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이 함께 하는 바이블칼리지-갈라디아서 3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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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신앙, 거짓 신앙(갈 5:2-15)
나는 모태신앙, 그런데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건 고등학생 때였다. 그 전까지 나의 신앙생활은 생명력이 없는 죽은 신앙이었다.
교회 안에 생명과 관련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생명과 관련 없는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이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다.
하나님은 그걸 구분하신다.
<바른 신앙의 특징>
1)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자유하다. (갈라디아서의 5장 1절을 다시 보자.) 이것은 다중적인 자유이다.
갈라디아서 5:1 (NKRV)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가) 하나님의 호감을 사려고,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뭔가 해내려는 율법의 압제로부터 자유한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 스스로 어떤 노력이나 자격이나 공로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얻고 호감을 얻는 것이 불가능함을 율법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다.
율법 앞에 섰을 때, 율법을 완전히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는 죄인이다.
오직 은혜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 호감을 얻기 위해 우리의 업적과 공로가 필요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셨고,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알려준다.
이걸 아는 자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
나) 하나님 앞에서 참 자유를 얻으면 자기로부터 자유하다.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고 싶어하고, 자신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노력하던 것으로부터 자유해진다.
아무 자격 없는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자기를 가치 있게 만들려고 하는 자기중심적 자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다.
다) 이런 자유를 얻으면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이 땅의 돈과 명예와 사람의 평판에서 자유를 얻는다.
하나님이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받으신 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의 평판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명예를 얻는 것을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명예를 위해서 살아선 안 된다.
성경은 땀흘려 돈을 버는 것을 절대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돈을 위해 살아선 안 된다.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얻으면 이 땅에서 자유를 얻는다.
라) 예수님을 믿으면 죄에서 자유를 얻는다.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가지고 태어난 죄는 그 어떤 것으로도 떼어낼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그 모든 죄를 해결해주셔서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셨다.
만약 우리 신앙생활이 기쁨이나 자발적인 게 아니래 매여서 하거나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거라면, 아직 바른 신앙에 서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신앙이 어리고 연조가 짧아서 자발적으로 할 수 없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어린아이들이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훈련을 해야 한다.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신앙의 연조가 있고, 예수를 분명히 믿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신앙 생활을 매여서 하거나 억지로 마지못해 한다면,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바른 신앙은 자유를 가져다주고, 그 자유는 우리가 자원함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와 기도와 봉사를 할 수 있도록 한다.
<거짓 신앙에 대한 경고>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바른 신앙에 굳게 서는 것을 방해한다. 그들의 방해전략은?
갈라디아서 5:2 (NKRV)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할례를 받으라고 한다.
예수를 믿는 것도 좋고, 은혜를 따라 구원받는 것도 좋은데 그게 전부가 아니고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고, 금식을 행해야 온전한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믿음과 은혜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위험은 갈라디아 성도들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찾아온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값없이 구원을 얻었다고 믿다가 왜곡된 종교성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면 은혜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꾸 외적인 표시를 갖추고 싶어한다.
그런 잘못된 신앙은 어떤 결론을 도출하냐면, 2절의 후반절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예수님을 믿는 것에 외적인 행위를 더해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은, 예수님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온전한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 찾아오는 결과는 희망적이지 않고 치명적인 고통을 유발한다.
갈라디아서 5:4 (NKRV)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할례를 받는 것과 같은 행위가 있어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주장하는 건, 예수님과 자신은 상관 없는 사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구원은 아무 자격 없는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은혜이다. 예수님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뭔가 율법을 더해야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뭔가를 더하려고 하면 은혜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계속 살면 생명이 없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바른 신앙은 어떤 신앙인가?
1) <성령으로 사는 것>
갈라디아서 5:5 (NKRV)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바른 신앙생활은 눈에 보이는 것을 내세우는 게 아니다. 바로 성령의 감동과 인도와 도우심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생활이다.
사실, 할례는 바로 내면의 표시였다.
할례는 받은 자기 자신만 알 수 있는 표시였다. 그런데 어느새 할례가 모든 사람에게 외적으로 요구하는 조건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로마서 말씀.
로마서 2:28–29 (NKRV)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이 마음에 할례를 하는 것이다.
바른 24)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갈라디아서 5:6 (NKRV)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6절에서도 ‘믿음’을 강조한다. 그런데 무슨 믿음인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
사랑이 무엇인가?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한정돼서 하는 게 사랑이 아니다. 상황이 될 때 하는 사랑이 아니다.
남을 때 일부분을 주는 게 사랑이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꺾는 것이다.
