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너희는 소금이요, 빛이다 (마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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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Transcript
Handout
Handout
고백 :
헌금 :
예배를 위하여 (부르심, 감사, 회개, 간구, 영광)
오늘도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자격 없는 죄인을 주의 은혜로 불러주시사, 오직 주의 은혜만 높이게 하여 주옵소서. 한 주간 주를 기억하지 못하고 지었던 모든 죄악들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것들을 포기하오니 정결한 마음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교회 안에 연약한 지체들을 돌아보시고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봉헌을 위하여
이 시간 우리의 귀한 물질을 봉헌합니다. 우리 주님보다 귀한 것 없음을 인정하며 자원하여 드립니다. 이 물질을 받아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기도 찬양 :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본문 : 마 5:13-20 (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첫째로, 예수의 제자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금이라는 단어는,
할라스인데,
이스라엘에서는
사해 지역에서 많이 나는데,
본래는 순수한 소금이었다가,
습지를 통과하면서,
쓴맛을 유발하는 염화마그네슘이 들러붙어,
본래의 짠맛은 거의 없어지고,
쓴맛만 남은,
쓸모 없는 소금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1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가 없어,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의 발 밑에서 밟힐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소금은
단순히 맛을 내는 용도가 아니라,
부패를 방지하는 용도 였는데,
나는 자연인이다
보면은,
자연인들이 냉장고 대신에,
소금이 가득 담긴 항아리에,
돼지 고기나, 물고기를 담아서, 보관하는 것을 보는데,
부패를 방지하는 용도,
그러니까,
금방 상하고, 부패하는 음식들을
오랫 동안 저장해서,
보관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고대에는 소금을 많이 사용했는데,
그게 바로,
소금의 역할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예수님은,
세상이 마치,
금방 부패하는 돼지 고기나, 물고기처럼,
세상이 소금이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13절을 보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금방 썩기 쉬운 세상에,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이 금세 썩지 않기 위해 존재하는 소금이다.
14절에서는,
너희는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이 소극적인 의미라면,
빛은 적극적인 의미인데,
소금은 세상이 썩지 않도록 부패를 방지한다면,
빛은 세상이 환하게 비치도록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등불을 켜서, 뚜껑 밑에 덮어놓지 않습니다.
왜요?
환하게 비치는 것이 등불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선택하신 목적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을 숨기고,
너희들을 감추고,
너희들은 세상과 격리시키는 것이 나의 목적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학생인권조례와 관련하여,
김지연 약사와, 육진경 선생님이 토론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학생인권조례는
성경이 말하는 천부인권
모든 사람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권이 있다.
이게 천부인권인데
학생인권조례는
천부인권이 아니고,
상대적 인권
레닌이 말한 계급 투쟁적 인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에서 싸우고 그래도
선생님이 팔을 붙잡고 말리고 그러면
폭력 행위가 되기 때문에
직접 말릴 수도 없고
옆에 있는 학생에게 대신 말려달라고 이야기해야 된다고 합니다.
만약에, 말렸다가는,
학생인권을 침해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고발을 당한다고 합니다.
학생인권조례는
말그대로
청소년을 약자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약자에 대한 인권은 있지만,
선생님에 대한 인권은 없는 것이고,
선생님은 잠재적 가해자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레닌이 말하는 계급투쟁적 인권,
상대적 인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인데,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인권은
상대적 인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천부인권인데,
학생인권조례는 이것과 반대되는 것이죠.
그래서 많은 부모들과,
교사들과,
깨어 있는 기독교인들이, 이 조례 폐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굉장히 비판을 받습니다.
시대에 뒤처진다고.
시대에 뒤처지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말이죠.
*또, 요즘에는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동성애를 반대하는 말을 한다거나
동성애가 문제가 있다고 말을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10대 청소년들이 동성애에 노출되고 있는데
육진경 이라고 하는 선생님이
동성애와 에이즈 감염 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보건복지부에서 조사한 그래프를 보여주었는데
이 그래프를 보여주기만 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는데,
이 그래프를 보여줬다는 이유로,
고발을 당해서,
학생의 인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런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이런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경이 말하는 소리를 내야 하는 것인데
성경 어디에서 계급 투쟁적 인권을 이야기 했으며,
성경 어디에서 동성애를 지지 했으며,
성경 어디에서, 청소년은 인권이 있고, 교사는 인권이 없는 잠재적 가해자 라고 했으며,
이런 계급투쟁적 인권은,
사회 전반 곳곳에 침투를 했는데,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침투를 해서,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보게 하거나,
여자를 약자이고 피해자로만 보게 하는 것도 계급투쟁적 관점에서의 인권 개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존재입니다.
여자만 존귀하고 남자는 잠재적 범죄자 또는 가해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개념들이 사회 전반 곳곳에 들어와 있고,
계급투쟁적 관점에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은 가해자이고,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은 피해자이고 보호받아야 할 약자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성경이 말하는 천부인권이라고 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악해서 받는 핍박은 교회가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 다는 이유로 교회를 핍박하면,
교회는 지혜롭게, 그 핍박을 견디고,
또,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쁜 사람이 여러분을 비판하면, 핍박입니다.
나쁜 사람이 너는 왜 나처럼 안 사냐?
너는 왜 나처럼 술, 담배 안 하냐?
이런 것이 핍박입니다.
우리는 이런 핍박은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신앙의 정결과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유흥업소에 가지 않고,
더러운 일을 하지 않고,
거룩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받는 비난과 손가락질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금은, 그 짠 맛을 통해,
부패하기 쉬운 세상을 보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존해야 할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리고,
염화마그네슘과 결합되어,
쓴맛만 낸다면,
그 소금은, 결국에는 아무데도 쓸 데가 없어서, 사람에게 밟히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의 빛입니다.
적극적으로 빛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인데,
빛은 말 그대로, 구원을 의미하는 것인데,
마태복음, 4장에서 이미
빛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상징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마4:16)
빛이라는 단어는, 결국
하나님을 보여주라는 이야기인데
하나님의 구원 사역,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보여주라는 것인데,
우리 예수 믿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 창조 사역을 어떻게 보여주느냐?
그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
말씀을 가르치는 것,
설교하는 것,
결국에는,
교회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는 이 사실을 통해서,
예수 믿고,
죄인이었던 자가, 의인으로 새롭게 창조되어, 거듭나게 되는 사건,
이것들이 바로 빛을 비추는 사역이자,
예수의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 되는 길이라는 것이죠.
*여러분, 예수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심지어, 부패하기 쉬운 심각한 죄인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아도,
주변을 보아도,
부패하기 쉬운 죄인입니다.
구제불능,
말 그대로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어느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지하게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자신이 생각보다 가능성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를 구원자로 모시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 예수의 제자가 아니죠.
