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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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 Tone
Anger
0UNLIKELY
Disgust
0UNLIKELY
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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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0.05UNLIKELY
Sadness
0UNLIKELY
Language Tone
Analytical
0UNLIKELY
Confident
0UNLIKELY
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0.04UNLIKELY
Conscientiousness
0.14UNLIKELY
Extraversion
0.41UNLIKELY
Agreeableness
0.59LIKELY
Emotional Range
0.24UN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Language
Social Tendencies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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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찬송가 : 303(날 위하여 십자가의), 337(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342(너 시험을 당해)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기도문 6번째 간구와 결론 부분을 살피면서,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주의 말씀으로 교회를 다스리시고, 이 말씀이 우리 인생의 지표가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일상의 시험에 노출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은혜로 넉넉히 승리하도록 은혜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 마 6:13
행복한 사람은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행복하기 때문이죠.
행복한 사람은 생각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 하나님이 항상 나를 도우시고, 최선의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그리고 반드시 내 인생을 영원토록 잘 되게 해주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힘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힘든 일 가운데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행복한 것이죠.
그래서 행복한 사람은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반면에 불행한 사람은 항상 시험 가운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인지에 대해서도 모르겠고, 내 인생은 오리무중이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항상 시험 가운데 있습니다.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인 최인철 교수님은,
오해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글을 쓰셨는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해가 습관인 사람들은 세상을 보는 방식이 기본적으로 부정적이며 적대적이다.
극히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불신과 부정이 가득하기 때문에 행복이 깃들 여지가 없다.
여러분, 시험에 들지 않는 비결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불행한 사건이 없어서가 아니라, 불행해보이는 사건조차도 가장 아름답게 해결해나갈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 없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살겠습니까?
믿음은 우리에게 행복감을 줍니다.
그리고 행복감은 우리의 상황과 상관없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우리는 시험을 이기고,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주기도문이 말하는 기도의 능력인 것입니다.
2. 오늘 본문 1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부정적인 기도가 나옵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 달라.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학자들은 이 시험이 뭘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셔서, 믿음을 성장시키는 긍정적인 시험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의 6개 기도문 중에, 이 기도문만 부정적인 기도문입니다.
시험이 만약 좋은 것이라면 긍정적으로 기도해야 하잖아요?
시험을 잘 통과하게 해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데, 부정적으로 기도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그러므로 이 시험은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것이고, 죄의 유혹으로부터 오는 나쁜 유혹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시험에 듭니다.
그리고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유혹 때문에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넘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더이상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가령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데, 물질관계에서 문제가 생겨서 시험이 든 사람은, 물질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고,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헌금했는데, 그에 합당하게 내 소유가 풍요로워지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시험에 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고 있었고,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죠.
그렇지만, 이 사람은 어쨌든 물질 때문에 시험에 들게 됩니다.
가령, 또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 때문에 시험에 들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저럴 수가 있나? 라고 하면서 시험에 드는 것이죠.
이 사람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굉장히 높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해 실망하거나 분노가 생기면서 시험에 들었다.
나는 이제 더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
라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이 일에 대해 이미 문제점을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보다 인간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겼고,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굉장히 높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사람은 사람 때문에 시험에 들고, 그 시험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3. 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라는 책을 쓴 피터 스카치로 목사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엄청나게 많은 기독교인들이 정서적인 건강과 영적인 건강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가령, 하나님을 위하여 열정적이고 뛰어난 설교를 하면서도, 배우자와 자녀들에게는 냉랭하다.
또 매일 기도하고 금식하면서도, 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며, 그것을 마치 영적인 분별력인 것처럼 정당화한다.
교회에서 직분자로 자기 몫을 충분히 감당하지만, 좀처럼 배우려는 자세가 없고 불안정하며 자기 방어적이다.
영적으로 건강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않다는 것이죠.
물론 이것은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고 말하면서,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지을 죄에 대해서도 용서하실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의 정서를 안정시키고, 우리를 알 수 없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진정 용서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의 내면은 굉장히 안정감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가 멀하다고 정죄감이나 죄책감, 두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은 사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하는 것도 죄책감 때문에 하고, 말씀 읽는 것도 죄책감 때문에 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죄책감 때문에 하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건강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어야 하는 것이지, 우리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히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불완전하고, 우리는 실패하고, 우리는 날마다 넘어지지만,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피흘림으로 죄사함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용서받음이 주는 관대함과 넉넉함이, 우리의 정서를 평안하게 하고, 안정시켜 주는 것입니다.
4.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주기도문 마지막 간구, 그리고 결론부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주기도문 다섯 번째 간구가, 용서에 대한 기도이구요.
주기도문이 마치고, 14-15절의 말씀이 또 용서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눈여겨 보셔야 합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용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공동체입니다.
용서로만 존재할 수 있고, 용서받은 사람만 기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다 바리새인이요, 종교인이요,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용서 받지 못한 사람들은, 항상 자기 죄책감을 해소하기 위해 종교적인 행위를 하게 되고, 그 행위를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떠벌리고, 드러내기를 좋아하며, 반면에, 자기들처럼 종교적인 열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정죄하기 일쑤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공동체는 절대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가장 무거운 짐이 바로 죗짐입니다.
이 짐을 대신 져 주시고, 우리에게 무한한 용서라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그러면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돈보다 예수, 물질보다 예수, 사람보다 예수, 어떤 인기나 권세보다 예수.
이 우선순위가 명확한 사람은 시험에 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마귀가 유혹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4장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고 유혹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면, 니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떡 하나도 주지 않으시냐?
야, 니 능력으로 그냥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어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면, 니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니? 저 높은 성전에서 뛰어 내려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면, 니가 십자가에서 죽기를 바라시겠니?
죽지 말고 나한테 절 한번만 해라.
내가 온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너한테 다 줄게.
사탄 마귀는 이처럼, 항상 하나님보다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부각시킵니다.
하나님보다 떡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보다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
하나님보다 니 한 목숨 더 오래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항상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시험 드는 것은, 하나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의 우선순위가 바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시험에 들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한 자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내 힘으로는 이 시험을 못 이깁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최 우선순위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귀중해 보이는 돈, 명예, 인간관계, 이런 것들 다 내려놓고 주님만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요리문답 106문이 이 사실을 잘 정리해주고 있는데요.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제106문.
여섯 번째 간구에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답.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여섯 번째 간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에 시험당하지 않도록 지켜 주시기를, 또는 우리가 시험당할 때 붙들어 주시고 건져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내 힘으로는 시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이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죄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더욱 큰 죄를 짓기 됩니다.
