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를 흔드시는 하나님

요나 : 그럼에도 널 사용한다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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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보다 옳은 모든 것을 내려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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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1 : 요나 마무리

오늘은 <요나 : 그럼에도 널 사용한다> 시리즈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요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오늘도 동일하게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발견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요나서를 쭉 한 번 돌아볼까요. 요나라는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어느날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앗수르의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앗수르는 요나의 고향 북이스라엘을 훗날 멸망하게 하는 원수와도 같은 존재였죠.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 반대편에 있는 다시스라는 곳으로 도망 갔습니다.
근데 뭘 만나죠? 폭풍을 만납니다. 그래서, 요나는 죽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고래를 만납니다.
요나는, 도망 치지도, 그렇다고 죽지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데, 그 결과로 자신이 니느웨라는 성에서 전했던 것처럼 다 멸망하길 바랐는데, 정말 원수 같은 이방인들 아니 야만인들에게 하나님이 용서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매우 싫어하고 성내는 요나의 모습까지 우리가 함께 봤습니다.

서론2 : 요나 인생,(요)나의 인생을 이리저리 흔드시는 하나님

요나의 인생은 정말 이리저리 흔들렸습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마음대로 된 것도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대로 됐다면 니느웨라는 성읍이 멸망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우리도 짧지만 인생을 살아오다 보면 내 삶이, 내 환경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일이 무엇이든지, 당사자 본인에게는 마치 요나가 맞이한 폭풍 같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요나의 인생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 가운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요나가 했던 모든 선택들에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유튜브에 정말 많이 나오던 말이 있는데, 바로 ‘경제적 자유'라는 말입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누구나 안정적인 상태를 바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흔들리는 요나의 삶의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동일하게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그다지 반가운 내용은 아닙니다.
또한 이는 요나에게도 마찬가지여서, 그 또한 참다참다 드디어 요나서 4장에 이르러 “매우 싫어하고 성을 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필그림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요나의 삶을, 또 (요)나의 삶을 흔드시는 걸까요? 괴롭히고 싶어서? 불순종해서? 벌을 받으라고?
오늘 우리가 함께 보는 요나서의 마지막 말씀은 하나님께서 왜 지금껏 요나의 삶을 흔들어 오셨는 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 필그림 여러분도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알아가는 복된 시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론1 : 박넝쿨, 벌레, 동풍. 약도 병도 “예비”하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은 6절부터 니느웨 성읍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요나에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들을 나열하듯 말씀합니다.
먼저 6절에서는 박넝쿨을 예비하셨습니다. 그가 날이 뜨거워 그늘 아래 앉았는데, 박넝쿨이 그의 머리까지 가려지게 한 것입니다. 건조하고 더운 나라에서는 그늘만 들어가도 시원하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요나가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죠.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7절에 또한 벌레를 예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셨습니다. 우리 자는데 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잖아요. 자다가 갑자기 눈으로 햇빛이 스치듯 들어오면 어때요? 싫죠. 이게 싫어서 암막커튼 쓰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니까. 그가 어떤 표정으로 일어났을지 우리 모두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박넝쿨을 주셨다가, 도로 뺏어 가셨으니까. 이제 쌤쌤하고 끝내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8절에서 하나님은 “뜨거운 동풍"을 또한 예비하셨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병주고 약주고”, 아니 박넝쿨을 먼저 주셨으니까. “약주고 병주고”, 또 “Give and Take” 와 같은 일반적인 원리가 무시되는 상황 아닌가요?
하나님이 주신거니까 박넝쿨 가져가시는거? 오케이. 근데 뜨거운 동풍? 이건 못 참죠. 그래서 요나도 8절에서 말하기를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저, ‘때로는 주신 것 이상으로 가져 가시기도 하니까, 가져가셔도 잠자코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배울 수 있는걸까요? 하지만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오히려 “이 또한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지금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예비하신 것들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폭풍과 큰 물고기는 요나 또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을 쉽게 알아챘습니다. 그건 크고 일반적이지 않으니까요. 마치 사실 산타는 없지만, 아이들이 왜 산타를 믿습니까? 자기가 가장 갖고 싶은건 분명히 엄마랑 아빠랑 나만 아는 사실인데 그걸 누가 선물해주니까 믿는거 아닙니까?
그러나 이에 반대로 우리 또한 박넝쿨이나 벌레, 동풍 바람 같은 너무나도 작은 일들에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어제 대학5부 축구 할 시간에 내리기로 예정됐던 비가 당일이 되니까 점심에 내리고 끝나버려서 감사히 축구 할 수 있었던건 별로 감사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사실 우리는 작든 크든 상관 없이 이러한 하나님의 예비하심 가운데,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뿐이죠. 하지만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예비하심으로 채우셨다는 것을 알게 됐음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요나에게 사나운 폭풍과 큰 물고기를 얘비하시고,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것처럼 박넝쿨과 벌레, 뜨거운 동풍과 같은 작은 것들까지 예비하시면서 요나의 삶을 흔들고 계시는 걸까요? 그 내용은 이어 등장하는 하나님과 요나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본론2 : 하나님과 요나의 대화. 요나의 속내를 꺼내게 만드시는 하나님