이런 사람은 앞으로 많은 실패를 경험해봐야 됩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더 찾아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쉽게 비판하고,
다른 사람의 약점을 공격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직도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모르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자각한 사람은,
타인을 쉽게 비난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덮어주신 예수님처럼,
타인의 죄를 덮어주려고 하죠.
그게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고, 비난하고 공격하는 사람은,
아직도, 죄를 용서받아본 경험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너무도 쉽게 타인을 정죄합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 예수의 제자가 아니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죠.
이런 사람은 아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를 빙자한 바리새인이고, 교회를 공격하는 사탄의 하수인입니다.
*여러분,
예수의 제자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교회가 흠이 많아도,
교회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동일하게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죄인을 사랑합니다.
연약한 자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실수를 덮어줄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남을 비난하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의로움만 자랑하는 사람은 예수의 제자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바리새인이 있을 곳이 없습니다.
겸손하게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 예수의 제자인 것이죠.
*예수가 빛이고 희망입니다.
예수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신 이유는,
우리를 어두운 곳에 숨겨두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가 구원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예수를 믿지 않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를 부정하고,
교회를 부정하고,
종교를 미신화시킨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구제불능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전하기 때문에 받는 핍박은,
하나님 앞에서 귀한 것이고,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착하게 생긴 사람도 죄인이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도 죄인이고,
성공한 사람도 죄인이고,
명예로운 사람도 죄인이고,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안에 끔찍한 죄를 품고 있으며,
진실되게 자신을 아는 사람은,
결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끔찍한 죄 앞에,
하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용서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이 선한데, 교회를 비판하면,
교회가 그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세상이 부패하고 음란하고
악하고
더러운데
그런 세상이 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교회가 그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진리를 굳게 붙잡고 가기로 결단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술자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비판받는 것은,
회개해야 할 일이 아니고,
더더욱 술을 멀리하고,
주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기로 결단해야 할 일인 것이죠.
교회가,
차별금지법과, 동성애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비난을 당한다면,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타협하고 회개해야 할 일이 아니고,
더더욱 진리를 붙잡고,
말씀으로 깨어서,
핍박 가운데서도,
소금의 맛을 내리라고 결단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핍박이 무서워서, 세상의 말에 떨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의 제자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쓸데가 없습니다.
소금은 소금의 맛을 내야 하고,
그게 쓸모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에 우리가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라는 진리를 우리가 놓치지 않고 전파하고,
구원은 오직 예수 뿐임을 굳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함께 찬양합시다.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우리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우리 마음에 주가 주신 진리가
우리의 삶에 주님을 따르다가 받은 핍박의 흔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세상의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세상을 보존하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의 소금처럼 살지 못한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소금으로 살게 해야 주옵소서.
더럽고 악한 세상입니다. 어둡고 깜깜한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빛을 비추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가 진리이자 구원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입술로 증거하게 하여 주옵소서.
*진리와 구원이신 하나님, 이 시간 들은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시고,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보내신 예수님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는 한 주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긍휼의 하나님 아버지, 죄와 쉽게 타협하며, 자주 넘어지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날마다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통하여 한 영혼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생명의 주관자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여 주시고, 한 주간도 주님 은혜 안에 강건하게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역
13 너희는 소금(할라스)이다, 그 세상(게)의,, 만일 그러나 그 할라스가 모라이노(부수가 / 맛을 잃다, 어리석게 되다, 미련하게 하다)되어지면, 무엇으로 할리조(짜게 하다, 소금치다 / 미수직)할 것인가?, 아무 것도 이스퀴오(능히 하다, 능력이 있다, 할 수 있다, 건강하다)할 수 없어, 나중에는, 던져져, 바깥으로, 카타파테오(현수동 / 밟히다, 짓밟다)되어진다, 안쓰로포스(사람)에 의하여
할라스다.
할라스가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할까?
아무 쓸데 없어,
나중에는 바깥으로 던져져,
사라에게 밟혀질 뿐이다.
할라스 :
조미료와 방부제로서 소금의 가정 및 의약적 가치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고대 세계에서도 보편적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주요 소금 공급원은 사해의 남쪽 모퉁이를 따라 약 7 마일에 걸쳐 뻗어있는 소위 소금 언덕 (제벨 우스 둠 또는 소돔 산)에서 나왔습니다. 소금은 또한 같은 지역의 소금 구덩이(슥 2:9, 1맥 11:35)와 해안의 습지(겔 47:11)에서 물의 증발로 얻었습니다. 염분이 습지 토양을 통과하면서 쓴맛을 유발하는 염화마그네슘이 많이 흡수되었기 때문에 소금은 쓴맛이 훨씬 덜했습니다. 고대 세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에서도 채소를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소금은 생활의 필수품이었습니다(에스라 7:22, 시 39:26).
소금은 고대 세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채소를 주식으로 하는 팔레스타인(에스라 7:22, 시 39:26)에서도 생활의 필수품이었습니다. 소금의 상업적 가치는 세금에 대한 많은 언급(1맥 10:29)과 토라에서 소금을 "세상이 없이는 할 수 없는"(잠 15:8) 소금에 비유한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소금은 생선과 고기를 보존하고(렘 28장), 조미료로 사용되었으며(욥 6:6), 치통에 사용되었습니다( m. Šabb. 6:5).
소금은 혀로, 빛은 눈으로 알아차리며, 두 경우 모두 사용자는 만족합니다. 언덕 위의 도시는 불빛 때문에 밤에도 숨길 수 없습니다.
(염화나트륨은 안정적인 화합물이며 소금의 품질을 잃지 않습니다. 예수 는 팔레스타인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불순한 소금 중 하나가 물리적으로 분해되거나 바람에 날리는 석고 가루와 섞여 맛을 잃을 수 있고 실제로 잃었을 수 있음을 언급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카타파테오:
καταπατέω도 5번(lit,"짓밟다", 눅 8:5; 12:1; 또한 불이 켜져 있지만 더 넓은 무화과 문맥 내에서 마 5:13; 7:6; 무화과, "경멸적으로 대하다", 히 10:29).
14 너희는 그 포스(빛)이다, 그 세상(코스모스)의, 뒤나미스(할 수 있다)하지 못한다, 폴뤼스(도시, 마을)이 크립토(숨기다, 감추다, 가리다)하지, 오로스(산) 위에 케이마이(놓이다, 눕다, 세우다)된,
너희는 빛이다.
산 위에 건설된 마을이 가려지지 못한다.
그들이 받은 신성한 빛을 전달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
15 카이오(켜다, 불 붙이다), 뤼크노스(등잔, 등불)을, 두지 않는다, 모디오스(말, 약8.75리터, 측정용기) 아래에, 도리어(알라), 뤼크니아(촛대, 등잔대) 위에, 그래서 그것이 람포(비치다, 빛나다)한다, 그 집(오이키아)의 모든 자들(호 / 관사, 남복여)에게.
