로써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린다. 아버지 하나님은 항상 영광 중에 계신다. 천사들은 주님 앞에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사 6:3)고 송영을 드린다. 천사의 이 송영이 성도들이 영원한 나라에서 부를 찬송이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옵니다”(계 4:11). 계시록에서는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예수님께도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드린다(5:12–13). 즉 고난을 통한 영광,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주어질 영광이다.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아버지의 것이라는 고백은 선언 이상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아버지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증거 되었고, 이제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서 증거 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이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그리스도의 것이요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것도 될 것이다. 우리는 ‘아멘’하면서 동의하고 실행해야 한다.
주기도문은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한국 크리스천에게 익숙한 마태복음 6:9–13과 보다 짧은 형식의 누가복음 11:2–4에 나타나는 주기도문 가운데 어떤 것이 원문인가?
논의의 범위를 좁혀, 마태복음 6:13b의 송영을 NTG28(NA)은 본문에서 생략하지만, GNT5, 대부분의 『한글 성경』(1938년 ‘성경 개역’에도 괄호로 처리함), 『독일어 성경』(1984), 『따갈로그 성경』(2013), 『화란어 성경』(1951), 그리고 『영어 성경』은 괄호 안에 표기한다. 다수 사본을 따르는 『헬라어 성경』(1982)은 송영을 포함하면서, 각주에 ‘א B vs μ’라고 표기한다. 『터키어 성경』과 『페르시아어 성경』에서는 송영을 괄호 없이 본문에 포함시킨다.
그러나 NIV, ESV, 『아프리칸스 성경』(Die Bybel, 1999)은 송영을 삭제하고, 각주에서 밝힌다. 원본에 송영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공관복음 유래’와도 연결된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81–82년에 깜뻔신학교(Broerderweg) 신약학 교수 판 브럭헌(Jakob van Bruggen, b. 1938)과3 칼빈신학교 신약학 교수 밴드스트라(Andrew J. Bandstra, b. 1926)가 「칼빈신학저널」(Calvin Theological Journal)에 기고한 논문을 중심으로 비교하여 비평할 것이다.
1. 판 브럭헌이 원본으로 선호한 송영을 가진 긴 본문
다수 사본을 원본에 일치하는 것으로 보는 판 브럭헌은 마태복음 6:13b의 송영(Ὅτι σοῦ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καὶ ἡ δύναμις κα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Ἀμήν.)은 괄호로 처리할 것이 아니라, 다수 사본처럼 원본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제시하는 근거는 크게 6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원본 추적은 라틴어 역본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헬라어 사본에 근거해야 한다. 이것은 ‘요한의 콤마’(Johannine Comma[짧은 절])라 불리는 요한일서 5:7b–8이라틴어 역본의 광범한 지지를 받지만, 원본으로 보기는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2) 원본 추적에서 서방의 라틴어 역본이 헬라어 사본보다 덜 중요하다는 위의주장(1)은 적절한데, 서방 예전에서 마태복음 6:13b의 송영을 생략한 이유는 라틴역본(벌게이트)에서 송영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즉 역본이 예배 형태에 영향을미쳤다.
(3) 그렇다면 동방교회의 예전에 송영이 포함된다는 사실은 (동방 비잔틴 계열의) 다수 사본이 송영을 포함하는 원인이 될 수 있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다수 사본은 일관되게 송영의 3중 요소(당신의 나라, 권세, 영광)를 가지고 있지만, 동방 예전은 송영의 다양한 형태를 보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송영이 일관되게 나타나는 다수 사본이 고정된 송영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은 동방 예전으로부터 나왔다고 볼 수 없다. 동방 예전에 나타나는 송영의 몇가지 형태는 동방교회가 주기도문의 표현(wording)에 자유를 가지고 있었음에도불구하고, 송영이 주기도의 기본적인 형식에 속했다고 인지했음을 암시한다. 즉동방교회는 송영의 다양한 형태를 예배 중에 활용했지만(참고. 딤후 4:18), 송영을포함하고 있는 본문을 생략하는 자유는 가지지 못했다.