우리는 죄를 이기기 위해서 더더욱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죄를 이기는 비결을 아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죄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를 짓거나, 죄에 빠지게 될 때에, 결코 자기 힘으로 죄를 이기려 하지 않고,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더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바리새인이 되지 않습니다.
남들의 죄를 함부로 비난하거나 비판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지을 수 있는데, 하나님 은혜로 이겼기 때문이죠.
그래서 비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남들의 죄를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아니고, 여전히 시험 가운데 사는 사람이고, 심지어 자기가 시험에 들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마귀에게 사용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우리가 이길 수 없고, 항상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우실 마음도 있고, 능력도 있으십니다.
그것을 믿고, 항상 주님께 기도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사람은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행복한 생각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이미 가진 행복에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한분으로 감사하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선순위가 명확합니다.
100원, 500원, 1000원, 5000원, 10000원이 있는데, 10000원이 가장 좋다는 우선순위가 명확한 사람은, 100원, 500원 잃는 것 때문에 행복을 상실하지 않죠.
당연합니다.
우선순위가 명확하기 때문이죠.
하나님이라는 가치가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어 있는 사람은, 건강, 돈, 물질, 소유, 인간관계 등의 상실 때문에 근본적인 행복을 잃지 않죠.
이게 기독교인이 시험을 이기는 비결인 것입니다.
마귀 사탄은 항상, 덜 중요한 것을 가장 중요한 것처럼 속입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에 더 주목하게 만들며, 우리가 불행한 상상 속에 살도록 부추기는 것이죠.
그러면 얼마나 낭비이고 속상한 것입니까?
그래서 기도함으로 유혹을 이기고, 마귀의 간계를 무너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5. 천국에는 유혹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없기 때문이죠.
천국에는 시험에 들 일도 없고, 넘어질 일도 없고, 낙망하거나 좌절할 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라는 우선순위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소요리문답 마지막입니다.
1문부터 시작했는데, 벌써 107문입니다.
107문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면서 마칩니다.
우리가 소요리문답 제1문에서 사람의 목적이 뭐냐? 했을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107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화로움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면서 마치는 것을 봅니다.
행복한 사람은 시험에 들지 않는데,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은 시험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목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우리의 즐거움이 되면 우리는 곧장 시험에 빠져들게 됩니다.
13절을 보시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부분이 괄호로 되어 있습니다.
고대 초기 사본에는 이 구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초기 교회가 이 구절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초기 사본이라고 해서 무조건 권위 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책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을 괄호처리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권위 있는 말씀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번역상 빠진 부분은 바로 호티절입니다.
호티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기도문 전체를 기도했는데,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이유가 뭐냐? 그 근거가 뭐냐? 이것이 바로 호티절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을 이름을 거룩하게 하소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도리어 악에서 구원하소서
이렇게 6가지로 기도했는데,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게 바로 호티절인데,
번역이라면 이렇게 됩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왜냐하면, 당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가, 그 권세가, 그 영광이, 영원히.
아멘.
여기서 보면, 당신에게 있습니다.
이 부분이 먼저 나옵니다.
무슨 말이냐, 모든 권세와 영광과 통치권이 다 하나님 아버지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냐면,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운행하시고, 주장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믿음으로 담대하게 이 모든 간구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이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 결론부분입니다.
6. 말씀을 맺습니다.
소요리문답 1문은 사람의 목적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고, 소요리문답 107문 마지막은, 하나님의 통치권과 권세와 영광스러움을 찬양하면서 마칩니다.
결국 소요리문답은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기 위해서 믿어야 할 것과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행복한 사람은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힘든일이 있어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하기에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하나님이 아니라 물질에 더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돈이 우리를 시험에 빠뜨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우리를 넘어뜨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마귀의 유혹에 속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더 주목했기에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오늘 들은 말씀으로, 우리 인생의 목적이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 내 어떤 관계도 우리의 영원한 즐거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돈과 소유가 우리의 영원한 즐거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즐거움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제목>
담임목사님과 사모님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영육의 강건함을 시고, 목회에 지혜와 은혜를 주셔서 교회를 잘 이끌어가실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2. 또한 윤성기 연영덕 집사님의 둘째 아들 윤종찬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군복무중 두통과 구토로 국군수도병원으로 이송 결과 군의관의 뇌종양 판단으로, 아주대병원으로 후송 후 입원해 있습니다.
오는 금요일(24일)에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종양이 까다로운 자리에 있어서 9시간 이상의 수술 시간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긴 수술 시간 하나님의 손길로 잘 집도해 달라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3.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정서적으로 건강한지 돌아보면서, 영적인 건강과 정서적 건강이 함께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겠습니다.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뿐만 아니라, 받은 용서를 흘려보내면서, 정서적으로도 과도한 분노와 미움, 비난에 휩싸이지 않고, 포용하고 관용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정서적 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시험의 본질
시험의 핵심질문은
'무엇을 더 사랑하는가?' 이다.
답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시험에 들지 않는다.
원하는 그림,
관계
1) 사람과의 관계 (친밀감 등)
2) 물질과의 관계 (성취, 소유)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시험에 드는데
관련 반응은
미움, 분노, 쓰라림, 소외, 절망 등이다.
불행을 전하는 사람은 마음이 불행한데,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주되, 그 불행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신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것처럼 유혹을 받을 운명이라고 가정합니다.
유혹은 사탄이 인생의 상황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죄를 범할 기회와 마주치게 하고,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반하는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선순위”가 정리된 사람은 “시험”을 이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먼저”인 사람은 “시험”을 이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면제해주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승리할 권세를 주셨다.
오해하는 사람의 특징
오해가 습관인 사람들과 살지 않는 행복
중앙일보업데이트 정보 더보기
입력 2019.11.20 01:06
업데이트 2019.11.20 08:40
지면보기지면 정보
오해를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들과 지낸다는 건 매우 피곤한 일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선의를 의심한다.
모든 행동에 대해 일일이 설명해줄 것을 요구한다.
물론 설명해줘도 믿지 않는다.
우리의 감정은 그들로 인해 혹사당하기 일쑤다.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다.
오해에 특화된, 오해가 특기인, 그래서 오해가 습관인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최고의 행복 중 하나다.
천국은 오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곳은 오해 청정 지역이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오해 무균자들이다.
오해 무균자들은 타인의 선의를 믿기 때문에 그들의 실수에 관대하다.
그들에게 음모론은 인기가 없다.
오해 청정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기 행동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해명 요구에 시달리지 않기 때문에 행동이 방어적이지 않으며, 매 순간 자기 행동에 최고조로 몰입한다.
불행한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오해한다
오해가 습관인 사람들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오해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낼 수 있는 단서들이 포착된다.