사실 본성적으로는 할 수 없는 사랑이다.
자기가 직접 낳아 기른 자식에게 마음을 쏟으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본성적인 사랑의 대상인 것이다.
이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본성적으로 거부하고 싶고 사랑하기 싫은 사람이나 상황이 있다.
예수님도 십자가 지시기 전에, 이 잔을 옮기실 수 있으시면 옮겨달라고 기도하셨다. 본성적으로 거부하고 싶은 사건인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그 본성을 부인하시고 하나님께 다시 기도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리고 정말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육체가 끌리는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사랑하셨다.
6절 말씀처럼, 예수님 안에는 할례나 무할례는 효력이 없고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 십자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할례를 받았기 때문인가? 성경을 많이 읽었기 때문인가? 봉사를 많이 했기 때문인가? 후원을 많이 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저 사랑 받았기 때문이다.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데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을 통해 이 은혜를 깨닫고 예수님 안으로 달음질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이 그들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 유대주의자들에게 흔들리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바울이 말한다.
갈라디아서 5:11 (NKRV)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바른 진리는 할례를 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할례를 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해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십자가 복음을 전했다.
이 십자가 복음은 걸림돌을 가지고 있다.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오해해서 들으면 안 된다. 십자가 복음이 우리 성도가 바른 길로 가는 데에 걸림돌 역할을 한다는게 아니라, 우리 속에 죄 된 본성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라는 말이다.
십자가 복음은 항상 우리의 본성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 그러면서 우리 본성을 고단하게 하고,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키기보다 실망시킨다.
나의 만족을 위해 욕심 부리지 마라.
대접받고 싶은만큼 남을 대접해라.
도움이 필요한 자를 모른척하지 마라.
너 자신을 부인하라.
남을 위해 희생해라.
우리 본성이 이 복음을 마주하면 어떨 것 같은가?
성가시다. 귀찮다. 짜증난다. 우리 본성에게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거짓 교사들은 이 점을 악용하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을 흐릿하게 만들고 장애물처럼 여겨지지 않을 만큼 그 높이를 깎아내린다.
예수를 믿으면 돈 잘 벌고,
병이 무조건 낫고,
명예를 얻게 되고,
만사가 형통할 것이고,
율법을 잘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고 거짓말한다.
우리 본성에 거슬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
바울은 이런 거짓말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한다고 할만큼, 이 나쁜 권면이 큰 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이 무엇인가?
갈라디아서 5:14 (NKRV)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할례를 받고 여러 조항을 행하는 것에 있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이웃을 사랑하며 살기 위해선 성령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럼 육체의 욕심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육체에게 마음을 주는 사람은 성령을 거스른다. 하지만 성령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은 열매를 얻는다.
2. 성령의 열매
성령님을 따라가면 썩지 않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갈라디아서 5:22–23 (NKRV)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게 있다.
19절에서, 육체의 일은 원어상으로 보면, 복수형으로 돼 있다.
하지만 5장 22-23절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는 단수형이다. 여러 가지가 열거되지만, 이 모든 게 하나의 열매라는 것이다.
육체를 따라 사는 일은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부조화스럽다.
하지만 성령의 열매는 하나다.
일관성 있다. 통일성 있다. 좋은 의미로 단순하다.
성도의 가정 생활, 직장 생활, 교회 생활을 다 둘러보아도 일관성 있고 통일성 있는 태도가 나타나보인다.
성령의 열매이니까 맛과 향과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그래서 직장 동료들이, ‘어우, 교회 사람들 안 좋게 봤는데, 철수씨 보면, 영희씨 보면 교회 가보고싶다는 생각이 든다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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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모양, 예수의 흔적(갈 6:11-18)
갈라디아서 6:17 (NKRV)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진정한 흔적은 내면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이다.
‘흔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티그마타’이다.
이 말은 과거에 주인이 노예나 짐승에게 자신의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해 찍은 도장을 뜻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유권이 예수님께 있고, 그분이 자기 주인임을 보장하는 도장이 찍혀있다고 한다.
예수의 흔적이 마음 속에 있으면, (성령을 뜻함) 자연스레 주님을 위해 살고 싶어진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믿음대로 순종하시길 축복한다.
#갈라디아서와 야고보서 비교
* 우리는 갈라디아서의 중요한 말씀 2장 16절을 집중해서 살펴봤다.
갈라디아서 2:16 (NKRV)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한 사람도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없다는 진리이다.
그러나 그동안 이 말씀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이 진리가 제대로 정리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나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자꾸 놓친다.