그것을 모디오스 아래에 두지 않는다.
도리어
등잔대 위에 둔다.
그래서 그것이 그 집 모든 자들에게 비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틴어(모디우스)에서 유래한 외래어로, 원래는 곡물(약 8.7리터)을 측정하는 단위였습니다.
소금이다.
빛이다.
소금이 되어라. 빛이 되어라. 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은 소금이고 빛이다.
그들은 소금으로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런데 소금으로 살지 못할 때는 밝힐 뿐이다.
이미 빛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빛이 비치지 않도록 애를 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차라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 빛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16 이렇게 너희의 포스(빛)이 비치게 하라(람포 / 비치다, 부능명), 안쓰로포스(사람)들의 앞에, 에이돈(보다, 알다)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의 그 칼로스(좋은, 착한) 에르곤(행위, 행실)을, 그리고 그들이 독사조(영광 돌리다, 찬양하다)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파테르(아버지)에게, 하늘들에 계신,
이렇게 너희의 빛이 비치게 하라
사람들의 앞에,
2가지 이유,
보게 하기 위하여
영광 돌리게 하기 위하여
칼로스 :
καλός가 외모에 단 한 번만 사용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눅 21:5, 성전 돌에 대한). 이 용어는 품질을 나타냅니다n 약 20개 구절(예: 비옥한 토양, 마 13:8; 고운 진주, 13:45; 선택된 포도주, 요 2:10). 다른 곳에서는 도덕적 의미로 사용되며, 나머지 구절은 이러한 구절에 전념합니다 .
17 노미조(생각하다, 여기다, 믿다)하지 말라, 내가 카탈뤼오(폐하다, 무너뜨리다, 무효로 하다)하기 위하 온 것으로, 노모스(율법) 또는 프로페테스(선지자)들을. 카탈뤼오 하러 내가 온 것이 아니다 도리어 플레로오(성취하다, 이루어지다, 만족시키다)하기 위해 온 것이다.
노미조 :
1. 관습이나 용법으로 보유하다 , 관습이나 용법으로 소유하다, 관습을 따르다 또는 용법; 통과하다 νομίζεται 그것은 관습이다, 그것은받은 사용법입니다: οὗ ἐνομίζετο προσευχὴ εἶναι, 여기서 관습에 따라 기도하는 장소, 행 16:13 [그러나 L T Tr WH는 οὗ ἐνομίζομεν προσευλὴν εἶν.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곳 등; 아래 2 참조],(2 맥 14:4).
2. 간주하다, 생각하다, 가정하다: 동사형, 행 8:20; 고전 7:36; 동사형 , 눅 2:44; 행 7:25; 1 4: 19; 16:[13 (위 1 참조), 27; 17:29; 고전 7:26; 딤전 1. 6:5; ὅτι, 마 5 : 17; 10:34 [W. § 56, 1 b.]; 20:10; 행 21:29; ὡς ἐνομίζετο, 당연한 것처럼, 눅 3:23. [ἡγέομαι, 핀.]* 참조.
카탈뤼오 :
파괴하다, 철거하다, 폐지하다
καταλύω는 주로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17번 사용되었습니다(바울서신에서는 3번 사용). 누가복음 9장 12절과 19장 7절에서"숙박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을 제외하면,동사는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물리적으로 건물을 철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마 24:2, 26:61 등), 유대인의 구원과 삶의 방식을 무너뜨리는 것(갈 2:18), "하나님의 일"(롬 14:20, 참조. 행 5:38-39), 율법을 폐하는 것(마 5:17, 아래 5절 참조) 등 몇 가지 중요한 비유적 용례가 있습니다.
플레로오:
하나님이 예언의 말씀의 창시자이신 것처럼, 그분은 또한 그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예수님을 일으키셔서 그들의 자녀인 우리를 위해 성취[ὁ θεὸς ἐκπεπλήρωκεν]하셨습니다."(13:32-33). 그러나 하나님의 행동이 인간의 참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수를 정죄()함으로써 "선지자들의 말을 성취[ἐπλήρωσαν]"(13:27)했습니다.
18 아멘(진실로), 과연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파레르코마이(없어지다, 지나가다, 통과하다)하기 전에는, 우라노스(하늘)과 게(땅)이, 이오타(점) 하나, 또는 하나의 케라이아(획)도, 파레르코마이 하지 않을 것이다, 결코, 노모스(율법)의, 모두 될 때까지.
아멘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율법이 모두 이루어지기 까지.
파레르코마이 :
주요 의미는 지역적 의미 인지나치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막 6:48)과 여리고의 맹인(눅 18:37)을지나치셨고, 바울과 티모 는 미시아를 지나가셨으며 (행 16:8일부), 두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을 때 아무도 감히 길에서지나치지 못했습니다(마 8:28).
b) 마 14:15에 시간적 측면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가고 / 멀어짐 , 즉 하루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7:9에 따르면 금식(금식하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 마가복음 14:35에서 예수님은 "그 때"(위협의 시간)가 지나가기를기도하십니다 .
마 5:18 (bis; 참조: 눅 16:17)에서는 율법의 유효성이 "하늘과 땅이 없어질 때까지(.)" 계속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과 땅"은 율법이 불변의 유효성을 갖는 현세(現世)를 가리킵니다.
노모스:
이 용어는 "규칙, 원칙"이라는 일반적인 의미(예: 롬 7 :21, 23)에서부터 "구속력 있는 규정"(7:2b-3)이라는 좁은 의미, 그리고 "모세의 율법 체계"(가장 일반적인 사용, 예: 2:12-20)라는 보다 구체적인 표현에 이르기까지 넓은 의미 범위로 사용됩니다, 2:12-20).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류오(풀다, 버리다, 파괴하다, 폐지하다)하고, 그 엔톨레(계명)의 엘라키스토스(지극히 작은, 하찮은) 하나라도, 그리고 그와 같이 안쓰로포스들을 가르치면, 엘라키스토스(지극히 작은)한 자라고 칼레오(미수직 / 부르다, 칭하다)되어질 것이다, 그 하늘들의 나라에서. 그러나 누구든지 그것을 행하고 이것을 가르치면(디다스코), 메가스(위대한, 큰)라고 칼레오(미수직)되어질 것이다, 그 하늘들의 나라에서
칼레오 되어질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는
위대한 자
이것을 행하고 가르치면
엔톨레 :
JL 1 LXX에서 동사 ἐντέλλω(ἐντέλλομαι)는 신명기에서만 85회( 여호수아, 36회, 예레미야, 27회)를 포함하여 420회 정도 발생합니다. 히브리어 צִוָּה H7422(창 2:16 등, 는 다른 용어로 번역됨)의 가장 일반적인 렌더링입니다. 명사 ἐντολή는 시편에서 235배, 신명기에서 44배 , 신명기에서 40배, 일반적으로 히. מִצְוָה H5184(창 26:5 등, 시 119[LXX 118]에서는 פִּקּוּדִים H7218 in 16 인스턴스[예 , 119:4, 15, 40], 그러나이 히브리어 용어는 다른 곳에서 번역됩니다. δικαίωμα G1468[예 : 119:27, 56]). 새로 만들어진 용어인 ἔνταλμα는 70인역(욥 23:11-12; 사 29:13; 55:11)에서 4번 등장하며, 그 이후에는 기독교 문헌에서만 등장합니다.