오해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타인의 선한 행동에는 이기적인 의도가 숨어 있을 것이라고 해석하거나, 타인의 좋지 않은 행동은 돌발적인 상황 때문에 생긴 실수가 아니라, 그 사람의 본성과 의도가 만들어 낸 결과라고 해석하는 것이 오해의 본질이다.
그리고 또 하나, 타인에 대한 적대감이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모든 것이 의심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다.
결국, 오해가 습관인 사람들은 세상을 보는 방식이 기본적으로 부정적이며 적대적이다.
극히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이들은 매우 불행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불신과 부정이 가득하기 때문에 행복이 깃들 여지가 없다.
오해가 습관인 마음의 본질은 다름 아닌 불행인 것이다.
행복한 사람일수록 타인에 관대하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행복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타인을 평가할 때 관대하다.
이들은 타인의 행동을 가급적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정말 그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일 것이라고 해석한다.
반면에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착취한다거나 자신을 호구로 본다고 해석한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선의를 베풀면 행복한 사람은 그 마음을 고마워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상대방을 경계하거나 의심한다.
행복한 교수들이 그렇지 않은 교수들보다 추천서를 더 잘 써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학생에게서 긍정적인 면들을 더 잘 발견해내기 때문이다.
행복감이 매우 낮았던 어느 교수의 추천서를 훔쳐본 한 학생의 절규가 이를 잘 대변해준다.
“제 추천서는 단 두 줄이었어요.”
행복의 천재들은 오해를 잘 하지 않는다.
그들이라고 오해하지 않을 리 없지만, 그들의 오해는 습관이 아니다.
그들의 오해는 산발적이며 쉽게 풀린다.
우리 안의 오해균 제거가 행복의 지름길
오해를 자주 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매우 불행한 사람이라는 점을 알고 나면, 오해하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줄고 오히려 그들에 대한 연민이 생겨난다.
행복감이 낮은 사람들은 습관적 오해로 인해 사람들을 잃는다.
음모론을 습관적으로 제기하기 때문에 신뢰를 잃게 마련이다.
그러니 오해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면, 그리고 상대가 습관적으로 오해하는 사람이라면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오해로 인해 이미 불행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오해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우리 마음 한구석에 서식하고 있을지 모르는 오해균(誤解菌)을 제거하는 일이다.
오해가 습관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예방책으로서는 최상이다.
그들로부터 전염되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한다.
혹시라도 그들로부터 침투된 오해균이 있다면, 타인 행동의 선의를 믿는 것, 그리고 타인의 행동이 실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의 여유를 갖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효과적인 최고의 치료약은 오해 무균자들과 어울려 사는 것이다.
나를 오해하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우리 안의 오해균은 자연스럽게 소멸된다.
덤으로 그런 사람들과 어울릴 때 지상 최고의 천국을 경험하게 된다.
천국에는 오해가 없다.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
엄청나게 많은 크리스천들이 정서적인 건강과 영적인 건강이라는 두 개념 사이에 아무 연관도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정적이고 뛰어난 설교를 하지만, 배우자와 자녀들에게는 냉랭하다.
-매일 기도하고 금식하지만 쉬지 않고 달느 살마들을 비판하는 데다가 그것을 영적인 분별력이라고 정당화한다.
정서적인 성숙의 수준
정서적인 젖먹이
누군가를 보살펴 주기보다는 보살핌을 받고 싶어한다.
다른 사람의 정서적인 세계에 들어가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른 살마들을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그들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주우로부터 사려 깊지 못하고 둔감하며 자기 중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2. 정서적인 아이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며 원하는 것이나 필요한 것은 뭐든지 받아들인다.
대체로 만족스러워하고 정서적으로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망, 스트레스, 분노가 일어나거나 끔찍한 일에 부닥치면 금방 내면이 엉클어진다.
의견 차이를 개인적인 공격으로 해석하고 쉽게 상처받는다.
일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으면 불평하거나 불끈 화를 낸다.
빈정대거나 복수의 기회를 노리는 경우도 있다.
3. 정서적인 청소년
성숙한 어른들의 사회에 무리 없이 ‘편입하기’ 위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잘 안다.
건설적인 비평을 받으면 마음속에서 위기감과 경계심을 느끼고 즉시 방어적이 된다.
누군가에게 베푼 사랑을 무의식적으로 머리속에 기록해 두고 있으므로 나중에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한다.
갈등 상황에 부닥치면 자기 과오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상대방의 잘못을 집요하게 부각시킨다.
자신보다는 상대편이 더 잘못했음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4. 정서적인 어른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고 싶어한다든지 비난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순수하게 존경하며 살아할 수 있다.
배우자, 부모, 친구, 직장 상사, 목회자, 그 밖의 누가 됐든, 그들이 관계적인 필요를 완벽하게 채워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닥친다 해도 피해 의식에 젖거나 남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지 않는다.
의견이 다른 이들에게도 적대감 없이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밝힌다.
자신의 감정과 느낌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누군가의 느낌이나필요, 관심을 다루기 위해 그들의 정서적인 세계에 개입할 수 있다.
욥기의 시험
하나님의 목적:
사탄의 목적:
마태복음 4장의 시험
떡, 인기, 온 세상 권세
관계적 시험 1, 물질적 시험 1, 관계_물질적 시험 1
소외
알려지지 않은 인생들.
알려지기를 원하는 아이들.
사역
13 그리고 당신은 우리를 페이라스모스(유혹, 시험, 시도) 안으로 에이스페로(가지고 들어오다, 가져오다)하지 마시옵고, 도리어 당신은 우리를 그 포네로스(악한, 나쁜) 로부터 흐뤼오마이(구원하다, 구하다 / 명령법) 하소서.
호티 수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카이 해 뒤나미스, 카이 해 독사,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아멘
(왜냐하면 당신에게 그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가, 그리고 그 권세가, 그리고 그 영광이, 영원히.
아멘.)
주석
이 기도의 기원이 주로 종말론적 초점을 갖는다고 이해하는 자들은 이 “시험”을 구체적인 사건, 곧 종말의 때를 시작하는 시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페이라스몬’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은 초점이 그렇게 구체적인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게다가 종말론적 완성을 기쁘게 기대하는 공동체는 이 “시련의 때”를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가 거의 어려운데, 이것 없이는 마지막 대단원이 도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의 기도는 오히려 이 시련을 겪으면서 안전하게 보존되기를 기원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원리르 따라 살려고 하지만 이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는 제자들이 많다는 것은 시험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5장 11-12절에서 상상하는 박해의 종류가 떠오른다.
형식 : 부정적인 기도와 긍정적인 기도의 두 개의 문장으로 연결된 하나의 기도이다.
이 기원은 영적/도덕적인 승리로의 이끄심을 바라는 기도이다.