(4) 수천 개의 헬라어 사본 가운데(L[8–9세기], W[5세기], Θ[9세기], 0233 그리고소문자 사본), 단지 9개만 송영을 생략한다.
이 9개의 사본의 가치는 나머지 다수 사본보다 더 중요한가?
그렇지 않다. 소수의 고대 사본이 마태복음에서 송영을 생략하는 것은 마태복음을 누가복음의 표현에 일치시키려는 우발적(incidental) 현상이다. 더욱이 א와 B가주기도문과 신약 다른 구절에서 본문을 문헌학적으로 재작업(philological reworking)했다는 여러 증거가 있다. 따라서 송영이 생략된 누가복음에 일치시키기 위해서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고대 사본들이 마태복음에서도 송영을 생략했다고 볼 수 있다. 판 브럭헌은 송영을 포함하는 주기도문이 알렉산드리아, 가이사랴,서방, 비잔틴 계열의 지지를 골고루 받는다고 주장한다. 사본의 나이가 아니라(선조)본문의 나이를 고려한다면, 송영을 포함하는 옛 라틴 역본은 긴 형태의 주기도문이 오리겐 이전인 A.D. 2세기경에 이미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판 브럭헌은 제롬의 벌게이트 역에 송영이 생략된 이유를 제롬이 송영이 빠진 사본을 참고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결과적으로 제롬의 벌게이트(A.D. 400–420)는 후기 서방 예전에서 송영이 생략되도록 했던 하나의 요인이었다.
(5) 예전의 영향은 일부 고대 대문자 사본에서 어떻게 송영이 생략되었는가를 설명해준다. 많은 경우 동방 예전에서 회중이 주기도를 외우면, 사제가 송영을 말하고, 마지막으로 회중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따라서 회중이 아니라 사제가 송영을말했기에, 송영이 주기도문의 원본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고가 생겨났다.
(6) 누가복음의 짧은 형태는 본문의 손상 혹은 말시온의 영향으로 발생한 결과로볼 수 있다. 말시온은 주기도문을 축소했다. 예를 들어,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과피조계와 관련된 요소들(‘하늘,’ ‘하늘과 땅,’ ‘악한 자’)을 생략함으로써, 하나님과창조의 신(creator-god) 사이의 부적절한 관련을 예방한다. 판 브럭헌은 누가복음을 포함하는 헬라어 사본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누가복음 11:2–4의 주기도문에송영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비평사본주의자의 주장대로, 송영이 없는 주기도문 원본에 송영이 후대에 추가되었다면, 왜 송영은 누가복음의 사본들에 나중에 추가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판 브럭헌은 제기한다.
2. 판 브럭헌의 주장에 대한 밴드스트라의 비평
(1) 마태복음 6:13b의 송영을 포함하지 않는 헬라어 사본의 수는 판 브럭헌이 주장하듯이 9개가 아니라 14개라고 밴드스트라는 주장한다: א, B, D, Z, 0170, 1, 17, 118, 130, 131, 209, 372, 1582, ɭ 547. 판 브럭헌은 본문비평에서 헬라어 사본의지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가(1979), 나중에는(1982) 옛 라틴어 역본의지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리고 판 브럭헌의 주장과 달리 ‘요한의콤마’는 서방 계열의 광범위한 지지가 아니라 후대 라틴어 역본의 지지만 받는다.반면에 마태복음 6:13b의 송영이 생략된 형태는 알렉산드리아 계열과 서방 계열의 헬라어 대문자 사본은 물론이거니와, 라틴어 및 다른 고대 번역본의 지지도 받는다.