2 히브리 동사 צִוָּה는 다양한 문맥에서 사용되며, 대부분 야훼를 주어로 사용합니다. 야훼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제외한 동산( )의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으라고 명령했습니다(창 2:16). 모세에게 특정한 기적을 행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출4:28). 그분은 천사들에게 자신이 보호하는 사람들을 책임지게 하십니다(시 91:11[9 0:11]). 일부 구절에서 이 용어는 "위임하다" 또는 "임명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삼상 13:14a,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선택하신 것, 삼하 6:21에서 LXX는 καθίστημι G2770, "to 데려오다, 임명하다"로 번역합니다).
명사 מִצְוָה 역시 주로 신성한 명령에 사용되며, 특히 오경에서 "야훼의 명령"(레 4:2), "너희 하나님 야훼의 명령ands"(신 4:2), "그의 명령"(출 15:26) 등과 같은 표현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시편에는 "주의 명령"(시 119:19[118:19])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명령이자신의 것임을 암시합니다.
ἐντολή로 번역되는 다른 히브리어 용어들 중에서 특히 חֹק H2976(신 16:12; 왕상 3:14)과 그 동음이의어인 חֻקָּה H2978(왕상 2:3; 11:38; 겔 1 8 :21)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히브리어 명사는 매우 흔한 명사이며, 보통 LXX에서는 다른 헬라어 용어(예: δικαίωμα)와 함께 번역됩니다.이 두 단어는 신명기 신학에서 삶에 필요한 전통을 변함없이 전수하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자녀의 신앙고백 교육(신 6:24), 절기 지침(16:12), 이스라엘의 삶을 규제하는 율법 언약 갱신(28:15), 솔로몬에 대한 아브라함의 유언(왕상 2:3), 여로보암을 왕으로 지명하는 예언(11:38) 등입니다.
엘라키스토스:
신약의 사용 II (비교 및 최상급). 비교형 엘라토온과 최상급 엘라키스토스(요 2:10, 엡 3:8)
지극히 작은 계명을 지극히 작게 여기는 자는 천국에서도 지극히 작을 것입니다(5:19). 예수님은 자신을 형제들 중 지극히 작은 자와 동일시하십니다(25:40, 45). 누가복음에서 최상급은 인간의 약함을 표현합니다(12:26).
디다스코:
가르치다의 의미로 일관되게 나타나거나-청중이 조동사로 지명될 때-지시하다의 의미로 나타나며, 때로는 εὐαγγελίζομαι(눅 20:1; 행 5:42; 15:35) 또는 κηρύσσω(마 4:23; 9:35; 11:1; 행 28:31)와 평행으로 사용됩니다. 이 명사는 교사를 지칭하며, 동사에서 존칭으로 사용됩니다 .
20 내가 이르노니, 너희에게, 만일 페릿슈오(낫다, 풍족하다, 넉넉하다, 넘치다)하지 못하면, 너희들의 디카이오쉬네(의, 올바름)가, 폴뤼스(많은, 큰)하지 않으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너희는 에이스에르코마이(들어가다, 진압하다)하지 못한다, 그 하늘들의 나라에
페릿슈오:
1. 이 단어는 "지나치게 많이 존재하거나 과도하게 존재하다", 검열적으로 "불필요하게 존재하다"를 의미하며, 사람에 대해서는 " 우월하거나 지나치게 많음"을 의미합니다. 과도적으로 이 단어의 의미는 "지나치게 풍부하게 하다", "지나치게 많이 제공하다"입니다.
2. LXX에서 이 동사는 "충분하다", "우선권을 가지다e" 또는 "증가하다"(가족 또는 자손)를 위해 개인적으로 사용됩니다.
3. 구약은 페리세우오를 사용하지 않고 구원의 시대가 초풍요의 시대가 될 것임을암시합니다(암 9:13, 사 65: 17ff.). 랍비들은 이 희망의 근거를 레 26:4-5에 두고 있습니다. 후대의 유대인 저술에서는 가족, 재화, 농작물 등의 큰 결실과 기쁨, 지혜돔, 성령과 같은 영적 은사와 축복의 큰 부어짐에 대한 설명으로 이 생각을 받아들입니다. 타락으로 인한 손실은 이로써 상쇄될 것입니다.
눅 15장:17절에 나오는 고용된 종들이 많다는 것은 신성한 은혜의 관대함을 가리킵니다.
군중을 먹이는 메시아적 먹이심은 모세의 만나 먹이심을 성취하고 초월합니다(마. 14:20; 눅 9:17; 요 6:12-13).
왕국에 요구되는 의는 현재의 경건의 달인들의 의를 능가해야 합니다(마 5:20). 공동체의 급속한 성장(행 2:41; 4:4; 6:7; 9:31) 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증거합니다.
에이스에르코마이 :
주해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Use of the Old Testament
예수님은 히브리어 성경을 폐지하지도 않으셨고..
희생 제사는 분명히 폐지되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단번에 성취되었으며(히브리서 전체 참조), 많은 도덕적 원칙은 똑같이 분명히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21-48
예수님은 이 소위 반론에서 여섯 번이나 "너희는 옛적부터 [또는 '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느니라"로 시작하거나, 이 도입부를 축약하여 "너희는" 또는 "이렇게 말했다"(5:21, 27, 31, 33, 38, 4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다섯 가지 경우에 구약의 근본적인 율법을 인용합니다. 여섯 번째 경우(5:43)에서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 율법으로 보이는 것을 인용하지만 첫 번째 부분만 구약의 인용문입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예수님이 문제의 율법에 대한 전통적, 기록되지 않은 해석(따라서 "너희가 들었느니라")과 자신의 해석을 대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대표적이며 특히 유용한 것은 Westerholm 1978, 특히 113쪽). 반면에 5:43b는 구약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으며 (아래, 27 페이지 참조), 기록 된 성경조차도rmally 낭독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의 불만이 기록되지 않은 전통에만 있다고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Luz 1989 : 247-49 참조).