즉 예수를 믿음으로 그분의 뜻을 따라 우리 안에 새로운 정신을 창조하여 하나님의 은초응로 악이 가득한 세상속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간구하고 있다.
이 마지막 기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이름과 그의 거룩한 나라를 거역하고 싶은 유혹, 독식하고 과식하고 싶은 이기적인 유혹, 용서 받고 용서하는 삶을 거부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절실한 기도이다.
페이라스몬은 히브리어 ‘마사’의 번역어인데, 둘다 ‘유혹’과 ‘시험’이라는 이중적 의미로 사용 된다.
유혹은 대개 부정적 의미로, 시험은 긍정적인/부정적인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주기도문에서 유일한 부정적 기원인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는 부정어 ‘메’와 함께 단순과거 가정법 동사 ‘에이 세네그케스’가 결합되었다.
부정관사와 함께 나타난 가정법은 ‘부정 명령형’으로 대신 사용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게 하지 말라’로 해석되어야 한다.
만약 ‘시험’이 하나님의 훈련인 긍정적인 의미였다면 시험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적으로 통과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 페이라스몬은 ‘부정적인 의미의 유혹’이 분명해진다.
이 시험은 종말론 적인가? 일상생활에서 다가오는 것인가?
페이라스몬에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으므로 특정한 유혹보다는 일반적인 유혹을 의미한다.
특히 제자 됨의 소명을 포기하고 변절로 이끄는 시련과 환난을 의미한다고 보여진다.
이 시험은 일상생활에서 겪는 다양한 ‘고난’이나 ‘재난, 또는 유혹’을 의미한다.
하지만 시험 뒤에 나오는 악마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문장은 이 시험이 일상생활의 실존적인 시험이면서 동시에 종말론적 시험의 상황도 포함한다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포네로우는 소유격으로 중성명사 또는 남성 명사 둘 다로 이해될 수 있다.
중성 명사로 이해하면 악한 행위, 곤궁한 현실, 즉 포괄적인 ‘악’을 나타내는 것이며,
남성 명사로 이해하면 ‘악을 유발하는 악마’를 의미하는 것이다.
중성 명사로 보는 이는 유대교 배경에서 사탄을 ‘악한 자’로 지칭하여 인격적 존재로 나타내는 경우가 별로 없다고 말한다.
유대교 배경에서 악은 사람을 잘못으로 이끌거나 헤치는 다양한 상황으로 이해되었으며, 하나님은 온갖 악으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으로 생각했다.
반면 남성 명사로 보는 주장은 ‘악한 상황’을 반 하나님적인 영적 세력의 의도적인 활동의 결과로 본다.
마태복음 안에서 ‘악’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마태복음 13:19에서 ‘악한 자’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의 병행구인 막4:15에서는 ‘사탄’, 누가복음 8:12에서는 ‘악마’로 나타난다.
따라서 마지막 기원의 ‘악’ 또한 앞의 ‘유혹’과 연결시켜 ‘유혹을 유발하는 악마’인 남성명사로 이해되는 것이 조금 더 타당하다고 보여준다.
이러한 악의 세력은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 완전히 제거될 것이다.
마지막 기원은 따라서 현재의 신앙 안에서 악마의 유혹에서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인 동시에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원하는 기도이다.
송영으로 화답하며 마치는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그의 뜻을 구하며 일용할 양식과 죄 용서와 악에서의구원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만 오는 것임을 고백한다.
따라서 주기도문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과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
산상수훈
산상수훈은 크게 5:1-6:18과 6:19-7:12,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보른캄은 설교의 두 번째 부분을 주기도문에 대한 주석으로 주기도문에 지배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반면, 루츠는 주기도문을 중심으로 산상수훈이 원형구조의 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설명한다.
5:1-2 상황설명
5:3-12 팔복선언
5:13-16 너희는 소금과 빛이다.
5:17-48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제자의 의
6:1-18 제자들의 종교적인 의(구제, 기도, 금식; 9-13은 주기도)
6:19-34 제자들의 경제적인 의
7:1-12 제자들의 사회적인 의
7:13-27 좁은 문, 선한 나무, 반석 위에 지은 집
7:28-29 무리의 반응
산상수훈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가치관과 삶의 지침을 가르치는 동시에 일반 무리ㅇ들에게도 개방된 설교이다.
이들은 형식적인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들과 달리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마태복음 다른 복음에 비해 유대적이다.
저자는 이미 기도를 알고 있떤 유대인들을 위해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이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예수 가르침의 핵심으로 알려진 산상수훈(5-7장)의 중앙에 위치한다.
즉 제자들이 행해야 할 세 가지 선행인 구제(6:2-4), 기도(6:6-7), 금식(6:16-18)의 실천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주기도문은 바리새파의 위선적 행위와 달리 예수의 제자들에게 알맞고 짧고 진실한 기도를 바치라는 반명제적 성격을 띤다.
요아킴 예레미아스, 산상설교
8복(5:3-16)
반어적 가르침 (5:17-48)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 (6:1-18) - 여기에 ‘주기도문’ 위치
제1계명에 대한 설교 (6:19-7:11)
결론적 권면
주기도가 산상수훈 본문의 구조상 한 가운데 즉 핵심에 위치되어 있다.
산상수훈의 전체적인 주제가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면 주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인 것이다.
겟세마네에서도 예수는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기도해야 함을 가르친다.
주기도문에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의 내용을 보면 시험과 기도가 밀접한 관계임을 알게 한다.
시험은 시험하는 자 즉 사탄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마이어는 시험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여 자기에게로 이끄는 악마의 시도라 한다.
그래서 시험은 인간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싸우는 자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악마에게 넘어갈 수 밖에 없다.
겟세마네 기도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는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질 능력을 받게 되셨다.
그는 당위이며,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숭고한 뜻이었다.
예수는 기도 응답으로 세 가지 결과를 얻게 되었따.
심히 고통스러웠던 마음이 안정과 확신을 얻게 되었다 (마 26:45)
예수님은 그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가 인자로서 죄인들의 손에 팔리는 시간이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되었다.
구제, 기도, 금식에 관한 말씀 중 기도가 특별한 것은 주기도문이라는 구체적인 기도문을 주시기 때문이다.
예수는 사탄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염두에 두고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고울더는 ‘마태는 주기도문을 새로운 시내산의 문맥 안에서 설정’하였다고 주장하며, 주기도문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출애굽을 상기시키는 기원으로 시작한다’고 말한다.
새 출애굽은 노예해방, 주권회복, 영토회복을 포함한다.
새 출애굽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가 회복되는 과정인 것이다.