행위로 구원받지 않았기 때문에 성도가 된 이후에도 행위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오해한다.
그래서 야고보서 본문을 가지고 한 번 더 갈라디아서 전체를 정리해보자.
행함이 없는 믿음
야고보서 2:14 (NKRV)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한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그 믿음대로 행하지 않으면 무슨 유익이 있냐고 질문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삶에 구체적인 증거가 나타난다.
삶이 변하기 시작한다.
강의를 듣고 있는 성도님들도 경험했을 것이다. 나도 경험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당연히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세상 방식대로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지기 때문에 삶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내가 믿는다’고 말할 때는 언제나 믿는 결과가 행위로 구체적인 차이를 가져온다.
그런데 믿는다고 해 놓고 행함이 없다?
야고보는 이런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다 말하고, 심지어는 자기를 구원할 수도 없다고 한다.
아직까지 헷갈린다. 6주동안 뭔가 행위를 쌓는다고 해도 구원 받을 수 없다고 해놓고,
이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고 구원 받을 수도 없다고 하니까,
행하라는 말이야? 행하지 말란 말이야? 헷갈린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야고보서 2:15–17 (NKRV)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한 지체가 헐벗고 굶주려 있는데, 말로만 평안하길 바랍니다.
양식이 채워지길 바랍니다. 이러면 무슨 유익이 있냐는 말이다.
이 사람 내면에 그 지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까?
빨리 그 사람을 지나치고 싶은 마음 뿐일 것이다. 빨리 내 눈 앞에서, 내 생각에서 사라져서 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싶은 생각 뿐이다.
행함이 없다. 사랑에 근거한 행함이 없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으면 구체적인 변화와 행동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2.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는 것인가?
야고보의 주장에 어떤 사람이 반론을 제기한다.
야고보서 2:18 (NKRV)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무슨 말장난 하는 것 같다.
이 사람은 믿음과 행함을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다.
너는 믿음이 좋다고 평판이 나 있으니까, 행함이 없어도 인정해주겠다. 그리고 나는 행함, 곧 실천과 봉사를 잘 드러내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라고 묻는 것이다.
둘 다 잘못된 게 아니지 않느냐? 자기 취향에 맞게 신앙생활하면 되는 거 아니냐?
이렇게 묻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동의하는가?
아니다. 큰일 난다.
야고보가 반론한다. 18절 하반절이다.
야고보서 2:18 (NKRV)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한 번 보여 줘봐라.. 네 속에 믿음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건데? 다른 사람들이 네가 믿음 있는 사람이란 걸 어떻게 알 수 있는데?’ 라고 붇는다.
그리고 야고보는 자신은 믿음을 이렇게 보이겠다고 한다.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이게 성경이고 기독교다.
행함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리고 신대원 조직신학 교수님은 증기기관차에 비유하셨다.
불이 붙은 증기기관차는 가만히 있지 못 한다. 움직인다. 올바른 방향으로.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7:20 (NKRV)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우리가 포도열매를 포도열매로 알 수 있는 것은? 포도 열매가 눈에 보여야 알 수 있다.
믿음 있는 자인 걸 알 수 있는 건? 행함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이 성도의 열매다.
3.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위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위는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분명 갈라디아서에서 계속해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데,,
우리가 ‘행위’라는 단어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잘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행위'를 윤리적인 삶, 특별한 인물들처럼 영웅적으로 하는 행동들을 떠올린다.
완전하고 실수가 없는 행실을 떠올린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위는 이런 게 아니다.
야고보서 2:21 (NKRV)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런 행위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횃불 언약, 할례 언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삭을 얻고, 이삭을 통해 많은 후손들과 결국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걸 믿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느다.
분명 그는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삭을 바치려고 한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온전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삭을 부활시키실 것을 또한 믿었고, 그래서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야고보서 2:21–23 (NKRV)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 말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건 순서가 잘못된 말이다.
믿음과 행함이 같이 일하는 것이다. 증기기관차처럼.
그것을 보고 ‘온전하다’라고 하는 것이다.
#생각해볼 질문
#생각해볼 질문
나는 하나님의 호감을 사기 위해 무엇인가 업적과 공로를 쌓으려고 하는 성도인가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열매를 맺는 성도인가요?
성도는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고, 은혜로 값없이 주어진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릅니다. 하지만 ‘믿음’은 ‘행위’로 발현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진정성은 예수님을 믿는 고백이 만들어 내는 ‘행위’에 있습니다. ‘믿음’에서 수반되는 온전한 ‘행위’가 내 안에서 흘러나올 수 있기를 간구하며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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