Matthew: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13. 소금은 주로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부름에 충실할 때 이 땅을 더 깨끗하고 맛있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독특한 성격을 보존하는 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짜지 않은 소금은 더 이상 가치가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순수한 소금은 염분을 잃을 수 없지만, 사해 기슭에서 파낸 불순한 '소금'은 실제 염화나트륨이 녹으면서 점차 짠맛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랍비들은 일반적으로 소금을또는 지혜(골 4:6 참조)의 이미지로 사용했는데, 이는 맛을 잃은 것으로 표현된 헬라어 단어가 실제로 '어리석게 되다'를 의미하는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전달하는 아람어 타페엘은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님이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어리석은 제자는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14-16. 빛은 소금처럼 구별됨으로써 환경에 영향을 미칩니다. 다른 사람들과 눈에 띄게 다른 제자는 그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ct. 그러나 그의 선행의 목적은 자신의 미덕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행에 영감을 주신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 는 이사야가 종에 대해 예언한 대로(사 42:6, 49:6) 세상의 빛(요 8:12)이시지만, 이 역할은 제자들에게 넘어갔습니다(참조, 행 13:47).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는 마태복음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으로( 5:45, 6:1, 9, 7:11 등 참조),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가장 강조되는 표현입니다. 초기 유대교 사상에서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개인보다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였으나(ls), 1세기 광고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이 문구가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ICC, 44쪽 참조).
18. 진실로 (그리스어 아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예수님 자신의 서명입니다. 다른 어떤 교사도 이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은 31번, 요한복음은 25번(이중 아멘 포함) 기록합니다.
랍비들은 율법의 한 글자(레위기 랍바 19:2) 를 이렇게 미세하게 변경하는 것의 파괴적인 영향에 대해 길게 논의했습니다. 모든 것이 성취될 때까지 율법을 변경해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율법은 의도된 정점에 도달할 때까지 유효하며, 이는 현재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9 따라서 이 구절은 때때로 해석되는 것처럼 구약 율법의 규정이 예수님 오심 이후에도 여전히 구속력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변경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의도한 목적을 넘어서는 적용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19 마태복음의 다른 곳에서 계명[엔톨레]은 항상 구약의 율법을 가리키며, 이 계명들 중 가장 작은 계명은 분명히 여기서 그렇게 이해될 것이다,
20 필요한 것은 더 큰 ( 3:15, 5:6, 10 참조), 사랑의 관계, 문자 그대로 규정을 준수하는 것 이상의 하나님에 대한 순종( )입니다. 그것은율법과 선지자들을 성취하는 '의'( 17절)이며, 21-48절 (서기관들의 율법주의와 대조)과 6:1-18절 (바리새인들의 표면적인 '경건'과 대조)에서 설명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핸드북
영광을 돌리다(TEV "찬양하다")는 9:8 및 15:31에서 사용된 표현과 유사하며, 그 의미는 분명히 "찬양하다"입니다. ht는 이사야 49:3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니 너로 인해 사람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과 납달리 유언 8:1 ("내 자녀들아, 선한 일을 행하라. 그러면 사람과 천사들이 당신을 찬양하고 하나님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해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위선자들의 생각과는 대조적입니다(6:2).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및 "내" 또는 "our"과 관련된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약 20회 사용되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한 번만 사용되었고(막 11:25), 누가복음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주석가들이 지적하듯이 이것은 유대 랍비 문헌에서 흔히 사용되는 용법을 반영한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7절 (마가복음 13장 31절 참조)의 18절과 유사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 구절은 마태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의 기능은 아마도 뒤에 이어지는 일련의 대조 구절( 21-48절)을 소개하는 동시에 이 구절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5:17
10:34에서"생각하지 말라"가 한 단어씩 반복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왔다는 것은 단순히 그 특정 시간에 산에 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에서의 사역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나는 세상에 왔다" 또는 "나는 가르치러 왔고 설교하러 왔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번역자들은 "끝내다", "쓸모없게 만들다", "취소하다", "율법이 가치가 없다고 말하다", "더 이상 율법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다"를 사용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은 TEV에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으로 번역됩니다. 그리스어 본문과 여기에서는 문자 그대로 "또는"입니다.마태복음에서는 이 문구를 그리스어로 "그리고"와 함께 사용하며(7:12; 11:3; 22:40), 신약의 다른 곳(눅 16:16; 24:44; 요 1:45; 행 13:15; 28:23; 롬 3:21)에서도 이 문구가 사용됩니다.
이 두 번째 의미는 사람들이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 가져야 할 이해를 완성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몇몇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진정한 범위와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며, 21-48절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그들의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해"("그들의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해")라는 해석을 선호하고 "그 가르침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일어나게 하기 위해"와 같은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이유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없애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나는 그것들을 없애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그것들을 실현하기 위해서입니다." 번역가는 이 대조를 염두에 두고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이오타(TEV "가장작은 점")는 그리스 알파벳에서 가장 작은 문자()의 이름입니다.
마태복음 5:19
완화하다(TEV "불순종하다")는 문자 그대로 "느슨하게 하다", "자유롭게 하다", "풀다"를 의미하며, 여기서는 "따로 떼어 놓다"( NEB 참조) 또는 "권위를 약화하다"(Brc)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이 개념은 특정 율법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하는 랍비적 개념과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번역 방법에 대한 좋은 힌트를 제공합니다. 번역은 "유효하지 않다고 말한다" 또는 "더 이상 따를 필요가 없다고 결정한다"로 할 수 있습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유효하지 않다고 가르치거나", "사람들에게 순종하지 말라고 가르치거나",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작은 자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하늘나라(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또는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이라고 말하는 것은 "왕국"을 사용하는 번역가에게 좋은 해결책입니다.
하나님은 ‘평등’의 하나님이 아니다.
천국에서도 높은 지위와 낮은 지위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공평’의 하나님이시다.
GeCL은 "율법의 교사와 바리새인보다 더 완벽하게 그분의 뜻을 이루지 못하면"을 렌더링합니다.
의 :
앞서 지적했듯이, 여기서의로움의또 다른 번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번역자들은 이 구절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행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다" 또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TEV와 GeCL은 모두 당신의 의가 넘치지 않는 한이라는 문구에 대한 유용한 모델을 제공합니다. 비슷한 문장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또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더 조심스럽게o하지 않는 한"입니다.
TEV와 GeCL은 모두 당신의 의가 넘치지 않는 한이라는 문구에 대한 유용한 모델을 제공합니다. 비슷한 문장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또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더 조심스럽게o하지 않는 한"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율법의 교사와 바리새인들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더 조심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 가운데 속하지 못할 것이다."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Follow God’s Redemptive Plan as it Unfolds throughout Scripture
5:1-7:29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 산상수훈. 모든 종교 문헌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로 꼽히는 이 설교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선언문"을 제시합니다. "이미 있지만 아직은 아닌" 하나님의 통치처럼, 이것은 신자들이 그에 부응하는 삶을 살기에는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노력해야 하는 이상적인 윤리입니다.