주기도문에서 하나님 나라의 임하기를 기원함은, 곧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영토), 자신의 백성들을(국민), 통치하시는(주권) 상태이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바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에서볼 수 있듯이, 출애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며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그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죄 사함(빚 탕감)은 새 출애굽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년마다 면제년을 통하여 빚을 탕감받았다.
유대인들은 죄를 짓는 것이 하나님께 빚을 지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마태는 유대독자들에게 하나님께 지은 죄인 빚을 탕감받는 안식년이 오기를 기도하도록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죄의 용서는 관계의 회복으로 이어진다.
주기도문 직후 첨가된 용서에 관한 이야기는(마 6:14-15),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용서를 통한 관계의 회복으로 나타남을 강조하는 것이 분명하다.
악으로부터의 구원(마6:13)은 이 땅에서 악한 세력에 매여 고통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이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이라는 커다란 악한 세력에 매여 노예로서 고통받고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면 사탄의 노예들이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서잉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는 주기도문을 통해서 희년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악한 자로부터의 구원은 사탄의 통치로부터 하나님의 통치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사탄으로부터의 보호 청원은 앞의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의 도래에 대한 청원과 사실상 인클루지오를 이루”고 있으며, 주기도문을 크게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죄와 시험과 악한 자에게 묶여 있던 끈을 끊어 죄를 용서받고 시험에 들지 않는 것과 악한 자로부터 구원받기를 청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앞선 청원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고 나라가 임하고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통치권의 변화>> = 하나님 나라의 도래
그리스도의 초림 사건으로 사탄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는 새 시대가 도래하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 사건으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임했다.
6:1-18 하나님 앞에서의 ‘나은 의’
6:1-4 더 나은 구제
6:5-8 더 나은 기도
6:9-15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
6:16-18 더 나은 금식
6:19-24 주기도의 제1, 2, 3 간구 해설
6:25-34 주기도의 제4 간구 해설
7:1-5 주기도의 제5간구 해설
7:6 주기도의 제6간구 해설
7:7-11 기도하라는 가르침
7:12 주제 영역의 결론 : ‘나은 의’의 요약 - ‘황금률’
7:13-27 결론 : ‘나은 의’ 선택을 위한 결단 촉구 : ‘두 가지 길’ 사상
주기도문의 간구는 “하나님께 대한 간구”와 “우리에 대한 간구”로 이루어졌다.
마태에게 가장 큰 계명이었던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담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아스는 “주기도의 마지막 간구는 실로 ‘유혹으로부터의 보존’을 뜻하기보다는 오히려 ‘유혹 안에서의 보존’을 뜻한다”고 말하였다.
예수는 마귀의 유혹을 회피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 대결을 하여 그 유혹을 물리쳤으며, 십자가 앞에서도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면서 철저히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맡김으로 이 모든 유혹을 친히 감당하였으며 또한 제자들도 유혹에 빠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바랐다.
수사적인 점층법
: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도리어 악에서 구하여 주소서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왕이시며, 진정한 주권자이시며, 역사의 진정한 완성자임을 고백한다.
과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자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고, 나라가 오게 하시고, 뜻을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가 죄 사함과 유혹과 악에서의 구원과 승리를 가져 오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송영을 받으실 분이시다.
구원 =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상태.
깨어있음 : 유혹을 극복하고 악을 분별하고, 악의 권세에 저항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갈등의 원인
세상 안에 있는 모든 모순과 갈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도래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때에 비로소 완전히 제거될 것이다.
106-107문
제106문.
여섯 번째 간구에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답.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여섯 번째 간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에 시험당하지 않도록 지켜 주시기를, 또는 우리가 시험당할 때 붙들어 주시고 건져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지키시거나
또는 시험 당할 때 우리를 도우시고 건지시기를 간구
세상은 끊임없는 사단의 유혹으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호를 구해야 한다.
전적 무능 : 인간의 지혜와 힘의 한계를 고백하는 것이다.
시험의 목적은 항상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이다.
시험은 항상 우리 자신의 낙관적 사고를 무너뜨리고,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한다.
희망은 오직 주님께 있다.
이것이 시험의 목적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혀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만 드러내게 된다.
헌법해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 대소교리문답서 ((8) 여섯째 기원)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아버지의 나라를 임하게 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오셨다.
이 때문에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사탄,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들 사이에 이미 종말론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순간 우리도 이 싸움에 동참하며, 우리의 삶 또한 시험 중에 이루어지는 전투 가운데 있다.
우리는 항상 시험의 위협 속에 산다.
예수님은 우리를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여 줄 것을 아버지께 간구하였다(요 17:15).
우리 신조는 악을 중성이 아니라 악자 곧 사탄으로 보고 해설한다.
우리는 시험과 어려움을 만나지 않게 하셔서 감사드린다는 기도가 아니라 시험을 이기게 하여 주실 것을 기도하고 이기게 하셨음을 감사드려야 한다.
우리는 사죄함을 받고 나서도 항상 시험에 빠질 수 있고 스스로 헤쳐 나올 수 없는 나약한 자들이다.
우리는 시험으로 성화를 이루며 온전하게 되어 사탄의 나라를 짓밟으며 영원히 죄와 시험에서 해방될 날을 고대하며 기도해야 한다.이처럼 이 기원도 성화와 영화를 바라보는 간구로서 믿음의 법칙을 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세상 속에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고난을 받아야 한다.
이 점에서 사회악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우리가 항상 직면하고 있는 삶의 현장의 모습이기도 하다.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우리는 사회악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고리들이 있어서 우리가 피동적으로 관여할 수밖에 없는 악들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나아가 악을 적극적으로 자행하는 범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회악을 경계하고 제지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가령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같은 일이다.
기독교적인 학문 연구나 사회생활 분석 등이 필요하다.
기독교 언론이나 기독교 노동운동, 기독교 정당 등에 관한 관심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제107문.
주기도문의 결론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답.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주기도문의 결론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기도 중에 용기를 얻을 것과, 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우리의 기도 중에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원과, 들어 주신다는 확신에 대한 고백으로, 우리는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오직 하나님에게만 용기를 얻음
우리 기도 중에 그를 찬양할 것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아버지께로 돌리면서)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 : 1) 우리 소원의 선서로서, 2)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서
주기도문의 결론은 “하나님께 영광 돌림”이다.
소요리문답 시작부분에서 사람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결론 부분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마친다.
주기도문의 결어,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 가지고 있는 가치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이유들을 가지고 우리의 기원을 강화해야 함을 가르친다.
또한 하나님께만 영원한 주권과 전능함과 영광스럽게 탁월하심을 돌리는 찬양이 담긴 기도로 우리의 기원을 강화해야 함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이런 주권과 전능하심과 탁월하심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꺼이 도와주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기를 믿음으로 담대하게 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제목들을 이루어 주시도록 잠잠히 그분을 의지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며 확신임을 증언하기 위하여 우리는 “아멘”이라고 말한다(대196).