잔뜩 성이 나있는 요나에게 말씀하시는 9절 말씀을 우리가 볼 때 지난 주 본문이었던 4절과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주 우리 이윤기 목사님의 설교 제목이었죠. “요나야,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그런데, 동일한 질문을 9절에서 다시 하고 계신겁니다.
한글 번역에는 “어찌"가 들어가서 마치 4절에서의 질문에서 발전된 질문으로, 이유를 묻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원문에는 ‘왜' 혹은 ‘어찌'와 같은 표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9절은 무슨 내용일까요? “제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옳으냐?”고 물으시는거죠.
처음 4절에서 물으셨을 때 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는 이제 요나는 어떤 대답을 합니까?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옳습니다!”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 말은 곧 무슨 말이에요? “내가 옳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틀렸어요!” 라고 말하는거죠. 이게 요나의 진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이 진심을 입 밖으로 말할 때까지, 그 진심을 드러내기까지 계속해서 계속해서 예비하셔서 그의 삶을 흔드셨던 것입니다. 4절에서 그가 대답하지 않았다고 해서 요나가 하나님이 틀렸다는 생각을 안했을까요? 아니요. 요나서 1장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라는 성읍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그 순간부터, 요나는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은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도망쳤던 것이죠.

예화 : 미안한 남자와 뭐가 미안하냐는 여자, 그리고 남자의 속내

우리 길 걸어가다 보면 한 번씩 이런 커플 보죠. 여자친구는 남자친구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고, 남자친구는 꼭 어딜 봐요? 멀리 보고 있어요. 그러다 남자가 입을 조심스레 뗍니다. 뭐라고 말할까요?
그렇죠. “미안해"
그럼 자매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뭐가 미안한데?”
이걸 몇 번 반복하게 돼요. 그러다가 형제가 벌컥 화를 내면서 말합니다. 뭐라고?
그렇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그런데 이 때 더 미안하다고 하셔야 합니다. 파이팅)
아무튼, 남자친구는 미안하다고 했는데 미안해요 안 미안해요? 미안한게 아니죠. 아무리 좋게 봐줘도 “제대로" 미안한건 아닌거죠. 자기는 잘못한게 없다고 생각한거죠.

본론 3 : 요나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모르셨을까?

요나도 지금 자기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있죠.
하지만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마음의 중심을 아셨을텐데, 왜 요나를 몰아세우고 흔들어서 그의 진심을 입 밖으로 꺼내게 했을까요?
먼저는 요나를 위해서 입니다.
요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한 순종이 아니었던 것처럼 요나는 늘 마음 가운데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품은 채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침내 요나가 스스로 자백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갖고 있는 반감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요나서의 저자는 요나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데요. 요나가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가감 없이 적어놓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는 요나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과의 대화 이후에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자로 살아 갔으리라 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요나가 이 부끄러운 내용의 책을 쓰지도 않았겠죠.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두번째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입니다.
요나의 고백은 단순히 요나 개인의 고백으로 해석하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나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가장 마지막 책 말라기에 가면 그들은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말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말1: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이렇게 변명하는 백성들에게 요나서는 그야말로 자신의 심령 깊숙한 곳을 찌르는 솔직한 고백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요나의 고백은 이스라엘을 위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셋째는 모든 인간을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못 박았던 이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거짓 증인을 세우고 심지어 유명한 죄인 바라바를 예수님 대신 풀어주자고 주장했던 사람들 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 생각하던 이스라엘의 제사장들 지도자들의 행동은 사실 자기 생각이 더 옳다는 요나의 외침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었겠죠?
결국 요나의 고백은 모든 인간마다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옳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이윤기 목사님께서 “가짜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셨죠? “이건 안돼요 주님. 나 주님 좋아하는데, 이건 아니에요" 하면서 우리 모두에게 가짜 하나님이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가짜 하나님이 누구라고 말씀합니까? 자기 자신이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죄성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를 지금까지 계속해서 흔들어 오신 것입니다.

결론 : 요나와 나를 흔드시는 이유는 우리 죄성을 깨닫게 하시고, 은혜를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성을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를 흔드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 뜻보다 내 뜻이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지를 알게 하시려고 우리를 흔들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저 ‘너가 이렇게 나를 멸시하고 무시하는 죄인인걸 알았으면 됐다'고 말씀하시려고, 그걸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의 삶을 때때로 흔드셨다면 하나님은 참 엄하시고 무서운 분이시라고 생각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직 미처 다루지 않은 두 구절. 10절과 11절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감사를 건내줍니다. 함께 10절과 1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욘4:10-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사랑하는 필그림 여러분, 하나님께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이방인도 사랑하시는데 요나를 사랑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분의 뜻보다 내 뜻이 더 중요하고, 그분 생각보다 내 생각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있는 이방인과도 같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우리 주님의 사랑이 변치 않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이 나의 교만보다 커서 여전히 나를 아끼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찬양)
사랑하는 여러분.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아끼시는 주님 앞에서 교만을 회개하십시오. 주님이 옳다고 고백하십시오. 주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보다 높고, 주님의 뜻이 나의 뜻보다 선하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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