5:13-16 소금... 빛. 두 비유 모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소금이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지만, 보존력()이 비교의 요점일 것입니다. 반문화적인 팔복 다음에 나오는 소금과 빛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지 말고 타락한 세상 한가운데서 제자도의 모범을 보일 것을 상기시킵니다.
5:17 성취하다. 마태가 예언을 사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성취하다"는 의도된 목적을 완성한다는 의미입니다. 계명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의도(갈 5:14), 하나님의 중요한 행동 패턴의 유형론적 반복(야 2:23), 또는 이전에 약속된 어떤일의 발생(행 7:17)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5:18 동물 희생과 관련된 규정과 같은 일부 규정은 죄인을 위한 단번에 희생 제물이 되신 ( 히 8-10참조) 그리스도께서 이 율법이 가리키는 모든 것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구약 본문은 신약의 가르침에 비추어 그 율법이나 원리()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각 부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이해하면 구약은 그리스도인에게 여전히 구속력이 있습니다.
5:20 율법 교사들.서기관들은 성경을 베껴서 율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함께 당시 가장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인들 중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의를 "능가하는 의"를 갖는다는 것은 구약에 더 완벽하게 순종하는 것을 의미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정의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의 내주하시는 영에 의해 가능해졌습니다(참조, 10:20).
NIV 문화적 배경 성경 공부: 고대 성경의 세계에 생동감 불어넣기
5:14 세상의 빛.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열방의 빛이 되라고 부르셨고(사 42:6, 49:6), 그래서 그의 구원이 땅 끝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사 49:6).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 많은 고대 도시는 언덕 위에 지어졌습니다.
Isaiah 42:6 NKRV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Isaiah 49:6 NKRV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The Baker Illustrated Bible Background Commentary
예수님은군중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5:1). 마태는 예수를 산에서 율법을 전달하는 새로운 모세( 신 18:18 참조)로 소개합니다(그 산). 모세가 가르칠 때 모세의 자리에 앉았던 랍비들처럼(마 23:2), 예수님도 제자들과 군중에게 가르침을 전하실 때 앉으셨습니다.
심령이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5:3 ). 영적 가난(불순종)은 경제적 가난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모순된 말입니다(신 28:15-68). 그러나, 왕과 그의 나라가 도래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을 받습니다(사 61:1)-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적인 치유가 이를 증명합니다(마 4:23-25).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으면(5:13).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고, 고기를 보존하고, 물을 정화하고, 제물을 정결하게 하는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는 생명의 기본 광물입니다. 예수님에게 갈릴리 사람들은 그의 목적에 있어 흔하고 생명에 필수적인 소금과 같았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통해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을 확장할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부한다면 그들은 맛없는 소금과 같을 것입니다 소금을 맛있게 만들 방법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버려지고 학대당합니다ain. 더 이상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의미해집니다.
이 계명 중 가장 작은 계명(5:19). 유대 율법에는 613개의 계명이 있습니다.그리고 위반한 계명에 따라 처벌이 달라졌고, 랍비들은 어떤 계명이 가장 크고 작은지 논쟁을 벌였습니다.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합니다(5:20).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선지자를 연구하고 순종하는 데 헌신한 이스라엘의 평신도 지도자들이었습니다("바리새인과 사두개파" 기사 참조, 마가복음 2:18 주석 참조). 하나님의 축복은 성경에 대한 순종( )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백성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치는 데 전념했습니다. 이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와 같은 모호한 계명을 해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전통, 즉 이전 랍비들의 해석을 전승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 결과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 전체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 즉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여 율법을 성취하는 의가 필요하다고 믿으셨습니다: "너희는 들었으나 ... 나는 너희에게 ..."
블롬버그, 크레이그 L.
고대에 소금이 지칭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 중22 음식의 방부제로 사용되는 것이 아마도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패를 척결하고 도덕적 타락을 막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소금을 주로 맛을 내는 향신료로 생각할 수 있지만, 냉장 보관하지 않고 고기를 보존하는 데 필요한 소금의 양을 고려할 때 고대 유대인들은 소금을 주로 맛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짠맛을 잃다"는 문자 그대로 "더럽혀진다"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소금이 맛이 없어진다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개념이 아니라 소금이 여러 가지 불순한 물질과 섞여 방부제로서 가치가 없어지는 고대 세계의 일반적인 문제였습니다..
누가복음 14장 35절에서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듯이, 이 구절은 기독교인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세상이 기독교인들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가리킵니다. 부패를 척결하지 못하는 신자들은 변화와 구원의 주체로서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기독교인은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사랑하고, 교회와 사회를 사랑해야 한다.
어두운 시골을 비추는 도시의 불빛이나 집 안의 등불이 집 안의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선행을 세상 앞에 비추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선행은 3:8의"회개에 따른 열매"로 가장 자연스럽게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ict 6:1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공공장소에서 선한 행동을 하는 동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공장소에서의 선행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느냐의 문제이다.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표준에 귀를 기울이도록 촉구하는 적극적인 방부제, 즉 자극제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세계관
가치관이다.
5:17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율법을 모순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변함없이지키고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는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즉 율법의 의도 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놓친 부분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표준에 더 많이 부합해야 합니다( 20절). 율법과 선지자를 함께 언급하는 것( 17절)과 율법 그 자체를 언급하는 것( 18절)은 히브리어 성경(구약성경) 전체를 언급하는 유대인의 표준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성경의 성취는 챕터. 1-4에서와 마찬가지로 성경의 완전한 의미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역할을 구약성경 전체를 성취하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5:18 18절은 개별 단어의 가장 작은 구성 요소까지 모든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재확인합니다.26 성경은 " 모든 것이 성취될 때까지"라는 중요한 조건이 붙어 있지만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율법의 여러 측면이 완전한 결실을 맺었습니다(예: 희생 제사의 필요성, 히브리서 참조).다른 경우에는 율법의 특정 요구 사항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됩니다(예: 고전적으로 이웃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
요컨대, 구약성경을 기독교적으로 적용할 때는 항상 신약성경과의 모순과 불연속성을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5:19 "끊다"(리세)는 17절의 "폐지하다"(카탈리사이)와 단어 유희를 포함하며( ), "따로 떼어 놓다"(더 이상 적용되지 않음)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계명"은 토라에서 하나님의 우선순위에 대한 위계 또는 순위에 대한 전형적인 유대인의 관점을 반영하며,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우선순위에 도전하면서도 다른 곳(예: 23:23)에서도자신이 지지하고 계십니다. 더 심각한 것은 교사로서 하나님의 뜻을 오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타락으로 이끄는 그들의 관행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왕국 안에서 위대함과 모호함을 대조하면서 교사로서 제자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내에서의 다양한 순위는 하나님께서 현 시대에 진정으로 존중하실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5:20 그는 단순히 새로운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데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관찰합니다.30 사람들은 제자도를 통해 예수를 따라야하는데, 대부분의 경우이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렇게하지 않으려 고합니다. 6절과 10절로 돌아가서 예수님은 자신의 설교 전체를 통합하는 논지를 소개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제자도는 더 큰 의로움을 요구합니다.