송영은 누가복음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마태복음에서는 괄호 안에 나타난다.
대부분의 고대 신약 사본에는 송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송영은 후대에 첨가된 것이며, 송영이 없는 것이 원래 본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럼에도 주후 1세기경에 기록된 「디다케」에는 “권능과 영광이 아버지의 것입니다”는 송영이 나타난다.
유대인들의 기도도 송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으며, 주기도문이 시험과 악한 자에 관한 언급으로 끝이 나는 것도 어색하다.
이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는 것은 어렵다고 여겨진다.
우리 신조는 주기도문의 결어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송영과 동시에 만유가 주께로 돌아간다는 송영으로서 모든 기원들을 강화한다고 해설한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원을 들어 기꺼이 도와주실 것을 믿음으로 구하며 응답하실 그분을 조용히 기다리고 의지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확증으로 아멘이 나온다고 첨언한다.
예수님께서 고난과 십자가의 삶을 통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렸듯이, 이제는 우리도 이 고난을 통한 성화로써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린다.
아버지 하나님은 항상 영광 중에 계신다.
천사들은 주님 앞에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사 6:3)고 송영을 드린다.
천사의 이 송영이 성도들이 영원한 나라에서 부를 찬송이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옵니다”(계 4:11).
계시록에서는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예수님께도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드린다(5:12–13).
즉 고난을 통한 영광,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주어질 영광이다.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아버지의 것이라는 고백은 선언 이상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아버지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증거 되었고, 이제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서 증거 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이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그리스도의 것이요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것도 될 것이다.
우리는 ‘아멘’하면서 동의하고 실행해야 한다.
주기도문
매거진 re 2019년, Vols.
68–79 (주기도문의 중요성)
역사 속의 교회는 언제나 주기도문을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주기도문은 세례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했다.
수세자(세례를 받는 사람)는 주요 교리를 분명히 아는 것과 함께 반드시 주기도문을 암송할 수 있어야 세례를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
성도들은 집에서도 계속 주기도문을 암송해야 했다.
이런 전통은 오래 이어졌다.
16세기에 루터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참된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아침에 일어날 때 주기도문이 바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기도문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배우고자 하는 것이 성도의 자세다.신앙에는 언제나 기본이 중요하다.
신앙의 기본이 되는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이 우리 신앙에 지속적인 선생으로 작용해야 한다.
우리는 신앙 성숙을 위해 묵직하고 두꺼운 책도 열심히 읽어야 하지만, 그와 함께 제일 기본이 되는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으로 늘 되돌아가야 한다.
여기서부터 끊임없이 출발할 수 있어야, 신앙이 건실한 토대 위에 세워진다.
신학도 마찬가지다.
복잡한 사상과 이론에 빠져 이러한 기본을 망각하면, 핵심과 토대를 상실한 신학이 된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일평생 주기도문을 기도의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주기도문은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한국 크리스천에게 익숙한 마태복음 6:9–13과 보다 짧은 형식의 누가복음 11:2–4에 나타나는 주기도문 가운데 어떤 것이 원문인가?
논의의 범위를 좁혀, 마태복음 6:13b의 송영을 NTG28(NA)은 본문에서 생략하지만, GNT5, 대부분의 『한글 성경』(1938년 ‘성경 개역’에도 괄호로 처리함), 『독일어 성경』(1984), 『따갈로그 성경』(2013), 『화란어 성경』(1951), 그리고 『영어 성경』은 괄호 안에 표기한다.
다수 사본을 따르는 『헬라어 성경』(1982)은 송영을 포함하면서, 각주에 ‘א B vs μ’라고 표기한다.
『터키어 성경』과 『페르시아어 성경』에서는 송영을 괄호 없이 본문에 포함시킨다.
그러나 NIV, ESV, 『아프리칸스 성경』(Die Bybel, 1999)은 송영을 삭제하고, 각주에서 밝힌다.
원본에 송영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공관복음 유래’와도 연결된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81–82년에 깜뻔신학교(Broerderweg) 신약학 교수 판 브럭헌(Jakob van Bruggen, b. 1938)과3 칼빈신학교 신약학 교수 밴드스트라(Andrew J. Bandstra, b. 1926)가 「칼빈신학저널」(Calvin Theological Journal)에 기고한 논문을 중심으로 비교하여 비평할 것이다.
1. 판 브럭헌이 원본으로 선호한 송영을 가진 긴 본문
다수 사본을 원본에 일치하는 것으로 보는 판 브럭헌은 마태복음 6:13b의 송영(Ὅτι σοῦ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καὶ ἡ δύναμις κα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Ἀμήν.)은 괄호로 처리할 것이 아니라, 다수 사본처럼 원본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제시하는 근거는 크게 6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원본 추적은 라틴어 역본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헬라어 사본에 근거해야 한다.
이것은 ‘요한의 콤마’(Johannine Comma[짧은 절])라 불리는 요한일서 5:7b–8이라틴어 역본의 광범한 지지를 받지만, 원본으로 보기는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2) 원본 추적에서 서방의 라틴어 역본이 헬라어 사본보다 덜 중요하다는 위의주장(1)은 적절한데, 서방 예전에서 마태복음 6:13b의 송영을 생략한 이유는 라틴역본(벌게이트)에서 송영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즉 역본이 예배 형태에 영향을미쳤다.
(3) 그렇다면 동방교회의 예전에 송영이 포함된다는 사실은 (동방 비잔틴 계열의) 다수 사본이 송영을 포함하는 원인이 될 수 있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다수 사본은 일관되게 송영의 3중 요소(당신의 나라, 권세, 영광)를 가지고 있지만, 동방 예전은 송영의 다양한 형태를 보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송영이 일관되게 나타나는 다수 사본이 고정된 송영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은 동방 예전으로부터 나왔다고 볼 수 없다.
동방 예전에 나타나는 송영의 몇가지 형태는 동방교회가 주기도문의 표현(wording)에 자유를 가지고 있었음에도불구하고, 송영이 주기도의 기본적인 형식에 속했다고 인지했음을 암시한다.
즉동방교회는 송영의 다양한 형태를 예배 중에 활용했지만(참고.
딤후 4:18), 송영을포함하고 있는 본문을 생략하는 자유는 가지지 못했다.
(4) 수천 개의 헬라어 사본 가운데(L[8–9세기], W[5세기], Θ[9세기], 0233 그리고소문자 사본), 단지 9개만 송영을 생략한다.
이 9개의 사본의 가치는 나머지 다수 사본보다 더 중요한가?
그렇지 않다.