(2) 판 브럭헌이 주장하듯이, 마태복음 6:13b의 송영을 생략한 서방교회의 예전이 라틴 역본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서방교회가 예전에서 송영을 생략한 이유가 무엇인지 판 브럭헌은 설명해야 한다. 단지 누가복음에 송영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서방교회가 송영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추론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송영이 생략된 이유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의 원본에 송영이 포함되지않았다는 서방교회의 확신 때문으로 보인다. 이 현상을 서방 본문인 D가 잘 보여준다.
(3) 판 브럭헌은 동방 예전의 영향으로 송영이 다수 사본에 첨가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몇 몇 사본은 예전의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일부 헬라어사본은 ‘영원히’를 ‘영원 영원히’로 확대하거나, ‘아멘’을 추가한다(소문자 사본17). 그리고 일부 소문자 사본(157, 225, 418)은 ‘영광이’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영광이’로 확대한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6:13b의 송영도 역대상 29:11–13을반영한 동방 예전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수 있다. 그리고 송영이 원본에 포함되었다면, 동방교회가 주기도문의 원래 표현을 변경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고 판 브럭헌이 주장하는 것은, 성경 원문에 대한 존경을 약화시키는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오히려 동방 예전에서 송영이 생략된 이유는 송영이 주기도의 원문에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사본의 숫자가 곧 무게라고 판단하는 판 브럭헌은 헬라어 사본의 다양한 계열(알렉산드리아계의 א와 B, 서방계열의 D와 옛 라틴 역본, 소위 가이사랴 이전계열의 소문자 사본들[f1], 터툴리안, 오리겐, 키프리안과 같은 초기 교부들 등)이송영을 생략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A.D. 100년경의 『디다케』 8:2(“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 것이기 때문입니다”)를 제외한다면, 헬라어 사본 가운데 5세기의 W에서 송영이 처음 등장하는 것도, 송영이 원본에 포함되지 않은 증거다. 교부의 증거와 관련하여, 오리겐(d. 254)의 “웅변술에 관하여”(De Oratorio)18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에서 송영이 없는 본문을 지지하기에 밴드스트라는 판 브럭헌이 오리겐을 오독했다고 본다. 또한 밴드스트라는 암브로스(d. 397)가 “성례에 관하여”(De Sacramentis) 5.4.18과 6.5.24에서 송영이 없는 것을 지지한다고 본다. 밴드스트라가 볼 때, 터툴리안(d. 225)의 “기도에 관하여”(De Oratione)에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난다.
(5) 판 브럭헌은 동방 예전에서 회중이 아니라 사제가 송영을 말했으므로, 송영이 주기도문 원본에 빠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어느 시기의 동방 예전에서 발생했는지 불분명하다. 『디다케』 등에 따르면, 사제는 송영을 말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5세기 이전의 헬라어 사본이나 라틴어 역본이나 교부에 송영을 포함한 것은 없다. 참고로 A.D. 407년에 사망한 크리소스톰은 송영을 포함한다. 따라서 긴 형식의 주기도문을 포함한 헬라어 사본이 A.D. 2세기에 존재한 것이 아니라, 5세기 이후의 헬라어 사본에 주기도문의 송영이 추가된 것으로 보는 게 옳다.
3. 판 브럭헌의 주장과 밴드스트라의 주장에 대한 비평
(1) 판 브럭헌이 주장대로 송영을 포함한 마태복음의 긴 주기도문이 원본이라면, 공관복음 유래에 있어서 마태우선설을 지지하는 근거가 된다(참고. 어거스틴 가설). 그런데 판 브럭헌은 일부 고대 대문자 사본들이 누가복음과 표현을 일치시키려고 송영을 생략했다고 주장하기에 누가우선설도 따르는 듯하다. 판 브럭헌은예수님이 사역 초기에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를 가르쳐주셨고, 그 후 사역 후기에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누가복음 11장의 주기도를 다시 가르쳐주셨다고주장한다.