여섯 가지 예화( )의 더 근본적인 의미는 예수님께서 직접 율법을 성취하신 주권적인 율법 해석자로서의 역할입니다( 17절). 그러므로 그분만이 율법의 각 부분이 추종자들에게 어떻게 적용될지 선언할 권한이 있습니다.31
마태복음: 사회 수사학적 해설
예수님은 여기서 선행을 넘어 선한 성품을 언급하십니다(7:17-20; 12:33-37; 다른 곳에서는 이러한 요구가 하나님의 왕권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데 달려 있음을 나타냅니다(예: 10:40; 18:4, 1 2-14, 27). 소금과 빛의 이미지는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보다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고려를 불러일으킨다(참조, Aalen 1957/58). 더욱이 제자들의 삶이 하나님의 왕권을 증거해야하는 영역 은 모든 인류를 대표합니다 ("지구,"세계"- 슈바이처 1975 : 100; 골 4:6이이 전통을 반영합니까?) 참 제자 만이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고(5 : 13-16) 참 제자도는 친구 와 원수 모두를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5 : 3-12), 소금과 빛 단락은 앞의 페리코페에서 온유함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유의하라는 울려 퍼지는 경고가됩니다.
팔복에 예시된 가치를 거부하는 제자는 맛없는 소금과 같다: 쓸모없는 것이다(5:13). 주석가들은 소금의 다양한 용도에 주목합니다 : 방부제(Diog. Laert. 8.1.3; 참조 : Thom 1994 : 110의 similar Pythagorean akousma ); 향료; 와인 껍질을 치료하는 물질 (Aristophanes Clouds 1237); 비료로 사용 된 거름의 발효를 지연시키는 약제 (참조. 눅 14:34-35의 최후의 수단 기능; A. B. Bruce 1979: 101; Danker 1972: 168; Gundry 1982: 76 참조).35 마지막 사례로, 일부는 tabbala (조미료)와 zabbal a (거름; Manson 1979: 132) 사이의 아람어 단어 유희를 제안합니다. 데이비스와 앨리슨 1988: 472-73은 열한 가지 견해를 나열한 후, 이 속담이 특정 용도가 아닌 소금의 다양한 용도에 적용될 수 있다고 신중하게 결론지었습니다(마찬가지로 하그너 1993: 99). 그러나 이러한 맥락에서 맛은 현대 문헌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 b. Ber. 34a, bar.; Plut. Isis 5, Mor. 352F; Table-Talk 4.4.3, Mor. 669B); 이것은 예수의 주요 청중을 구성 할 갈릴리 사람들에게 가장 명백한 기능 일 수 있습니다.
삶에서 아버지의 일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제자는 보이지 않는 빛과 같아서 쓸모가 없습니다(5:14-16).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다양한 이미지로 자신의 요점을 강조하십니다. 제자는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처럼 분명해야 하고(대부분의 도시가 그렇듯이), 집안의 불빛은 밤에 횃불이 켜진 도시보다 숨기기가 쉽지 않아야 합니다(5:14-15; 대부분의 집에는 방이 하나뿐이었습니다). 이 파사게의 빛은 밤에 일반적으로 높은 고대 도시의 밝기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참조 : Grant 1959 : 97; 아마도 Ahiqar 159, §68), 아마도 예루살렘.39 그러나 마태는 아마도 같은 점을 강조하는 various 이미지를 혼합하여 제자처럼 기능하지 않는 명목상의 제자는 왕국에 무가치합니다.
구약성경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을 열방의 빛(예: 사 42:6, 49:6), 즉 '세상 전체'(d)( 마 18:7 참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교사들은 특히 경건한 현자들에게 이 이미지를 적용했습니다(예, 시 50:6-7; 시편 51:4
설교의 우수성: 최고의 설교자의 기술 연구
첫 번째는 인클루시오 또는 "북엔드"입니다. 처음에 소개한 단어와 주제를 마지막에반복하여 연설의 완성도를 높입니다. 이를 통해 청중은 처음에 소개한 주제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복이 있나니..."(마태복음 5:3-11)를 말한 다음 로 돌아와 명확한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내 이 말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마태복음 7:24). 복되고 지혜로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추종자입니다.
두 번째 수사적 장치는 키아즘이라고 합니다. 주제가 대칭적이거나 리드미컬한 패턴으로 나타나 청중이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악마는 다음과 같이 처리됩니다:
A1-5:3-10. 팔복. 제자들은 누구인가
B1-5:11-16. 제자들의 소명
C1-5:17-19. 소명 수행을 위한 조건
D1-5:20. 안티테제 소개(프레이밍 마테리얼)
E1-5:21-47. 대척점. 지나치게 풍부한 의로움
D2-5:47-48. 반론의 결론(프레이밍 자료)
D3-6:1. 다음 단원 소개(프레이밍 자료)
E2-6:2-16. 풍성한 의로움의 이상
D4-6:19-21. 앞 단원의 결론(프레이밍 자료)
C2-6:22-7:12. 소명을 실행하기 위한 조건
B2-7:13-20. 제자들의 소명
A2-7:21-27. 규율레스는 누구인가2
'북엔드'와 '대칭'을 사용하여 제자도의 중심 주제를 능숙하게 소개하고 설명하며 군중에게 신랄하게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5장 전체에서 "너희는 들었으나....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자신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서기관 및 바리새인들의 가르침 사이에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의 권위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근거합니다.
"랍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의 청중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의 말은 다른 사람의 뒷받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 율법을 해석 할 권리를 주장합니다.
역사지리로 보는 성경 – 신약
남서쪽디베랴를 보시고: 빛과 소금의 교훈
팔복 설교가 끝나 갈 무렵 예수님은 남서쪽 산중턱에 위치한 디베랴에서 호롱불이 하나 둘 켜지는 것을 보셨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빛에 관한 교훈을 주신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4–16
어부들이 갈릴리 바닷가 근처에 고기를 저장하기 위해 소금을 푸는 것을 보면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3
영적 돌파구를 위한 금식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이 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 5:14). 세례 요한 금식은 신자들이 빛을 확장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방금 언급한 경건한 교회 이사회의 경우처럼, 이 금식은 나쁜 상황에서도 신실한 간증을 확장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1) 경건한 삶( )을 살아야 하고 (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 이중의 의무가 있습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6절).
그러나 때때로 불신자들은 우리의 경건한 삶에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죄에 동참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비난합니다. 더 나쁜 것은, 우리의 경건한 삶이 그들에게 자신의 죄에 대한 확신을 주기 때문에그들은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려고 할 때, 우리는 "의를 위해" 핍박을 받습니다.