소수의 고대 사본이 마태복음에서 송영을 생략하는 것은 마태복음을 누가복음의 표현에 일치시키려는 우발적(incidental) 현상이다.
더욱이 א와 B가주기도문과 신약 다른 구절에서 본문을 문헌학적으로 재작업(philological reworking)했다는 여러 증거가 있다.
따라서 송영이 생략된 누가복음에 일치시키기 위해서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고대 사본들이 마태복음에서도 송영을 생략했다고 볼 수 있다.
판 브럭헌은 송영을 포함하는 주기도문이 알렉산드리아, 가이사랴,서방, 비잔틴 계열의 지지를 골고루 받는다고 주장한다.
사본의 나이가 아니라(선조)본문의 나이를 고려한다면, 송영을 포함하는 옛 라틴 역본은 긴 형태의 주기도문이 오리겐 이전인 A.D. 2세기경에 이미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판 브럭헌은 제롬의 벌게이트 역에 송영이 생략된 이유를 제롬이 송영이 빠진 사본을 참고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결과적으로 제롬의 벌게이트(A.D. 400–420)는 후기 서방 예전에서 송영이 생략되도록 했던 하나의 요인이었다.
(5) 예전의 영향은 일부 고대 대문자 사본에서 어떻게 송영이 생략되었는가를 설명해준다.
많은 경우 동방 예전에서 회중이 주기도를 외우면, 사제가 송영을 말하고, 마지막으로 회중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따라서 회중이 아니라 사제가 송영을말했기에, 송영이 주기도문의 원본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고가 생겨났다.
(6) 누가복음의 짧은 형태는 본문의 손상 혹은 말시온의 영향으로 발생한 결과로볼 수 있다.
말시온은 주기도문을 축소했다.
예를 들어,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과피조계와 관련된 요소들(‘하늘,’ ‘하늘과 땅,’ ‘악한 자’)을 생략함으로써, 하나님과창조의 신(creator-god) 사이의 부적절한 관련을 예방한다.
판 브럭헌은 누가복음을 포함하는 헬라어 사본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누가복음 11:2–4의 주기도문에송영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비평사본주의자의 주장대로, 송영이 없는 주기도문 원본에 송영이 후대에 추가되었다면, 왜 송영은 누가복음의 사본들에 나중에 추가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판 브럭헌은 제기한다.
2. 판 브럭헌의 주장에 대한 밴드스트라의 비평
(1) 마태복음 6:13b의 송영을 포함하지 않는 헬라어 사본의 수는 판 브럭헌이 주장하듯이 9개가 아니라 14개라고 밴드스트라는 주장한다: א, B, D, Z, 0170, 1, 17, 118, 130, 131, 209, 372, 1582, ɭ 547.
판 브럭헌은 본문비평에서 헬라어 사본의지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가(1979), 나중에는(1982) 옛 라틴어 역본의지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리고 판 브럭헌의 주장과 달리 ‘요한의콤마’는 서방 계열의 광범위한 지지가 아니라 후대 라틴어 역본의 지지만 받는다.반면에 마태복음 6:13b의 송영이 생략된 형태는 알렉산드리아 계열과 서방 계열의 헬라어 대문자 사본은 물론이거니와, 라틴어 및 다른 고대 번역본의 지지도 받는다.
(2) 판 브럭헌이 주장하듯이, 마태복음 6:13b의 송영을 생략한 서방교회의 예전이 라틴 역본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서방교회가 예전에서 송영을 생략한 이유가 무엇인지 판 브럭헌은 설명해야 한다.
단지 누가복음에 송영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서방교회가 송영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추론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송영이 생략된 이유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의 원본에 송영이 포함되지않았다는 서방교회의 확신 때문으로 보인다.
이 현상을 서방 본문인 D가 잘 보여준다.
(3) 판 브럭헌은 동방 예전의 영향으로 송영이 다수 사본에 첨가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몇 몇 사본은 예전의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일부 헬라어사본은 ‘영원히’를 ‘영원 영원히’로 확대하거나, ‘아멘’을 추가한다(소문자 사본17).
그리고 일부 소문자 사본(157, 225, 418)은 ‘영광이’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영광이’로 확대한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6:13b의 송영도 역대상 29:11–13을반영한 동방 예전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수 있다.
그리고 송영이 원본에 포함되었다면, 동방교회가 주기도문의 원래 표현을 변경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고 판 브럭헌이 주장하는 것은, 성경 원문에 대한 존경을 약화시키는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오히려 동방 예전에서 송영이 생략된 이유는 송영이 주기도의 원문에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사본의 숫자가 곧 무게라고 판단하는 판 브럭헌은 헬라어 사본의 다양한 계열(알렉산드리아계의 א와 B, 서방계열의 D와 옛 라틴 역본, 소위 가이사랴 이전계열의 소문자 사본들[f1], 터툴리안, 오리겐, 키프리안과 같은 초기 교부들 등)이송영을 생략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A.D. 100년경의 『디다케』 8:2(“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 것이기 때문입니다”)를 제외한다면, 헬라어 사본 가운데 5세기의 W에서 송영이 처음 등장하는 것도, 송영이 원본에 포함되지 않은 증거다.
교부의 증거와 관련하여, 오리겐(d.
254)의 “웅변술에 관하여”(De Oratorio)18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에서 송영이 없는 본문을 지지하기에 밴드스트라는 판 브럭헌이 오리겐을 오독했다고 본다.
또한 밴드스트라는 암브로스(d.
397)가 “성례에 관하여”(De Sacramentis) 5.4.18과
6.5.24에서 송영이 없는 것을 지지한다고 본다.
밴드스트라가 볼 때, 터툴리안(d.
225)의 “기도에 관하여”(De Oratione)에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난다.
(5) 판 브럭헌은 동방 예전에서 회중이 아니라 사제가 송영을 말했으므로, 송영이 주기도문 원본에 빠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어느 시기의 동방 예전에서 발생했는지 불분명하다.
『디다케』 등에 따르면, 사제는 송영을 말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5세기 이전의 헬라어 사본이나 라틴어 역본이나 교부에 송영을 포함한 것은 없다.
참고로 A.D. 407년에 사망한 크리소스톰은 송영을 포함한다.
따라서 긴 형식의 주기도문을 포함한 헬라어 사본이 A.D. 2세기에 존재한 것이 아니라, 5세기 이후의 헬라어 사본에 주기도문의 송영이 추가된 것으로 보는 게 옳다.
3. 판 브럭헌의 주장과 밴드스트라의 주장에 대한 비평
(1) 판 브럭헌이 주장대로 송영을 포함한 마태복음의 긴 주기도문이 원본이라면, 공관복음 유래에 있어서 마태우선설을 지지하는 근거가 된다(참고.