따라서 판 브럭헌은 마태와 누가가 서로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추론하는 듯하다. 판 브럭헌의 이런 주장들로부터 추론해 보면, 공관복음 유래는 특정 복음서의 우선설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런데 판 브럭헌이 예수님이 주기도를 두 번이나 가르쳐주셨다고 추론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의 비유가 복음서에 약간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에, 예수님이 주기도를 한 번만 가르쳐주셨고 복음서 기자는 성령의 영감으로 자신의 기록목적에 맞추어 변경을 가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유대인 출신그리스도인이 다수를 형성한 마태 공동체와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이 다수를 형성한 누가 공동체(그리고 데오빌로)의 형편을 고려하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기록목적의 빛 아래에서 송영의 원본 여부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
(2) 판 브럭헌은 A.D. 2세기에 긴 형식의 주기도문이 존재했다고 가정한다. 이런가설의 바탕에 후기 소문자로 기록된 다수 사본의 조상 본문이 자리잡고 있는 것같다. 그러나 다수 사본의 조상 본문은 현존하지 않고, 설령 존재했다고 하더라도어떤 형태였는지 알 수 없다.
(3)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송영/찬송의 빛에서 송영의 원본 여부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 1–2장에 찬송/송영이 많이 등장한다. 따라서 누가복음11:2–4에서는 송영을 생략한 것이 아닐까?
이런 가능성에 판 브럭헌과 밴드스트라는 주의를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
(4) ‘행동의 복음’이라 불리는 마가복음에 산상설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어 영생을 얻도록 하는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에 주기도는 필수 요소가 아니었던 것 같다. 사도 요한은독자들이 주기도를 알고 있다고 전제했을 수 있다. 마태는 산상설교 안에 긴 형식의 주기도를 위치시키고, 누가는 여행 기사 안에 짧은 형식의 주기도를 위치시킨다. 그렇다면 주기도의 위치는 주기도의 원문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묻어야 한다. 지면의 제한 때문인지 판 브럭헌과 밴드스트라는 마태와 누가가 선호한 문체나 스타일과 같은 본문비평의 내증에 관한 연구를 심도 있게 다루지 못했다. 따라서 “마태와 누가는 송영을 가지고 있는 기도문을 선호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판 브럭헌도 기도문에 송영이 없는 것이 일면 자연스럽다고인정했다.27
(5) 판 브럭헌과 밴드스트라는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서 자료를 환원주의방식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예는 『디다케』의 활용 방식과 암브로스의책의 내용에 관한 두 학자의 논쟁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A.D. 2세기에 송영을 포함하는 주기도가 존재했을 수 있다는 가정과 2세기의헬라어 사본에 송영을 가진 주기도문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구분해야 한다. A.D. 1세기 초대교회의 예전은 송영을 갖춘 기도(예. 18축도문, 1QM 18:13)를 드린 회당의 예전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더불어 마태복음 6:9–13a의 시적표현이 13b에도 이어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4. 결론
사본과 고대 교회의 예전을 종합해 볼 때,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13b의 송영이없는 것을 원문으로 삼는 것으로 결론내릴 수 있다. 따라서 A.D. 2세기 이후의예전을 위해서 송영이 추가되었지만, 헬라어 사본에는 5세기 이후로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송영의 가치는 평가 절하될 수 없다. 깜뻔신학교(Oudestraat)의 리덜보스(H.N. Ridderbos, d. 2007)는 후대에 첨가된 송영은 주기도문의 주 내용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주기도의 가장 적절한 종결부라고 설명했으며, 오스본(G.R. Osborne)은 송영을 ‘주기도의 요약’으로 간주한다. 심지어 최갑종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의 지상 사역기간 동안 송영이 있는 주기도문을 사용했을 수 있다고 추론한다. 따라서 현대예배에서 송영을 포함한 주기도를 찬송이나 기도로 활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참고로 누가복음 11:2–4의 주기도문의다양한 이문들에 관한 본문비평은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