베드로는 문제와 해결책을 모두 설명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너희를 악한 자라고 비방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의 선한 행실을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워하게 하라"(벧전 3:16).
세상이 ‘선’한데 교회를 비판하면,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반대로 세상이 ‘악’한데 교회를 비판하면,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의 뜻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지금 세상이 비난하는 것이다.
교회는 무엇을 주장하는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은 가짜 신이다. 우상이다.
돈을 너무 사랑하는 세상에서 이 메시지가 비판으로 되돌아온다.
그리스도인은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지도자를 비판하는 것은 죄이다.
개인주의와, 나라를 비판하는 세상에서 나라를 사랑하자는 것은 비판으로 되돌아온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교회를 비난하는 것은 죄이다.
세상은 교회가 죄인 집단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교회는 죄인들이 구원받아 용서받는 곳이다.
교회가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본인도 변화가 힘들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한 공립학교 교사가 교실에서 그리고 학교 교직원들 사이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직원들과 타협하거나 '해피 아워'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인사 책임자로부터 "너무 직선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e 그는 교직원들과 '해피 아워'에 가지 않았습니다. 이 교사는 학생들과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준비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등 매우 성실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었던 직원 회의에서 인사 책임자는 기독교인 교사에게 "당신을 해고할 거야... 당신이 사라질 때까지 쉬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해피 아워(Happy hour)는 음식점이나 술집에서 맥주, 와인, 칵테일 등 주류를 할인하는 시간대를 말한다.
서울특별시 학생인권조례 폐지 조례안 공청회가 5일 오전 서울시의회 의원회관에서 진행됐다. 육진경 대표는 “학생인권은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인 인권이 아니다. 서울시 교육청 강사는 ‘약자에게만 인권이 있다’고 말했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을 약자로 보고, 선생을 잠재적 가해자로 본다”고 고발했다.
분노한 김지연 대표 “에이즈하고 학생인권조례가 무슨 상관이냐구요?”(2023/09/05 서울 학생인권조례 폐지안 공청회)
동성관성행위가 에이의 주된 전파경로라는 그래프를 제시했을 뿐인데 그게 학생 인권 절에 위반이라면 성적 취향에 따른 차별금지 중앙을 위반했다고 육진경 선생님이 교육청에 고발했던 실제 사건을 예로든 거지..
예수님은 여섯 가지 반어 시리즈()에서 율법의 성취가 율법에 대한 외적인 순종을 넘어 율법 이면에 있는 내적인 마음까지 나아가는 것을 어떻게 수반하는지 보여 줍니다. 이러한 예수의 해석은 성경의 토라가 인간의 마음에 더욱 깊이 침투할 수 있도록 합니다: "너희는 들었으나...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예수님은 살인뿐만 아니라 분노도, 간음뿐만 아니라 정욕도 금지하십니다.
마음으로 짓는 죄
세상이 이 죄를 죄라고 말하는 것 때문에 교회를 비판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문제 있는 것이다.
신자가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마태복음 5:13-16)?
예수님은 세상에서 제자들의 역할을 언급하기 위해 소금과 빛의 개념을 여러 번 사용하셨습니다.마태복음 5장 13절에 그 예가 나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그러나 소금이 그 짠맛을 잃으면 어떻게 다시 짠맛을 낼 수 있습니까? 그것은 더 이상 아무데도 쓸모가 없으며,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뿐입니다." 1세기 중동에서 소금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냉장 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에 소금은 음식, 특히 사막 환경에서 금방 상할 수 있는 고기를 보존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구속받지 못한 본성이 죄로 타락한 불경건한 사람들의 사회에 내재한 악으로부터 세상을 보존하는 방부제입니다(시 14:3; Romans 8:8).
둘째,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소금은 풍미 강화제로 사용되었습니다. 소금이 음식의 맛을 돋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풍미를 "돋우는" 사람들로 돋보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소금이 음식의 간을 맞추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듯이 필연적으로 세상에 선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분쟁이 있는 곳에서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슬픔이 있는 곳에서는 상처를 싸매는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되어야 하며, 미움이 있는 곳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악을 선으로 갚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6:35).
세상에 대한 빛의 비유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선행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빛나야 합니다. 다음 구절 마태복음 5장은 이 진리를 강조합니다."당신은 세상의 빛입니다.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는 숨길 수 없으며, 등불을 켜서 바구니 아래에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두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t 빛을 줍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4-16, NASB).이 구절의 의미는 '어둠 속에서 빛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죄 많은 사람의 어두운마음에 빛을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요한복음 1:1-10), 우리의 선행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분명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어둠 속의 빛과 같아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의 행위는 마태복음 5:3-11의 팔복과 같이 예수님께서 이 구절에서 언급하신 다른 원칙에 따라d 수행된다면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위해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16절, KJV) 하는 것이 염려된다는 점에 유의하세요.
The Evidence Bible: Irrefutable Evidence for the Thinking Mind, Notes
어떤 사람들은 종교는 개인적인 것이므로 혼자만 간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의 복음은 영원한 생명의 좋은 소식이며 죽어가는 이 세상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언덕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집 꼭대기에서 설교하고 나팔처럼 목소리를 높여 이 백성에게 그들의 범죄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The Evidence Bible: Irrefutable Evidence for the Thinking Mind, Notes
"소금"은 왕국 정치의 보수적 측면을, "빛"은 자유주의적 측면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하나는 다른 하나를 보완하는 역할을 합니다.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모두 보수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자유주의자이기도 합니다. 즉, 모든 선한 것을 보존하고 빛의 본질인 을 확산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천부인권
천부인권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천부(天賦)의 권리로 자연권(自然權, natural rights)이라고도 한다. 천부인권은 초국가적ㆍ전법률적 불가침의 권리이므로 국가권력이라 할지라도 침해할 수 없으며 국가가 이를 침해한 경우 침해자인 권력자에 대한 저항권이 인정된다.
러시아 혁명의 핵심 인물이자 소비에트 연방의 건국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은 서구의 자유주의 전통과는 다른 인권에 대한 뚜렷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레닌의 인권 개념은 마르크스주의 이념과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비전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계급에 기반한 권리: 레닌은 인권을 계급 투쟁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부르주아(자본가)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를 착취했습니다. 그는 부르주아 계급을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해야만 진정한 인권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레닌은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간이 필요하며, 이 기간 동안 노동자 계급이 국가 권력을 행사하여 반혁명 세력을 억압하고 혁명을 수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독재라는 개념은 혁명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요약하자면, 레닌의 인권 개념은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념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한 사회주의 사회 건설이라는 목표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그는 노동 계급을 위한 특정 경제적, 사회적 권리를 옹호했지만, 그의 접근 방식은 종종 개인의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적 개념과 충돌했으며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하는 등 권위주의적 경향으로 비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