어거스틴 가설).
그런데 판 브럭헌은 일부 고대 대문자 사본들이 누가복음과 표현을 일치시키려고 송영을 생략했다고 주장하기에 누가우선설도 따르는 듯하다.
판 브럭헌은예수님이 사역 초기에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를 가르쳐주셨고, 그 후 사역 후기에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누가복음 11장의 주기도를 다시 가르쳐주셨다고주장한다.
따라서 판 브럭헌은 마태와 누가가 서로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추론하는 듯하다.
판 브럭헌의 이런 주장들로부터 추론해 보면, 공관복음 유래는 특정 복음서의 우선설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런데 판 브럭헌이 예수님이 주기도를 두 번이나 가르쳐주셨다고 추론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의 비유가 복음서에 약간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에, 예수님이 주기도를 한 번만 가르쳐주셨고 복음서 기자는 성령의 영감으로 자신의 기록목적에 맞추어 변경을 가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유대인 출신그리스도인이 다수를 형성한 마태 공동체와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이 다수를 형성한 누가 공동체(그리고 데오빌로)의 형편을 고려하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기록목적의 빛 아래에서 송영의 원본 여부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
(2) 판 브럭헌은 A.D. 2세기에 긴 형식의 주기도문이 존재했다고 가정한다.
이런가설의 바탕에 후기 소문자로 기록된 다수 사본의 조상 본문이 자리잡고 있는 것같다.
그러나 다수 사본의 조상 본문은 현존하지 않고, 설령 존재했다고 하더라도어떤 형태였는지 알 수 없다.
(3)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송영/찬송의 빛에서 송영의 원본 여부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 1–2장에 찬송/송영이 많이 등장한다.
따라서 누가복음11:2–4에서는 송영을 생략한 것이 아닐까?
이런 가능성에 판 브럭헌과 밴드스트라는 주의를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
(4) ‘행동의 복음’이라 불리는 마가복음에 산상설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어 영생을 얻도록 하는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에 주기도는 필수 요소가 아니었던 것 같다.
사도 요한은독자들이 주기도를 알고 있다고 전제했을 수 있다.
마태는 산상설교 안에 긴 형식의 주기도를 위치시키고, 누가는 여행 기사 안에 짧은 형식의 주기도를 위치시킨다.
그렇다면 주기도의 위치는 주기도의 원문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묻어야 한다.
지면의 제한 때문인지 판 브럭헌과 밴드스트라는 마태와 누가가 선호한 문체나 스타일과 같은 본문비평의 내증에 관한 연구를 심도 있게 다루지 못했다.
따라서 “마태와 누가는 송영을 가지고 있는 기도문을 선호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판 브럭헌도 기도문에 송영이 없는 것이 일면 자연스럽다고인정했다.27
(5) 판 브럭헌과 밴드스트라는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서 자료를 환원주의방식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예는 『디다케』의 활용 방식과 암브로스의책의 내용에 관한 두 학자의 논쟁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A.D. 2세기에 송영을 포함하는 주기도가 존재했을 수 있다는 가정과 2세기의헬라어 사본에 송영을 가진 주기도문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구분해야 한다.
A.D. 1세기 초대교회의 예전은 송영을 갖춘 기도(예.
18축도문, 1QM 18:13)를 드린 회당의 예전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더불어 마태복음 6:9–13a의 시적표현이 13b에도 이어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4. 결론
사본과 고대 교회의 예전을 종합해 볼 때,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13b의 송영이없는 것을 원문으로 삼는 것으로 결론내릴 수 있다.
따라서 A.D. 2세기 이후의예전을 위해서 송영이 추가되었지만, 헬라어 사본에는 5세기 이후로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송영의 가치는 평가 절하될 수 없다.
깜뻔신학교(Oudestraat)의 리덜보스(H.N.
Ridderbos, d. 2007)는 후대에 첨가된 송영은 주기도문의 주 내용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주기도의 가장 적절한 종결부라고 설명했으며, 오스본(G.R. Osborne)은 송영을 ‘주기도의 요약’으로 간주한다.
심지어 최갑종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의 지상 사역기간 동안 송영이 있는 주기도문을 사용했을 수 있다고 추론한다.
따라서 현대예배에서 송영을 포함한 주기도를 찬송이나 기도로 활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참고로 누가복음 11:2–4의 주기도문의다양한 이문들에 관한 본문비평은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다.
대요리 195-196문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노트 (195문)
195문.
여섯 번째 간구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답.
여섯 번째 간구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에서, 우리는 먼저,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공의로운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명하셔서 우리가 유혹에 공격받고 좌절되고 잠시 동안 사로잡히게 하시고,2) 사탄과 세상과4) 육신이 우리를 강력하게 곁길로 끌어내고 덫에 걸리도록 하게 하시며, 우리는 죄를 용서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부패하고6) 연약하고 깨어 있지 않아서 유혹에 굴복하고 우리 자신을 유혹에 내어줄 뿐만 아니라,8) 우리 스스로는 유혹에 저항한다거나 유혹에서 빠져나와 회복하려 한다거나 유혹을 자기반성과 성장의 기회로 삼으려고 하지도 않고, 그럴 마음도 없어서 유혹의 권세 아래 내버려 둠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10)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육신을 굴복시키시고,12) 사탄을 제어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14) 은혜의 모든 수단을 베푸시고 그 수단들에 복을 주시며, 우리를 소생시키셔서 그 은혜의 수단들을 주의 깊게 사용하게 해 주시기를, 그래서 우리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유혹에 빠져 죄 짓지 않게 해 주시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만약 우리가 유혹을 받게 된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굳게 붙들어 주시고 유혹의 때에 견딜 수 있게 해 주시기를,17) 또는 우리가 유혹에 빠져 넘어진다면, 다시 일어나 유혹에서 벗어나 회복되고, 이렇게 유혹에 빠져 넘어진 일이 오히려 우리가 거룩하게 되고 성장하는 데 사용되기를,19) 그래서 우리의 성화와 구원이 완성되고, 사탄이 우리의 발 아래 짓밟히고,21) 우리가 죄와 유혹과 모든 악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롭게 되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196문.
주기도문의 맺음말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답.
주기도문의 맺음말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는 합당한 이유들을 가지고 우리의 간구를 더욱 강력히 주장해야 함을 가르칩니다.2)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 안에 있는 가치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이유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또 영원한 주권과 전능하심과 영광스러운 위대하심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는5) 찬양을 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수 있고 또 기꺼이 돕고자 하시기 때문에6) 우리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음으로 담대하게 간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이루어 주시기를 잠잠히 의지해야 합니다.8)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요 확신임을 증언하기 위해 우리는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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